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입의 재발견 - 자기진화를 위한
미하이 칙센트미하이 지음, 김우열 옮김 / 한국경제신문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책을 무슨 분야로 분류해야 하나? 인문서? 자기계발서는 아니다. 이름이 상당히 자기계발서스럽지만 자기계발서를기대하고 '어떻게 하면 몰입하고 몰입의 이득이 무엇인가?' 이런  기대하고 읽으면 절대 안되는 책이다초반에 읽을 때는 여기저기서 언급되었던 명성에 비해 생각보다 그냥 그랬던 책이라고 생각했는데 측정도구와 진실의 탐구를 가지고 한의사로써 기존의 한의학  이론과 새로운 한의학 연구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관점을 제공해주는 이야기 라던가청교도윤리, 종교의 변질  흥미로운 내용들이 중간중간 있다. 하지만 자신의 이론을 피력하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당위적인 이야기를 하느라 뒤로 갈수록 상당히 지루해지져서 한눈으로 읽고 한눈으로 빠져나가는 느낌?

 

그래도 간만에 메모 많이 안하고 편하게 진도를 나갈  있는 책이었는데  밈의 개념은 상당히 흥미롭지만 (원래 유명한단어였던거 같은데  이번에 처음 알았다) 뒤로 갈수록  지루하고 저자가 너무 나갔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모든 것을 밈이 살아남기 위한 것으로 설명하려 든다.  깔때기. 유전자결정주의랑 다른게 뭔가?

개체가 유전자를 복제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주장처럼, 미하이 역시 개체는 밈을 복제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는 말을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인간의 행동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인간의 의지는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읽는 내내 들게 하는. 물론 그런 비판은 유전자 결정론에도 동일하게   있다.

 

 

그리고 중간에 청교도윤리가 잠깐 나오는데  생활이념이 청교도의 그것과  비슷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언제 한번은  봐야겠다. 종교등 인문학에 관한 책들도 봐야 하는데시간이 없어서 선뜻 손이  안간다. 의학관련 책들 사놓고 쌓아둔게 많아서.   막스베버는 이렇게 썼다. "그는 부를 쌓고도 할일을 잘해냈다는 바보 같은 느낌 외에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라는 구절이 있는데  구절이 자꾸 뇌리에 남는다.청교도 처럼 금욕하고 열심히 일하고 성취를 이룬 후에 남는 것이 "할일을 잘해냈다" 정도라면 인생의 후반기에 상당히후회가 들지 않을까? 너무 늦기 전에 한번 읽어보긴 해야겠다. 청교도 윤리에 대한 해석이 저자만의 독창적 해석인지 막스 베버의 해석도 그러한지는 모르겠지만, 청교도 윤리에 빠져있는 사람은 결국 청교도 윤리라는 거대한 게임에 몰입하여 자기도 모르게 기업과 생산성의 노예가 되어 버린것일지도 모른다는 해석 섬찟하지 않나? 청교도 윤리는 어쩌면 '피할수 없으면 즐기자' 류의 일종의 자기기만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장 발전적이고 생산적인 자기기만이 아닌가생각하고 있었는데  발전과 생산이 누구를 위한 것인가 라는 질문에 이르면 세련된 이름의 착취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하는 의문이 들기도 한다. 마치 루시드 폴의 '사람이었네' 노래 처럼. 이래서 인문학적 소양이나 과학철학 같은 것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자기계발서가 단지 열심히 일하라고 노래한다면 인문학서적들은 ? 무엇을 위해서? 라고 근본적으로질문하게 만드니까

 

종교에 관해서도 평소에 종교의 본질적 교리 자체와 종교인들, 종교단체들의 잘못된 행태를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하고있었는데 저자는 그에 관해서도 종교라는 밈과 밈에 기생하는 것들로 인한 변질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한다

 

[저자가 말하고 싶은 내용들 중에서]

(203) 
직업선택과 전공선택에 대하여
대학원과정은 가장 유명한 과목을 가르치고 취업공고도  분야의 인재에 국한된다. 다행스럽게도 이러한 젊은이들은앞으로 10 정도 후에  최신 분야가 얼마나 시대에 뒤쳐진 것이 될지는 거의 고려하지 않는다. 과학계가 특별히근시안적이거나 완고한 것은 아니다. 단지 어디서나 그렇듯이 성공적인 밈이 특정 집단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면 현실이 기이하게 왜곡되는 것일 이다. 이에 맞서기 위해   있는 일은 거의 없지만 자신이 자기 행동을 통제하고 있다고 빋고 자기만 절대진실을 알고 있다고 믿는 망상에 빠지지 않는 것은 중요하다

(205) 
인간과 밈사이의 관계를 가장  보여주는  - 티브이 시청
티브이는 인간과 밈사이의 관계를 보여주는 탁월한 사례다. 우리가 주도권을 쥐고 밈으르 우리 목적에 맞게 활용하지 않는다면 대개 밈이 주도권을 잡고 자기 목적에 우리를 이용한다 . 물론 밈은 자기 목적인 무엇인지 모르지만 우리도대부분의 경우 모르기는 마찬가지다

(209) 
밈과 물질주의 - 인간은  소비에 목매나 
인류가 물질적 밈에 특히 쉽게 무너지는 까닭은 거기서 얻는 편의 때문이 아니라, 앞서 3장에서 언급했듯이 물질과 과시형 소비가 자아 확장의 뚜렷한 상징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소유한 물건을 바라보면서 사람은 망상에 빠져 자신이대단하다고 생각한다.

 

(347) 자신을 증명하려는 아이

안타깝게도 성장보다는 정체로 이끄는 목표로 자아를 개발하기가  쉽다.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은 사람들이 관심을 내부로 돌리고 주변의 가능성에  감은채 자기를 방어하려고 하는 가장  이유다.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끼거나 자신이 무능력하다고 느끼거나 끊임없이 죄책감에 빠지거나 부모에게 조종당하거나 통제받는다고 느끼는아이는 자신이 사랑과 인정을 받아 마땅하다는 점을 증명하려고 쉬지 않고 애쓰면서 힘을 소진한다

그런 아이가  좋게도 타고난 재능이나 학습된 기술이 있다면 자신을 증명하려는 시도가 대단한 성취로 이어질 수도있다. 뛰어난 인물들은 비참한 어린시절을 보낸 사례가 많고 어른이  후의 야망에 자신을 증명하려는 욕구가 드러날 때도 많다

 

(350-351) 플로우와복합성

자아의 지평을 넓혀주는 활동에서 플로우를 발견하지 않는  즐거움만으로는 바람직한 방향으로 진화를 이끌어나가지못한다. 따라서 '복합성을 추구' 해야 한다. 지속적인 호기심과 관심,  새로운 도전을 발견하려는 마음이 적절한 기술을개발하겠다는 의지와 결합될  평생학습이 실현된다. 이러한 태도가 있으면 나이가 90 되어도 싱싱하고 들떠서 살게된다

(중략) 우리는 단지 자신이 현재 추구하는 사익이나 현재 중요하게 여기는 것만 아니라 모든 생명의 집단적인 복지를, 그것이 미래에 어떤 기이한 형태가 되더라도 기꺼이 지지해야 한다

-> 이부분이 저자가 말하려는 핵심이 아닌가 싶다

 

(399-400) 무엇이 체제를 바꿀  있는가? 키스쿨 프로젝트 이야기

몇몇 개인이 뭉쳐서 바꿔보겠다고 결심하면 체제를 바꿀  있다. (중략미래를 만들어가는 최고의 희망은 대규모 정부 프로그램이나 대통령의 공약이나 번잡한 관료적 절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중략) 열정과 의지가 가장 강하고 새로운 해결책을 만들어낼 법한 사람들은 바로 민초들이다

키스쿨과 같은 개별적인 시도의 문제점 그것이 대체로 단편적이고 특수하며 거기에 직접 참여하는 사람들을 넘어서확산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다음의 두가지를 달성해야 한다

1) 관심있는 개인을 기능집단 내부로 편입 길을 찾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창조적인 소수가 변화에 필요한 정보와 기술을 모으고 그런  효과적인 정치세력으로 탈바꿈할  있다

2) 그렇게 생겨난 에너지를 집중하여 복합성을 증진하는 방향으로 이끌어가도록 해줄 공통의 목표와 가치관 필요하다

 

[종교의 변질  청교도윤리와 관련하여]

(366) 유교의 변질

공자가 기여한 밈은 의태 기생들의 침략을 받았고, 기생들은 자기 이익을 위해 법과 질서를 악용했다. 전통 존중은 권력자들에게 편리한 도구가 되었고 권력자들은 자신의 고귀한 신분이 하늘의 뜻이라면서 지위를 정당화했다. 억압된 가난한사람들은 반란을 일으켰다가 하늘의 이치를 거부하는 자라는 혐의를 받았다

(373) 종교에 대하여

 어떤 문화적 게인도 착취나 악용을 피할  없다. 유교체제는 처음부터 이기적인 통치자들에게 조종되었다. 결과적으로 유교 때문에 중국인들은 힘을 잃어버렸다. 이슬람은 자기만족감에 굴복했고, 예수회는 권력때문에 자주 타락했으며,정당성 없는 직업윤리는 과도한 통제성향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다

 

(370) 청교도 윤리

청교도 윤리관은 북서유럽과 북미의 자본주의 기업정신과 산업생산성의 토대 되었다

교황을 부정하고 가톨릭교회에서 구원을 보장하는 수단이던 성사도 부인하자 초기 개신교도들은 자신의 영혼이 영생을얻게 될지 아닐지를   없었다. 영혼의 운명이 육체의 운명보다 중요하다가 믿는 문화에서 이것은 중대사였다. 장칼뱅이 제시한 해결책이 신뢰를 받게 되었는데 이것은 사람이  일을 잘하는 지에 따라 구원이 결정된다는 논리였다하느님이 천국에  운명이 아닌 이에게 부와 명예를 주지 않을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근면함과 영원한 복락을 연관지은 이러한 밈의 결과로 청교도 상인과 장인은 이전보다  열심히 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느끼게 되었다. 그렇게 한다면 그야말로 일거양득이  터이므로 부자도 되고 동시에 거룩해지고.

이러한 윤리관을 받아들인 사람은 대개 노동의 열매를 거두지 못했다. 사실 오히려  전보다 즐거움도 자유시간도 줄어들었다. 막스베버는 이렇게 썼다. "그는 부를 쌓고도 할일을 잘해냈다는 바보 같은 느낌 외에는 아무것도얻지 못했다"

 

(중략) 청교도 윤리는 이를 믿는 사람은 그에 따라 삶을 영위하면서 믿음이 연약해질  일어나는 근심을 피할  있었다

(중략) 바꿔말하면 청교도 윤리는 정신에너지를 집중할  있는 훌륭하고 새로운 하나의 '게임' 제공 셈이다. 그런 게임에 참여한 노동자 (정확히 말하자면'선수') 다른 사람이 끊임없이 혼란에 빠져있는 동안 자기 일을 질서 있게 해나갈 것이고, 시간과 공간도 잊은  일할 것이다. 청교도들이 온갖 종류의 즐거움을 배척해야 한다고 무척이나 강조했다는 점은 아이러니다. 그러나  해석에 따르면 청교도들은 분명 금욕적인 생활방식의 혹독함 자체를 즐겼을 것이나다만 그보다  복합적인 쾌락과 즐거움에만 인상을 찌푸렸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근면한 사람, 때떄로 일중독자라 불리는 사람은 자신이 일을 즐긴다는 말을, 자기 일이 중요하지 않다고 인정하는 셈이   말을 부인할 것이다. 일중독자는 자기가 휴가를 떠나거나 티비쇼를 보거나 편안히 쉬는 것보다 일을   즐겁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으려  것이다

 

[한의학 해석과 관련하여]

 

#  3장의 내용은 세상의 일을 진실하게 이해하는데 걸림돌이 되는 3가지를 이야기 한다. 유전명령, 문화, 자아의 요구이다. 종교와 과학에 대한 구절중 한의학 이론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에 대한 통찰을 제공해 주는 내용이 있어서

(108) 종교가 이제까지 인간이 만들어낸 가장 중요한 지식전달도구라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다. 종교에 맞먹을 만한 것으로 과학이 있다. 과학은 습득한 정보를 객관적으로 점검하는 방편으로서  활용하면 그릇된 결론을 체계적으로 물리칠  있다. 종교는 비록 이러한 자체수정기능이 없고 새로운 지식을 포용하는데 어려움이 있지만 과학을 뛰어넘는 몇가지 장점이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종교가 수세기동안 존재했고 인간 생존에 필요한 정보를 과학보다 오래저누터 보존해왔을가능성이 높다 것이다. 이러한 까닭만으로도 종교의 통찰력을 무시하는 것은 우둔한 일이다.  

(111) 물리학자들이 깨달았듯 도구와 측정수단은 각기 다른 편향된 시각만 제공할  현실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은 누군가  시각을 이해하려고   형성된다. (중략) 우리가 현실이라 부르는 것은 모두 우리가 직접 참여하는 능동적인 현실구축 과정에서만 드러난다. ( 중략 ) 바꿔 말하면 이론이 아무리 복잡하고 측정이 아무리 정확하다 하더라도 이론과 측정도구를 만든 것이 우리 자신이므로 우리가 배우는 것은 모두 관찰자로서의 관점에 좌우되게마련이라는 이다

(112) 호주의 원주민들은 바다에서 육지로 매년 천둥과 번개를 동반하여 몰려오는 우기를 거대한 뱀이 구름속에서 짝짓기 하며 비가 내리게 하는 것이라고 상상햇다. 그들이 아는  이것이  현상을 가장 의미있게 설명하는 가설이었다. 현대의 설명은 기온차이, 증기냉축, 바람속도 등을 토대로 한다.  이야기는 거대한  이야기보다 우리들에게 훨씬 타당하게 들리지만 지금부터 수백년 후의 사람들에게는 마찬가지로 원시적이지 않겠는가?

 

=> 예전의  설명들을 보니 지금의 한의학 이론들이 떠오른다. 하지만 현재의 의학이론도 마찬가지의 운명일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이 진실인지 신경쓸 필요가 없다는 것인가?  책은 그에 대해서 이렇게 답한다

(한의학이론이 완전한 모델이 아니고  설명력이 높은 모델이 있다면 그것으로 갈아타야 한다는 관점 등은 이제는  언급할 필요도 없는 내용이리라)

 

(112-3) 그렇다면 무엇이 진실인지 신경 써봐야 쓸데 없다는 것인가? (중략) 지금 우리가 아는 현실이 어차피 절대적 진실이 아니니 그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면 금세 후회하게  것이다. 비록 현실을 왜곡된 안경으로만  있다 하더라도, 완벽하지 않다고 멸시하느니 파악할  있는 만큼이라도 활용하는 편이 낫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이해하려고 노력해도 궁극적 진실은  감춰진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기운 빠지는  아닌가? 그렇지 않다진실추구의 목적이 절대적이고 확정된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면. 확실성을 찾으려는 사람은 실망할 수밖에 없다. 마치 파우스트처럼 신학과 철학과 과학을 평생 연구한 뒤에  한가지도 자신있게 진실로 믿을 없다는 점을 알게  것이다

(중략)  누구도 지금껏 살았던 사람 가운데 실재를 모두 이해하지 못했고 앞으로 누군가 그렇게 하리라 상상하기도 어렵다. 진화와 마찬가지로 실재를 향한 탐험은 결코 끝나지 않는다. (중략) 천동설이 지동설로 바뀌었을  일어난 지적혁명을 상상해보라. (중략) 우리가 찾아야  현실이 비록 '절대 진실' 포괄하지는 않을테지만 거기에  조각 진실은 담겨있을 것이다. 창조적 생산물을 결코 제멋대로 생겨나지 않는다

 

(250) 과학과 가치
과학의 기본 원리  하나는 '그래야 하는 '  아니라 '현재 그런 '  다룬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가치는 과학의 연구에서  자리가 없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런 원칙은 오직 사실을 기술하는 데만 적용될 , 사실 해석에는 적용되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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