회양지방의 통치가 어려워지자, 무제는 급암을 불러서 그곳의 태수로 삼으려 했다. 급암이 사양하자, 황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회양 지방의 백성과 관리들이 서로 잘 어울리지 못하지만, 그대의 중후함이라면 누워서도 그곳을 잘 다스릴 수 있을 것이오." 황제는 이 바른말 잘하는 충신의 명성과 기백이라면, 특별한 대책 없이도 그곳을 잘 다스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제의 예상대로 급암은 회양에서 10년 동안 살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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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과 병력 면에서도 양한 사이의 편차는 크지 않다. 한무제가 한반도에 한사군을 설치할 당시의 위세는 후한시대에도 대체로 유지됐다. 교지가 반란을 일으키자 마이 평정했으며, 한무제는 온 힘을 다해 흉노를 정벌했다. 이 유목민족은 왕망 시대 이후 영원히 남북으로 분리됐다. 후한시대 때 두헌은 흉노를 상대로 큰 전과를 올렸다. 서기 89년 북방정벌에 나선 그는 요새 밖 3,000리까지 진격했는데, 각 부에서 항복한 사람만 20만 명이었다. 그의 부하들은 5,000리를 더 추격해서, 북 선우를 자신이 어디까지 도망했는지 알지 못하는 지경에 빠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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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매관매작으로 소수민족으로부터 마필을 공급받았다는 뜻이다. 안록산과 같은 시기에 절도사를 지낸 왕충사의 전기 속에는 변방의 "국경지역 교역시장(市)에 이르러 수레로 말 값을 높게 보상하여 주니, 여러번족들이 다투어 바꾸어갔다"고 되어 있다. 그는 지금의 간쑤 지역 임허인하서농우절도사를 겸직할 때 원래의 임지였던 하동 사방의말 9,000필을 농우 지역으로 옮겼다. 여기서 당시 정부의 마필 관리에 한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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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당나라는 안록산의 난이 평정된 다음에 할거한 번진들 때문에기울었다고 한다. 당왕조의 덕종과 헌종은 번진을 줄이려는 정책을 써서이 문제를 해결해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이러한 평가는 당나라의 패망을 왕조사적 측면에서 보기 때문에 나오는것이다. 당왕조는 초기에 통일을 하고, 전통적인 방법으로 문제도를완성하여 공식과 원칙에 따라 위에서 아래로 모든 제도를 시행하려고했다. 그러나 이러한 공식과 원칙은 사회변화와 지역적 차이에 부합하지못했다. 그리하여 지역 실정에 맞도록 번진이 만들어졌고, 세금제도도양세제로 바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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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지금까지 현대주의자들의역사적 방식을 충분히 분명하게 설명한것처럼 보인다. 그들의 방식을정리하자면, 우선 철학자가 길을 열고역사가가 그 뒤를 따르며, 그 다음 순서에따라 기록 분석이 따라온다는 식이다.
우리는 지금 어떤 한 가지 해석법과맞서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문제의이 해석법과 맞섬으로써 실상은불가지론과 우주 내재론, 그리고진화론에 맞서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런이유 때문에, 이 새로운 해석법을신봉하고 사용하는 자는 누구든지 그해석에 포함되어 있는 오류들을받아들임으로써 가톨릭 신앙의 반대편에서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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