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릴케 현상 > [퍼온글] 스티브 잡스의 스탠포드대 졸업 축사

스티브 잡스의 스탠포드대 졸업 축사

I am honored to be with you today at your commencement from one of the finest universities in the world.
먼저 세계 최고의 명문으로 꼽히는 이 곳에서 여러분들의 졸업식에 참석하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I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Truth be told, this is the closest I've ever gotten to a college graduation.
저는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태어나서 대학교 졸업식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은 처음이네요.

Today I want to tell you three stories from my life. That's it. No big deal. Just three stories.
오늘, 저는 여러분께 제가 살아오면서 겪었던 세 가지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그게 답니다. 별로 대단한 이야기는 아니구요. 딱 세가지만요

The first story is about connecting the dots.
먼저, 인생의 전환점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I dropped out of Reed College after the first 6 months, but then stayed around as a drop-in for another 18 months or so before I really quit.
전 리드 칼리지에 입학한지 6개월만에 자퇴했습니다. 그래도 일년 반 정도는 도강을 듣다, 정말로 그만뒀습니다.

So why did I drop out?
왜 자퇴했을까요?

It started before I was born. My biological mother was a young, unwed college graduate student, and she decided to put me up for adoption.
그 것은 제가 태어나기 전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제 생모는 대학원생인 젊은 미혼모였습니다. 그래서 저를 입양보내기로 결심했던 거지요.

She felt very strongly that I should be adopted by college graduates, so everything was all set for me!
그녀는 제 미래를 생각해, 대학 정도는 졸업한 교양있는 사람이 양부모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to be adopted at birth by a lawyer and his wife.
그래서 저는 태어나자마자 변호사 가정에 입양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Except that when I popped out they decided at the last minute that they really wanted a girl.
그들은 여자 아이를 원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So my parents, who were on a waiting list, got a call in the middle of the night asking:
그들 대신 대기자 명단에 있던 양부모님들은 한 밤 중에 걸려온 전화를 받고 :

"We have an unexpected baby boy; do you want him?"
"어떡하죠? 예정에 없던 사내아이가 태어났는데, 그래도 입양하실 건가요?"

They said: "Of course."
"물론이죠"

My biological mother later found out that my mo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and that my fa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high school.
그런데 알고보니 양어머니는 대졸자도 아니었고, 양아버지는 고등학교도 졸업못한 사람이어서

She refused to sign the final adoption papers.
친어머니는 입양동의서 쓰기를 거부했습니다.

She only relented a few months later when my parents promised that I would someday go to college.
친어머니는 양부모님들이 저를 꼭 대학까지 보내주겠다고 약속한 후 몇개월이 지나서야 화가 풀렸습니다.

And 17 years later I did go to college.
17년후, 저는 대학에 입학했습니다.

But I naively chose a college that was almost as expensive as Stanford,
그러나 저는 멍청하게도 바로 이 곳, 스탠포드의 학비와 맞먹는 값비싼 학교를 선택했습니다^^

and all of my working-class parents' savings were being spent on my college tuition.
평범한 노동자였던 부모님이 힘들게 모아뒀던 돈이 모두 제 학비로 들어갔습니다.

After six months, I couldn't see the value in it.
결국 6개월 후, 저는 대학 공부가 그만한 가치가 없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I had no idea what I wanted to do with my life and no idea how college was going to help me figure it out.
내가 진정으로 인생에서 원하는 게 무엇인지, 그리고 대학교육이 그 것에 얼마나 어떻게 도움이 될지 판단할 수 없었습니다.

And here I was spending all of the money my parents had saved their entire life.
게다가 양부모님들이 평생토록 모은 재산이 전부 제 학비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So I decided to drop out and trust that it would all work out OK.
그래서 모든 것이 다 잘 될거라 믿고 자퇴를 결심했습니다.

It was pretty scary at the time, but looking back it was one of the best decisions I ever made.
당시에는 두려웠지만, 뒤돌아 보았을때 제 인생 최고의 결정 중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The minute I dropped out I could stop taking the required classes that didn't interest me,
자퇴한 순간, 흥미없던 필수과목들을 듣는 것은 그만두고

and begin dropping in on the ones that looked interesting.
관심있는 강의만 들을 수 있었습니다.

It wasn't all romantic. I didn't have a dorm room, so I slept on the floor in friends' rooms,
그렇다고 꼭 낭만적인 것만도 아니었습니다. 전 기숙사에 머물 수 없었기 때문에 친구 집 마룻바닥에 자기도 했고

I returned coke bottles for the 5¢ deposits to buy food with,
한 병당 5센트씩하는 코카콜라 빈병을 팔아서 먹을 것을 사기도 했습니다.

and I would walk the 7 miles across town every Sunday night to get one good meal a week at the Hare Krishna temple.
또 매주 일요일, 단 한번이라도 제대로 된 음식을 먹기 위해 7마일이나 걸어서 헤어 크리슈나 사원의 예배에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I loved it. And much of what I stumbled into by following my curiosity and intuition turned out to be priceless later on.
맛있더군요^^ 당시 순전히 호기와 직감만을 믿고 저지른 일들이 후에 정말 값진 경험이 됐습니다.

Let me give you one example:
예를 든다면

Reed College at that time offered perhaps the best calligraphy instruction in the country.
그 당시 리드 칼리지는 아마 미국 최고의 서체 교육을 제공했던 것 같습니다.

Throughout the campus every poster, every label on every drawer, was beautifully hand calligraphed.
학교 곳곳에 붙어있는 포스터, 서랍에 붙어있는 상표들은 너무 아름다웠구요.

Because I had dropped out and didn't have to take the normal classes,
어차피 자퇴한 상황이라, 정규 과목을 들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I decided to take a calligraphy class to learn how to do this.
서체에 대해서 배워보기로 마음먹고 서체 수업을 들었습니다.

I learned about serif and san serif typefaces, about varying the amount of space between different letter combinations, about what makes great typography great.
그 때 저는 세리프와 산 세리프체를, 다른 글씨의 조합간의 그 여백의 다양함을, 무엇이 위대한 타이포그래피를 위대하게 만드는 지를 배웠습니다.

It was beautiful, historical, artistically subtle in a way that science can't capture, and I found it fascinating.
그것은 '과학적'인 방식으로는 따라하기 힘든 아름답고, 유서깊고, 예술적으로 미묘한 것이었고, 전 매료되었습니다.

None of this had even a hope of any practical application in my life.
이런 것들 중 어느 하나라도 제 인생에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But ten years later, when we were designing the first Macintosh computer, it all came back to me.
그러나 10년 후 우리가 첫번째 매킨토시를 구상할 때, 그 것들은 고스란히 빛을 발했습니다.

And we designed it all into the Mac. It was the first computer with beautiful typography.
우리가 설계한 매킨토시에 그 기능을 모두 집어넣었으니까요. 그것은 아름다운 서체를 가진 최초의 컴퓨터였습니다.

If I had never dropped in on that single course in college,
만약 제가 그 서체 수업을 듣지 않았다면

the Mac would have never had multiple typefaces or proportionally spaced fonts.
매킨토시의 복수서체 기능이나 자동 자간 맞춤 기능은 없었을 것이고

And since Windows just copied the Mac, its likely that no personal computer would have them.
맥을 따라한 윈도우도 그런 기능이 없었을 것이고, 결국 개인용 컴퓨터에는 이런 기능이 탑재될 수 없었을 겁니다.

If I had never dropped out, I would have never dropped in on this calligraphy class,
만약 학교를 자퇴하지 않았다면, 서체 수업을 듣지 못했을 것이고

and personal computers might not have the wonderful typography that they do.
결국 개인용 컴퓨터가 오늘날처럼 뛰어난 글씨체들을 가질 수도 없었을 겁니다.

Of course it was impossible to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when I was in college.
물론 제가 대학에 있을 때는 그 순간들이 내 인생의 전환점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없었습니다.

But it was very, very clear looking backwards ten years later.
그러나 1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모든 것이 분명하게 보입니다.

Again, you can't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s.
달리 말하자면, 지금 여러분은 미래를 알 수 없습니다 : 다만 현재와 과거의 사건들만을 연관시켜 볼 수 있을 뿐이죠.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현재의 순간들이 미래에 어떤식으로든지 연결된다는 걸 알아야만 합니다.

You have to trust in something - your gut, destiny, life, karma, whatever.
여러분들은 자신의 배짱, 운명, 인생, 카르마(업) 등 무엇이든지 간에 '그 무엇'에 믿음을 가져야만 합니다.

This approach has never let me down, and i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in my life.
이런 믿음이 저를 실망시킨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제 인생에서 남들과는 다른 모든 '차이'들을 만들어냈습니다.

My second story is about love and loss.
두번째는 사랑과 상실입니다.

I was lucky I found what I loved to do early in life.
저는 운 좋게도 인생에서 정말 하고싶은 일을 일찍 발견했습니다.

Woz and I started Apple in my parents garage when I was 20.
제가 20살 때, 부모님의 차고에서 워즈(스티브 워즈니악)와 함께 애플의 역사가 시작됐습니다.

We worked hard, and in 10 years Apple had grown from just the two of us in a garage into a $2 billion company with over 4000 employees.

우리는 열심히 일해서, 차고에서 2명으로 시작한 애플은 10년 후에 4000명의 종업원을 거느린 2백억달러짜리 기업이 되었습니다.

We had just released our finest creation - the Macintosh - a year earlier, and I had just turned 30. And then I got fired.
제 나이 29살, 우리는 최고의 작품인 매킨토시를 출시했습니다. 그러나 이듬해 저는 해고당했습니다.

How can you get fired from a company you started?
내가 세운 회사에서 내가 해고 당하다니!

Well, as Apple grew we hired someone who I thought was very talented to run the company with me,
당시, 애플이 점점 성장하면서, 저는 저와 함께 회사를 경영할 유능한 경영자를 데려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and for the first year or so things went well.
처음 1년정도는 그런대로 잘 돌아갔습니다.

But then our visions of the future began to diverge and eventually we had a falling out.
그런데 언젠가부터 우리의 비전은 서로 어긋나기 시작했고, 결국 우리 둘의 사이도 어긋나기 시작했습니다.

When we did, our Board of Directors sided with him. So at 30 I was out. And very publicly out.
이 때, 우리 회사의 경영진들은 존 스컬리의 편을 들었고, 저는 30살에 쫓겨나야만 했습니다. 그 것도 아주 공공연하게.

What had been the focus of my entire adult life was gone, and it was devastating.
저는 인생의 촛점을 잃어버렸고, 뭐라 말할 수 없는 참담한 심정이었습니다.

I really didn't know what to do for a few months.
전 정말 말 그대로, 몇 개월 동안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답니다.

I felt that I had let the previous generation of entrepreneurs down - that I had dropped the baton as it was being passed to me.
마치 달리기 계주에서 바톤을 놓친 선수처럼, 선배 벤처기업인들에게 송구스런 마음이 들었고

I met with David Packard and Bob Noyce and tried to apologize for screwing up so badly.
데이비드 패커드(HP의 공동 창업자)와 밥 노이스(인텔 공동 창업자)를 만나 이렇게 실패한 것에 대해 사과하려했습니다.

I was a very public failure, and I even thought about running away from the valley.
저는 완전히 '공공의 실패작'으로 전락했고, 실리콘 밸리에서 도망치고 싶었습니다.

But something slowly began to dawn on me.
그러나 제 맘 속에는 뭔가가 천천히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I still loved what I did. The turn of events at Apple had not changed that one bit.
전 여전히 제가 했던 일을 사랑했고, 애플에서 겪었던 일들조차도 그런 마음들을 꺾지 못했습니다.

I had been rejected, but I was still in love. And so I decided to start over.
전 해고당했지만, 여전히 일에 대한 사랑은 식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전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I didn't see it then, but it turned out that getting fired from Apple was the best thing that could have ever happened to me.
당시에는 몰랐지만, 애플에서 해고당한 것은 제 인생 최고의 사건임을 깨닫게 됐습니다.

The heaviness of being successful was replaced by the lightness of being a beginner again, less sure about everything.
그 사건으로 인해 저는 성공이란 중압감에서 벗어나서 초심자의 마음으로 돌아가

It freed me to enter one of the most creative periods of my life.
자유를 만끽하며, 내 인생의 최고의 창의력을 발휘하는 시기로 갈 수 있게 됐습니다.

During the next five years, I started a company named NeXT, another company named Pixar,and fell in love with an amazing woman who would become my wife.
이후 5년동안 저는 '넥스트', '픽사'를 만들고, 그리고 지금 제 아내가 되어준 그녀와 사랑에 빠져버렸습니다.

Pixar went on to create the worlds first computer animated feature film, Toy Story, and is now the most successful animation studio in the world.
픽사는 세계 최초의 3D 애니메이션 토이 스토리를 시작으로, 지금은 가장 성공한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되었습니다.

In a remarkable turn of events, Apple bought NeXT, I retuned to Apple, and the technology we developed at NeXT is at the heart of Apple's current renaissance.
세기의 사건으로 평가되는 애플의 넥스트 인수와 저의 애플로 복귀 후, 넥스트 시절 개발했던 기술들은 현재 애플의 르네상스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And Laurene and I have a wonderful family together.
또한 로렌과 저는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습니다.

I'm pretty sure none of this would have happened if I hadn't been fired from Apple.
애플에서 해고당하지 않았다면, 이런 기쁜 일들중 어떤 한가지도 겪을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It was awful tasting medicine, but I guess the patient needed it.
정말 독하고 쓰디 쓴 약이었지만, 이게 필요한 환자도 있는가봅니다.

Sometimes life hits you in the head with a brick. Don't lose faith.
때로 인생이 당신의 뒷통수를 때리더라도, 결코 믿음을 잃지 마십시오.

I'm convinced that the only thing that kept me going was that I loved what I did.
전 반드시 인생에서 해야할, 제가 사랑하는 일이 있었기에, 반드시 이겨낸다고 확신했습니다.

You've got to find what you love. And that is as true for your work as it is for your lovers.
당신이 사랑하는 것을 찾아보세요. 사랑하는 사람이 내게 먼저 다가오지 않듯, 일도 그런 것이죠.

Your work is going to fill a large part of your life,
'노동'은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and the only way to be truly satisfied is to do what you believe is great work.
그런 거대한 시간 속에서 진정한 기쁨을 누릴 수 있는 방법은 스스로가 위대한 일을 한다고 자부하는 것입니다.

And the only way to do great work is to love what you do.
자신의 일을 위대하다고 자부할 수 있을 때는, 사랑하는 일을 하고있는 그 순간 뿐입니다.

If you haven't found it yet, keep looking. Don't settle. As with all matters of the heart, you'll know when you find it.
지금도 찾지 못했거나, 잘 모르겠다해도 주저앉지 말고 포기하지 마세요. 전심을 다하면 반드시 찾을 수 있습니다.

And, like any great relationship, it just gets better and better as the years roll on.
일단 한 번 찾아낸다면, 서로 사랑하는 연인들처럼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욱 더 깊어질 것입니다.

So keep looking until you find it. Don't settle.
그러니 그 것들을 찾아낼 때까지 포기하지 마세요. 현실에 주저앉지 마세요

My third story is about death.
세번째는 죽음에 관한 것입니다.

When I was 17, I read a quote that went something like:
17살 때, 이런 경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If you live each day as if it was your last, someday you'll most certainly be right."
하루 하루를 인생의 마지막 날처럼 산다면, 언젠가는 바른 길에 서 있을 것이다

It made an impression on me, and since then, for the past 33 years! ,
이 글에 감명받은 저는 그 후 50살이 되도록

I have looked in the mirror every morning and asked myself:
매일아침 거울을 보면서 자신에게 묻곤 했습니다.

"If today were the last day of my life, would I want to do what I am about to do today?"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라면, 지금 하려고 하는 일을 할 것인가?

And whenever the answer has been "No" for too many days in a row, I know I need to change something.
아니오!라는 답이 계속 나온다면, 다른 것을 해야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Remembering that I'll be dead soon is the most important tool I've ever encountered to help me make the big choices in life.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것이 저에게는 가장 중요한 도구가 됩니다.

Because almost everything ?
왜냐구요?

all external expectations, all pride, all fear of embarrassment or failure -
외부의 기대, 각종 자부심과 자만심. 수치스러움와 실패에 대한 두려움들은

these things just fall away in the face of death, leaving only what is truly important.
'죽음' 을 직면해서는 모두 떨어져나가고, 오직 진실로 중요한 것들 만이 남기 때문입니다.

Remembering that you are going to die is the best way I know to avoid the trap of thinking you have something to lose.
죽음을 생각하는 것은 무엇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나는 최고의 길입니다.

You are already naked. There is no reason not to follow your heart.
여러분들이 지금 모두 잃어버린 상태라면, 더이상 잃을 것도 없기에 본능에 충실할 수 밖에 없습니다.

About a year ago I was diagnosed with cancer.
저는 1년 전쯤 암진단을 받았습니다.

I had a scan at 7:30 in the morning, and it clearly showed a tumor on my pancreas.
아침 7시 반에 검사를 받았는데, 이미 췌장에 종양이 있었습니다.

I didn't even know what a pancreas was.
그전까지는 췌장이란 게 뭔지도 몰랐는데요.

The doctors told me this was almost certainly a type of cancer that is incurable, and that I should expect to live no longer than three to six months.
의사들은 길어야 3개월에서 6개월이라고 말했습니다.

My doctor advised me to go home and get my affairs in order, which is doctor's code for prepare to die.
주치의는 집으로 돌아가 신변정리를 하라고 했습니다. 죽음을 준비하라는 뜻이었죠.

It means to try to tell your kids everything you thought you'd have the next 10 years to tell them in just a few months.
그 것은 내 아이들에게 10년동안 해줄수 있는 것을 단 몇달안에 다 해치워야된단 말이었고

It means to make sure everything is buttoned up so that it will be as easy as possible for your family.
임종 시에 사람들이 받을 충격이 덜하도록 매사를 정리하란 말이었고

It means to say your goodbyes.
작별인사를 준비하라는 말이었습니다.

I lived with that diagnosis all day.
전 불치병 판정을 받았습니다.

Later that evening I had a biopsy, where they stuck an endoscope down my throat,
through my stomach and into my intestines, put a needle into my pancreas and got a few cells from the tumor.
그 날 저녁 위장을 지나 장까지 내시경을 넣어서 암세포를 채취해 조직검사를 받았습니다.

I was sedated, but my wife, who was there, told me that when they viewed the cells under a microscope
저는 마취상태였는데, 후에 아내가 말해주길, 현미경으로 세포를 분석한 결과

the doctors started crying because it turned out to be a very rare form of pancreatic cancer that is curable with surgery.
치료가 가능한 아주 희귀한 췌장암으로써, 의사들까지도 기뻐서 눈물을 글썽였다고 합니다.

I had the surgery and I'm fine now.
저는 수술을 받았고, 지금은 괜찮습니다.

This was the closest I've been to facing death, and I hope its the closest I get for a few more decades.
그 때만큼 제가 죽음에 가까이 가 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또한 앞으로도 수십년간은 그렇게 가까이 가고 싶지 않습니다^^

Having lived through it, I can now say this to you with a bit more certainty than when death was a useful but purely intellectual concept:
이런 경험을 해보니, '죽음'이 때론 유용하단 것을 머리로만 알고 있을 때보다 더 정확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No one wants to die. Even people who want to go to heaven don't want to die to get there.
아무도 죽길 원하지 않습니다. 천국에 가고싶다는 사람들조차도 그곳에 가기위해 죽고 싶어하지는 않죠.

And yet death is the destination we all share. No one has ever escaped it.
그리고 여전히 죽음은 우리모두의 숙명입니다. 아무도 피할 수 없죠.

And that is as it should be, because Death is very likely the single best invention of Life.
그리고 그래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이 '죽음'이니까요.

It is Life's change agent. It clears out the old to make way for the new.
죽음은 '인생들'을 변화시킵니다. 죽음은 새로운 것이 헌 것을 대체할 수 있도록 만들어줍니다.

Right now the new is you, but someday not too long from now, you will gradually become the old and be cleared away.
지금의 여러분들은 그 중에 '새로움'이란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머지 않은때에 여러분들도 새로운 세대들에게 그 자리를 물려줘야할 것입니다.

Sorry to be so dramatic, but it is quite true.
너무 극적으로 들렸다면 죄송하지만, 사실이 그렇습니다.

Your time is limited, so don't waste it living someone else's life.
여러분들의 삶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낭비하지 마십쇼.

Don't be trapped by dogma - which is living with the results of other people's thinking.
도그마- 다른 사람들의 생각-에 얽매이지 마십쇼

Don't let the noise of other's opinions drown out your own inner voice.
타인의 소리들이 여러분들 내면의 진정한 목소리를 방해하지 못하게 하세요

And most important, have the courage to follow your heart and intuition.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과 영감을 따르는 용기를 가지는 것입니다.

They somehow already know what you truly want to become. Everything else is secondary.
이미 마음과 영감은 당신이 진짜로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나머지 것들은 부차적인 것이죠.

When I was young, there was an amazing publication called The Whole Earth Catalog, which was one of the bibles of my generation.
제가 어릴 때, 제 나이 또래라면 다 알만한 '지구 백과'란 책이 있었습니다.

It was created by a fellow named Stewart Brand not far from here in Menlo Park, and he brought it to life with his poetic touch.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먼로 파크에 사는 스튜어트 브랜드란 사람이 쓴 책인데, 자신의 모든 걸 불어넣은 책이었지요.

This was in the late 1960's, before personal computers and desktop publishing, so it was all made with typewriters, scissors, and polaroid cameras.
PC나 전자출판이 존재하기 전인 1960년대 후반이었기 때문에, 타자기, 가위, 폴라노이드로 그 책을 만들었습니다.

It was sort of like Google in paperback form, 35 years before Google came along:
35년 전의 책으로 된 구글이라고나 할까요.

it was idealistic, and overflowing with neat tools and great notions.
그 책은 위대한 의지와 아주 간단한 도구만으로 만들어진 역작이었습니다.

Stewart and his team put out several issues of The Whole Earth Catalog, and then when it had run its course, they put out a final issue.
스튜어트와 친구들은 몇 번의 개정판을 내놓았고, 수명이 다할 때쯤엔 최종판을 내놓았습니다.

It was the mid-1970s, and I was your age.
그 때가 70년대 중반, 제가 여러분 나이 때였죠.

On the back cover of their final issue was a photograph of an early morning country road,
최종판의 뒤쪽 표지에는 이른 아침 시골길 사진이 있었는데,

the kind you might find yourself hitchhiking on if you were so adventurous.
아마 모험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히치하이킹을 하고싶다는 생각이 들정도였지요.

Beneath it were the words: "Stay Hungry. Stay Foolish."
그 사진 밑에는 이런 말이 있었습니다 : 배고픔과 함께, 미련함과 함께

It was their farewell message as they signed off. Stay Hungry. Stay Foolish. 배고픔과 함께, 미련함과 함께. 그 것이 그들의 마지막 작별인사였습니다.

And I have always wished that for myself. And now, as you graduate to begin anew, I wish that for you.
저는 이제 새로운 시작을 앞둔 여러분들이 여러분의 분야에서 이런 방법으로 가길 원합니다.

Stay Hungry. Stay Foolish.
배고픔과 함께. 미련함과 함께

Thank you all very much.
감사합니다.

(This is the text of the Commencement address by Steve Jobs, CEO of Apple Computer and of Pixar Animation Studios, delivered on June 12,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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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멋있게 산다는 게 무언지 아는 사람 같다.
멋있게 살기 위해선 단지 세 가지만 필요하다.

첫째. 상상력...
둘째. 그 상상을 현실로 이루기 위해 배고픔과 함께 할 용기...
셋째. 당장 그 상상이 현실로 이루어지지 못한다 하더라도 지속시킬 만큼 미련할 정도의 노력과 포기하지 않는 마음.

단지 그것만 있으면 되는데....
단지 그것만 있으면 되는데....도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 뿐이다. 간단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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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깨달음,묵상]묵상이 힘든 이유... 추천 : 0

씀을 통해서 지성소로 나아가 주님 존전에서 내 실체를 보여드리며 피조물로서 살아갈 바를 새삼 확인하게 되는 장이 묵상입니다. 귀한 시간이니 만큼 실천과 결과가 수월하면 좋을텐데, (적어도 제게 있어서) 묵상은 항상 힘이 듭니다. 벌써 십 여 년, 말씀묵상을 해왔으니 '묵상의 프로'가 될 만도 한데, 묵상에 들어가면 항상 처음 같습니다. 궁금하고 부끄럽고 부담스럽고...

 

그런데, 얼마 전 교회 남선교회에서 청계산 산행을 한 후에 말씀묵상이 힘들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조금은 알았습니다. 사용하지 않았던 근육들에 무리가 갔는지 근육통이 왔거든요..^^

 

묵상은 하나님으로 부터 기독교인다운 관점을 받아 그것을 실천하는 훈련에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 인것 같습니다. 그것은 마치 이전에는 제대로 사용해보지 못한 근육의 존재를 새삼스럽게 인식하고 그것을 단련할 필요를 느끼는 것과 같습니다. 즉, 사용하지 않던 영적근육을 묵상이라는 자극을 통해서 움직여야 하니까 힘이 들게 되는 거지요.

 

그런 의미에서 영적훈련은 육체훈련과 흡사한 부분이 많습니다. 고된 육체훈련을 하고 나면 삭신이 쑤시 듯, 영적인 훈련을 제대로 하고 나면 매우 힘이 듭니다. 하지만 산행 후의 육체적 고통이 상쾌함을 동반하듯, 영적훈련의 어려움은 우리의 삶에 깊고도 상쾌한 관점과 가치를 제시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묵상이 힘들어도 우리가 묵상을 포기할 수 없는 것 입니다.

 

자기 분야에서 최고인 국가대표 운동선수 조차도 훈련이 쉽다고 말하는 것을 본적이 없습니다. 훈련이 어렵다고 포기하면 선수가 아닌거죠. 크리스천의 영적훈련도 마찬가지로 어렵습니다. 어렵다고 포기하면 영적전쟁에서 패전병이 되겠지요.

 

묵상을 제대로 한다면 부담감이 생기고 힘들 수 밖에 없습니다. 힘들어도 그것을 통해서 내 자아가 죽고 주님의 관점이 산다면 우리가 그 과정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말씀 묵상.. 힘들어도 포기하지 맙시다^^

(유난히 말씀묵상이 잘 안되서 죄송스러운 2004년 4월 봄날 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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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철목사(1879-1944)

일사각오(一死覺悟)의 순교자 소양(蘇羊) 주기철목사는 산정현교회의 빛나는 보석과 같은 신앙의 선열이다. 특별히 일제의 탄압 속에서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신앙의 절개를 지키다 순교하다.
1879년 11월 25일 경남 웅천에서 태어났다. 정주 오산학교를 졸업한 후 연희 전문학교에 진학했으나 눈병으로 중퇴하고, 1926년 장로회 평양신학교를 졸업했다. 일제의 말기 궁성요배를 비롯하여, 국민시암송, 일본 신사참배 등을 정면으로 규탄 반대하다가 여러차례 투옥당했다.
1936년 7월 평양 산정현교회에 부임하였다. 산정현 교회 시무시 마지막 양심의 보루로 남았던 장로교마저 신사참배를 국민의례라고 가결하자 일사각오의 설교를 통하여 주님 앞에

"주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머리에 가시관, 두 손과 두 발이 쇠못에 찢어져 최후의 피 한방울까지 흘리셨읍니다. 주님, 나를 위하여 죽으셨거늘 내 어찌 죽음이 무서워 주님을 모르는 체 하오리까? 다만 일사각오(一死覺悟)만 있을 뿐입니다"

목사파면의 위협 속에도 굴하지 않고 강단을 지키다가 40년 7월 다섯번째 검속되어 황실불경죄, 치안유지법 위반 이란 죄목으로 10년 징역형을 선고 받은 후 평양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렸다. 끊임없는 고문과 형편없는 옥중 음식에 병이 들어 병감으로 옮겨진 후 1주일만에 그는

"내 영혼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붙들어 주시옵소서"

라는 마지막 기도를 남기고 1944년 4월 21일 수감돼 있었던 평양 형무소 병감에서 49세의 일기로 순교하였다. 국가에서는 1968년 7월 9일 애국 선열의 한사람으로 후대하여 동작동 국립묘지에 그의 유해를 안장시겼다.

 

소양 주기철 목사 약력


1897. 11. 25 경남 창원군 웅천면 북부리에서 부친 주현성 장로와 모친 조재선의 4남으로 출생
1906. 03. 웅천 개통학교 입학
1912. 웅천 개통학교 보통과 졸업
1913. 봄. 평북 정주 오산(중)학교 입학
1916. 03. 23 평북 정주 오산학교 졸업
1916. 봄. 서울 연희 전문학교 상과에 입학
1916. 여름. 안질로 연희전문학교 중퇴하고, 웅천으로 낙향
1917. 가을. 김해 안기영의 4녀 안갑수와 결혼함
1917. 웅천에서 교남학회 조직
1919. 웅천교회 집사 피택
1919. 04. 3.1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웅천 성내리 만세사건 행동책으로 참가하여 1개월간 경찰서에 구류
1919. 10. 25 장남 영진 출생
1922. 03. 평양 장로회 신학교 입학
1922. 11. 05 차남 영만 출생
1922. 겨울 경남 양산읍교회 전도사 시무함(1925년 9월까지)
1925. 01. 09 3남 영묵 출생
1925. 02. 22 평양 신학교 19회로 졸업함
1925. 겨울 목사안수 - 부산초량교회 시무(1926년 1월 위임목사)
1927. 11. 13 4남 영해 출생
1928. 제24회, 제25회 경남노회 부노회장 역임
1928. 3남 영묵 병사
1929. 경남노회에서 주목사 주도로 신사참배 반대결의
1930. 03. 05 장녀 영덕 출생
1930. 제28회 경남노회 부노회장 역임
1931. 07. 마산 문창교회 부임
1931. 경남노회 제31회 노회장으로 피선
1932. 03. 18 4남 광조 출생
1933. 05. 16 안갑수 사모 급서(당34세)
1934. 08. 부친 주현성장로 별세(향년81세)
  1935. 5. 금강산 은정리 장로회 목사 수양관에서 “예언자의 권위” 설교
1935. 가을 오정모 집사와 재혼
1935. 12. 평양장로회 신학교 사경회 마지막날 “일사각오” 설교
1936. 주목사 장모 안부인 별세(향년 74세)
1936. 07. 평양산정현교회 부임
1937. 09. 05 신축 산정현교회 입당예배
1938. 02. 평양신학교 장홍련사건으로 신축 산정현교회 헌당예배 직전 제1차로 검속당함
1938. 06. 이유택, 김화식 목사와 함께 묘향산에서 금식기도
1938. 06. 30 일본기독교회 의장 도미다만 목사 평양에 와 산정현교회에서 신사참배 계몽강연
강행하다가 주목사와 새벽 4시까지 토론 격전이 벌어짐
1938. 08. 제27회 장로회 총회 직전 제2차로 검속당한 후,
1938. 08. 의성 농우회 사건에연루되어 의성경찰서로 압송되어 7개월간 구금됨
1938. 09. 10 조선예수교 장로회 총회 신사참배 찬성결의
1939. 02. 04 의성경찰서에서 석방
1939. 02. 05 평양산정현교회에 돌아와 “5종목의 나의 기도” 설교
1939. 09. 평양산정현교회 담임목사직으로부터 해임시키고자 제3차 검속
1939. 12. 19 평양임시노회를 소집하여 주목사를 목사직에서 파면처분결의
1940. 03. 24 평양산정현교회당 완전 폐쇄하고 목사관 사택에서 가족을 추방함
1940. 04. 주목사가 가석방되어 육로리 셋집으로 돌아옴
1940. 여름 제4차 검속
1941. 8. 25 평양경찰서에서 평양형무소로 이감되어 2년 8개월간 유치당함
1944. 3. 31 4남 광조와 마지막 면회
1944. 4. 21 오후 4시 주목사와 오정모사모의 마지막 면회 후 밤9시 평양형무소 병감에서 순교
1944. 4. 25 평양 돌박산 기독교 공동묘지에 안장
1947. 1. 27 오정모 사모 유암으로 소천
1950. 9. 주목사 장남 주영진 전도사 평남 대동군 김제면 장현교회에서 시무하다가 공산당에 의하여 순교
1990. 12. 21 주목사 3남 주영해 장로(신성북교회) 소천
1997. 4. 20 주목사 복권 및 복적

남은 유족은 차남 주영만(미국 거주), 4남 주광조 장로(서울 영락교회), 손자는 소룡, 소원, 소현, 승중, 소웅, 현, 원 등 7명, 손녀는 소희, 미경, 미혜 등 3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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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사각오 (一死覺悟)

 

                            요한복음 11:16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동무에게 말하되 우리도 또한 가서 같이 죽자 하더라』


요한복음 11장 16절은 나사로의 부생장으로 읽게 되다. 예수님 전도의 시기는 점점 끝나게 되고 십자가는 차차 가까워 오는 때 마침 사랑하는 친구 베다니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 그 누이 마르다와 마리아는 예수에게 사람을 보내어 급히 오시어 병고쳐 주시기를 간구하였다. 이틀이나 지체하는 중 나사로는 그만 죽었다. 예루살렘에는 예수를 죽이려는 무리들이 기회를 노리고 있는 형세이다. 그러나 주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베다니를 향하여 한 걸음 두 걸음 올라가시었다. 그러므로 예수를 따라 위험한 곳에 전진하는 제자들은 위구(危懼)한 생각이 깊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때에 도마가 동무에게 이르되 우리들도 또한 가서 같이 죽자고 부르짖었나니 이는 솔직한 도마가 위험 직전에 일사를 각오하는 말이다.

비판의 사람 도마도 사선(死線)을 넘어선 이상 창검이 족히 두려울 바 없는지라 후일의 도마는 과연 피사와 인도에서 선교하다가 인도인의 창에 피를 뿌려 순교하므로 인도 교회의 터를 개척하였다. 그래서 7월 1일은 도마의 순교일이다. 오늘 우리에게도 도마와 같이 일사 각오가 있어야 한다.


1. 예수를 따라서의 일사각오


이제 위험한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예수를 따라가려면 생명을 아끼고는 따라갈 수 없다. 도마의 생각에 금번 행차에는 위기를 벗어난다 하더라도 수난의 최기(最嗜)는 멀지 않은 장래에 닥쳐올 것을 직감(直感)하였던 것이다. 예수를 버리고 사느냐? 예수를 따라 죽느냐? 예수를 버리고 사는 것은 정말 죽는 것이오 예수를 따라 죽는 것은 정말 사는 것이다.

그래서 솔직한 도마는 「우리도 또한 같이 죽자」고 일사를 각오한 것이다.

예수를 환영하던 한 때도 지금 지나가고 수난의 때는 박도하였나니 물러갈 자는 물러가고 따라갈 자는 일사를 각오하고 나서라.

『무릇 나에게 오는 자는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자기의 생명보다 나를 더 사랑하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고 또 누구든지 저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아니하면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26~27)

『그리스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들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신지라』(벧전2:21) 이 천지간 머리 둘 곳 없는 곤궁의 자취 사람들에게 쓸어버리우는 고독의 자취를 우리도 밟아야 하고 병자와 가난한 자를 위하여 수고하는 사람의 자취, 도처에 핍박하던 곤고의 자취를 우리도 따라 나가야 한다. 망하여가는 예루살렘 성 하에 눈물의 자취! 겟세마네 동산의 피땀의 자취! 우리도 일보 이보 눈물과 땀방울의 자취 걸어야 하고 골고다의 흘리신 피의 자취, 우리도 이 피자취에 엎디어 이몸을 십자가의 제단에 드려야 한다.

내 주의 지신 십자가 우리는 안 질까 십자가 각기 있으니 내게도 있도다. 성 도마의 일사 각오 인도 도상(印度途上)에 뿌리는 피! 오늘 우리에게도 예수를 따라 일사각오!


2. 남을 위하여의 일사각오


주님의 이번 베다니 행차는 한 사람 친구 나사로를 위한 모험이오, 마르다와 마리아의 간구에 응하여 수고하시는 것이니 남을 위한 모험이다. 이 예수를 따라가는 제자의 일행도 남을 위한 수고라 하겠다. 그러므로 『우리도 또한 가서 함께 죽자』는 도마의 결심은 남을 위한 일사각오다.

예수의 일생은 순전히 남을 위한 일생이니 이 세상에 탄강하심도 남을 위하심이오 십자가에 죽으심도 죄인을 위하심이었나니이 예수를 믿는 자의 행위도 또한 남을 위한 희생이라야 한다. 세상 사람은 남을 희생하여 자기의 이익을 도모하지만 예수교는 자기를 희생하여 남을 구원하는 것이다.

살신애인(殺身愛人) 그 얼마나 숭고한 정신이며 그 얼마나 거룩한 행위이냐! 감리교 제 일대 선교사 아펜셀라 목사는 조선 감리교의 기초석이오 배제와 이화학교의 아버지다. 이보다 저의 최후는 더욱 고귀하였나니 마지막 전도 여행에 수증기선으로 남행하다가 그 배는 불행히 파선하였다. 자기는 일등실(一等室) 손님으로 구조를 받아 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행자인 조선인 여학생을 건지려다가그만 죽어버렸다. 오! 이 얼마나 거룩한 죽음이냐! 남을 위하여, 일개 외국인 여학생을 위하여 만리 타국에 그 생명을 버리는 그 정신은 우리 조선 교회 역사상에 살아있고 그 영혼은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빛나리로다. 더구나 그 아들 그 딸도 조선을 위하여 선교를 계속하고 있지 아니한가?

흑노 해방을 위하여 일생을 바친 아브라함 링컨의 아름다운 일생, 아프리카 개척을 위하여 몸을 드린 선교사 리빙스톤의 장열한 일생! 이는 다 남을 위한 제물이다. 남양군도와 인도와 중국의 선교를 위하여 목숨을 버린자 백이요 천이다. 이들은 다 예수의 정신을 계승한 희생이다. 당년 나사로를 위하여 일사를 각오한 도마는 후일 억만의 인도인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었도다! 숭고할거나! 도마의 일사각오! 오늘 우리에게도 남을 위한 일사각오.


3. 부활 진리를 위하여 일사각오


주님 이번 베다니 행차는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기 위하여서의 모험이다. 주님이 베다니에 도착한 때는 벌써 나사로는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애곡의 베다니었나니 주님은 사랑하는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인생의 비극을 눈물뿌려 곡하시었다. 기도와 함께 『나사로야 나오라』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에 응하여 천지도 놀라는 듯 나사로는 부생하였다. 아! 부활! 할렐루야! 영광일세.

나사로의 부생은 이적중 최대의 이적일 뿐 아니라 부활의 최대 교리를 산 사실로 보여주는 이적이오 또한 장래에 예수의 부활을 알려주는 사실이다. 그래서 『너희들을 위하여 기뻐하는 것은 너희들로 하여금 믿게 함이라』(요11:15)고. 『이 말을 하옵는 것은 둘러선 사 람으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함이라』(요11:42)고 예고한 대로 나사로는 부활하였다. 이는 주님의 부활과 신자의 부활을 믿게 하는 큰 이적이다.

도마가 이번에 예수를 배종(陪從)하여 부활의 사실을 목도하게 되었으니 『우리도 또한 가서 같이 죽자』함은 미리 안 것은 아니나 부활의 목도할 수 있는 일사의 각오라 할 수 있다. 후일 도마는 예수의 부활을 확신하고 대오철저(大悟徹底)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라』고 증거하였다. 그런즉 도마는 나사로의 부생을 통하여 예수의 부활을 확신하는 동시에 신자의 부활을 확신하였다. 그래서 도마는 이 부활의 복음을 파사와 인도에 전하였다.

인류에게 유익을 주는 진리의 발명은 모두 희생의 결과 아닌 것이 없다. 아메리카 대륙이 인간의 복지되기까지 콜럼버스 이래허다한 항해자의 수고가 있었고 전기등이 우리 앞에 밝아지기까지에는 에디슨 같은 과학자들의 뇌고가 쌓였던 것이다. 陷之(함지) 死地面後生(사지면후생) 유사이생(有死而生) 죽음이 있는 뒤에 삶이 있다. 한신(韓信)의 배수진(背水陣)도 일사각오다. 일사각오 한 뒤에 승리가 있고 발명이 있고 살 길이 있다. 하물며 천래의 진리 부활의 진리라오. 내세를 부인하는 공산당 무리도 그 주의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늘 영생을 믿고 부활을 소망하는 신자들은 왜? 죽음을 두려워하느냐?

부활의 복음이 우리에게 이르기까지 피로써 전지 우전하여 나려오는것이다. 로마제국의 박해하에 오십만 성도의 피가 흐르고 참 복음을 위하여 로마교 법왕 악형하에 백만 신자의 피가 흘렀다. 바디칸 궁중에 봉쇄된 성경을 개방하여 만민의 성경이 되기 위하여는 위크리프의 백골이 불에 타지고 틴달의 몸이 재가 되지 않았는가? 신학생 여러분, 제군의 읽는 성경은 피의 기록! 피의 전달이다. 신학을 말하므로 제군의 사명이 다 되는 것인가. 피로써 전하여 온 부활의 복음을 우리 또한 피로 지키고 피로 전하시이다. 일사각오 도마는 부활의 복음을 위하여 인도도상에 피를 뿌리었소. 오! 오늘 우리에게도 부활의 복음을 위한 일사각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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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9:3-7
당신은 살아 있는 사람입니까?


(산 자는 참예할 수 있는 특권이 있습니다)

이산가족이 50년만에 그리던 혈육을 만나는 광경을 보고 세계가 울었습니다.
혈육은 강하고 뜨거운 것임을 생생하게 보여준 드라마와 같은 장면이 연출되었습니다. 안타까운 것은 50년만에 이루어지는 상봉을 불과 이틀 앞두고 별세하셔서 참예하지 못한 분도 있고, 꿈에도 그리던 얼굴을 만나겠다고 비행기를 타고 평양을 방문했지만 이미 돌아 가신 분을 만나지 못한 경우도 있습니다.

남한은 텔레비전이 이산가족확인에 큰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온 국민들에게 보급되어 있는 텔레비전을 통하여 북한에서 남한에 있는 가족을 찾는 자들의 명단이 발표되면서 상봉절차가 매끄럽게 진행되었습니다만 북한에서는 110세의 오마니가 살아계신다는 소식에 천만이산가족들의 부러움을 샀던 분이 상봉날짜 불과 사흘 전에 이미 40년전에 돌아가셨다는 것이 확인되어서 온국민들을 안타깝게 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번에 가족을 만난 이들은 세계를 눈물바다로 만들었는데 중요한 것은 살아있었기 때문에 참예할 수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앞으로도 남북이산가족 상봉은 계속될 것이라고 합니다만 이것은 살아 있는 자에게 주어지는 특권입니다.

남한을 방문한 사람들 중에는 혹 부모님을 만난 경우가 있습니다만 자식을 알아보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고, 북한을 방문한 사람 중에 의사자격으로 참여한 한 분 외는 부모님을 만난 경우가 없었습니다. 이 세대가 얼마나 빠르게 지나가고 있습니다. 시간은 우리가 붙들어 맬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세계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낫다고 하십니다.

여러분은 살아 있습니까? 세상만사는 아무리 좋은 것이 있다고 하여도 산 자만이 참예할 수 있고, 비록 하찮은 것이지만 죽은 자는 참예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이 만약 살아 있다고 한다면 산 자의 특권을 행사하십시오. 기독교 신앙은 산 자의 것입니다. 산자만이 참예할 수 있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산 자만이 죽을줄을압니다)

세상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남은 죽을줄 알면서 자기가 죽는줄은 모릅니다.
살아 있는 자는 죽을줄을 알아야 합니다. 죽을줄 모르는 사람은 그 인생을 참되게 살 수 없습니다.
죽는줄 아는자만이 죽음을 예비할 수 있습니다.

시편 116:15에서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고 하십니다.
왜 성도의 죽음을 귀중히 여기십니까? 그 이유가 시편 116:12-14에 말씀하십니다.
12)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
13)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14)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나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으리로다
15)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도다
성도는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은혜를 내가 무엇으로 보답하겠느냐는 마음으로 여호와의이름을 부르며 서원을 갚으며 하나님 앞에서의 삶에 있어서 최선을 다하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12:16이하에 예수께서 말씀하신 비유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한 해 농사를 열심히 지었습니다. 그 해에 곡식을 쌓아둘 곳이 부족할 정도로 소출이 풍성하였습니다.
그는 이것이 다 자기가 열심히 일한 대가라고 생각하며 곡간을 더 크게 지어서 곡식을 쌓고 말합니다.
"내 영혼아 곡간에 곡식이 풍성하니 이제 먹고 마시며 즐기자"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것을 보시고 들으시고 말씀하시기를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세상에 죽기로 각오
하면 못할 일이 없습니다. 주기철목사님은 일본형사들이 그렇게 회유하고 괴롭힐 때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살았습니다. 모든 사람이 무릎꿇었지만 그는 일사각오로 살아?ㅆ기 때문에 순교자가 된 것입니다.

죽은 자는 죽는 것을 모릅니다. 말 없이 누워 있습니다. 요즘 한 일 년 동안 가보지를 못했습니다만 지난 여름까지만해도 그저 일년에 몇 번 공동묘지를 가봅니다. 무슨 사연이 있어서가 아니라 공동묘지에 가면 인생을 생각할 수 있고 죽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높은 곳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면 수많은 묘에 누워있는 자들이 일어날 것같습니다. 그래서 이 많은 사람들이 우리 교인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심정으로 소리를 처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이제 우리 모두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그분을 위해 충성합시다. 할렐루야!!!'
아멘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막 일어나서 목사님 우리 목사님 할 것 같은데도 아멘하며 일어서는 자가 하나도 없습니다. 아하, 여기가 공동묘지구나는 생각이 들면 괜히 무서워서 걸음아 날살려라 하고 쫓아 내려오기도 합니다.

산 자의 특권은 자신의 죽음을 알고 예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스펄전목사님의 "지금 하십시오"라는 시가 있습니다.
할 일이 생각나거든 지금하십시오
오늘 하늘은 맑지만 내일은 구름이 보일는지 모릅니다.
,,,
불러야할 노래가 있다면 지금 부르십시오.
당신의 해가 저물면 노래 부르기엔 너무나 늦습니다.
당신의 노래를 지금 부르십시오.


(산 자만이 기뻐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많은 피조물 중에 웃을줄 아는 것은 인간 뿐입니다.
하나님은 인류에게 웃을 수 있는 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산 자만이 기뻐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7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너는 가서 기쁨으로 네 식물을 먹고 즐거운 마음으로 네 포도주를 마실지어다 이는 하나님이 너의 하는 일을 벌써 기쁘게 받으셨음이니라

세상을 사는데는 낙을 누리는 방법이 여러 가지입니다. 어떤이는 막가는 인생을 살면서 그것을 낙으로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 안에서 낙을 누리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말씀에 보면 두 가지 특징이 나타납니다.
하나는 각기 종류대로 창조하셨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모든 피조물을 그 종류대로 만드셨습니다. 짐승도 종류대로 수 많은 짐승을 만드셨습니다. 새도 그 종류도 수 많은 새를 만드셨고, 물고기도 그 종류대로 수 많은 물고기를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보실 때마다 좋았더라 고 하십니다.

사람을 창조하신 기사는 이 두가지 면에서 다른 피조물과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은 종류대로 창조하지 않았습니다. 단 한 사람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창조하시고는 심히 좋았더라고 하십니다.
이는 사람이 다른 피조물과는 다른 존재라는 것을 말합니다. 다른 피조물은 같은 과에서 혼합생명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다른 그 무엇과도 혼합인간이 나올 수 없습니다. 이는 그 종류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인류는 특별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지난 주일 저녁에 말씀드린대로 사람을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지으셨습니다. 사실 원문은 천사가 아니라 엘로힘 즉 하나님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우리가 어찌 인생을 그렇게 막 살 수 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람 속에서 낙을 누리는 즐거운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창립 칠주년을 맞이 하였습니다.
야곱은 라헬을 사랑하므로 칠 년을 수일처럼 여기며 봉사하였습니다. 야곱처럼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교회를 사랑하고 주님의 사업에 협력하고 봉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새천년 가을에 내가 살아 있음을 알고 주의 나라와 그 역사에 감사와 기쁨으로 참예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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