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 3대 왕 태종은 조선이란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 자신이 등극한후 곧바로 맏아들 양녕을 세자로 세워놓았으나 양녕이 이상하리만큼 여색을 밝혀 궁중 안팎에서 물의를 일으킨 사례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다.그 중에 재상의 첩인 어리를 범하고 궁중에까지 데려와 큰 물의를 일으킨것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거니와, 이러한 전말을 「『조선왕조실록』은 냉정하게도 기록하고 있다. 역사를 다루는 기록으로서 실록을 읽으면서 나는 조선왕조의 사관들이야말로 가장 냉정한 리얼리스트란 생각이 드는것은, 바로 어리를 둘러싼 양녕대군의 내적인 갈등, 그리고 이러한 문제때문에 세자를 폐하고 셋째 아들을 세자로 세웠다가 왕위를 물려주는 과정이 마치 영화를 보는 듯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음을 발견하고부터다.
그야말로 왕이 되어 무엇을 조심하고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아주 간결하게 정리해, 스스로에게 말하고 있다. 부디 신하들의 바른 소리를 거부하지 말라는 것이다. 세자인 정조는 중국 역사에 나오는 인물들에 대한 공부를 끝도 없이 했지만 정작 관심은 조선의 상황에 대한 개선이었고 그런면에서 한 세기 전 농정의 개혁을 위해 애를 쓴 김육金堉(1580~1658)에 대해존경의 마음을 갖고 있었다. 정조는 문정공 김육의 화상畵像(초상화)을 보고는 찬贊을 쓰기도 한다.
2. 진나라는 B.C 403년에 조(趙), 한(韓), 위의 세 나라로 분할되었다. 이 분할로 전국시대가 시작된다. 덧붙이자면 춘추시대의 춘추오패 가운데 송, 진, 오, 월 등이 사라진 대신 전국시대에는 전국칠웅이 통치했으며 이 가운데 진나라에서 분리하여 독립한 한, 위,조 3국이 등장한다(네이버 백과사전 참조).
"신은 생각건대, 고금 이래로 일치일란治一亂(정치를 잘 하다가 못하는 것)이 오랫동안 반복돼 왔는데, 그러한 차이는 천하의 동태와 흐름을어떻게 파악하느냐에 따라 나뉘어지고, 그것을 파악하는 것은 임금의마음에 달려 있는 것이니, 임금의 한 마음이 밝으냐 어두우냐에 따라서 인재를 기용함에 잘못)와 정(잘됨)이 있게 되고 인재 기용에 옳고 그름이 있음으로 인하여 천하의 안위가 판가름나는 것이라고 봅니다. 세상일이 잘 되고 안되고는 알기 쉽다고 하겠지만 지극히 은미한 본심은 지키기 어려운 것이며, 민정民의 향배는 알 수 있으나 좋고 나쁘고를 파악하는 마음은 일정하지가 않아서 매우 두려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