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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순교 유적지 탐방] 죽음으로 지킨 신앙… 한국교회 부흥 씨앗
[기타] 2003년 03월 14일 (금) 15:44
길을 떠나려면 늘 마음이 설렌다.그 설렘을 안고 길에 서면 문득 ‘이 길은 예전에 누가 걸었던 길일까’란 질문이 밀려든다.

한(恨). 길에서 ‘한’을 느끼는 건 질곡으로 가득했던 우리네 삶 때문일 게다. 옛길 옆으로 새 길을 넓게 뚫고 역사와 숨결을 담은 흙을 포장재로 덮어놨지만 그 길을 걸었던 수많은 이의 소리까지 막을 수는 없다.

군홧발 소리와 포성,말발굽 소리,민중의 아우성. 그 속에서 죽음으로 신앙을 지킨 이들의 외침도 작지 않은 크기로 들려온다. 이들의 외침은 곧 한을 숙연함으로 바꿔놓는다. 내 신앙을 되돌아보게 하고 새로운 각오를 다지게 만든다.

한국교회순교자기념사업회(02-766-6319) 이사들과 함께 최근 순교 유적지를 찾았다. 사무총장 이응삼 목사와 김철수 목사 등이 여정을 인도했다. 순교자기념사업회는 당일,1박2일,2박3일 일정으로 전국의 순교유적지를 찾아볼 수 있도록 성도들을 돕고 있다.

여정의 첫 시작은 전남 여천군 성산교회. 애양원 교회로 알려진 곳이다. 6?25때 공산군에게 목숨을 잃은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의 체취를 느낄 수 있다. 손목사는 1939년 36세의 젊은 나이로 애양원교회 2대 목사로 부임했다.

애양원은 1909년 광주 광혜원장 윌슨 선교사에 의해 시작됐다. 목포에서 활동하던 포사이드 의료 선교사가 광주로 가던 길에서 발견한 한센씨병 환자를 치료해줬던 것에 자극을 받았던 것. 그러다가 1925년 여천군으로 이전했다.

손목사는 이곳에서 한센병 환자들의 피고름을 입으로 직접 빨기도 하고 환자의 목을 끌어안고 기도하고 음식을 나누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했다. 그는 1948년 여순반란사건으로 두 아들을 잃었다. 손목사는 두 아들을 죽인 당사자를 양아들로 삼았다. 또 1만원의 감사헌금을 하기도 했다. 당시 손목사의 월급은 80원이었다. 사랑을 실천하던 손목사는 1950년 9월13일 퇴각하는 공산군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순교의 발자취를 찾는 걸음은 전남 영광군 염산면 야월교회와 염산교회로 이어졌다. 공산군에 의해 각각 65명과 77명의 성도들이 목숨을 잃었다. 야월교회의 경우 가족을 포함한 65명의 성도 전원이 순교했다. 야월교회는 1908년 유진 벨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교회. 6?25 직전 후방 교란을 목적으로 남파된 게릴라들은 염산면으로 침투했다. 인민재판 등으로 마을을 유린하려 했지만 기독교인들 때문에 번번이 실패했다. 공산 게릴라들은 성도들을 염전에 판 웅덩이에 묻어 죽였다. 예장통합 광주노회는 이들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1990년 11월 순교기념탑을 교회 뜰에 세웠다.

인근 염산교회도 같은 경우. 신앙을 지키려던 성도들을 공산군은 죽창으로 찔러 죽이거나 목에 돌을 매달아 수장시켰다. 칼로 목을 베기도 했다. 성도들은 물에 빠져 죽으면서도 “내 평생 소원 이것뿐 주의 일 하다가 …”라고 찬송을 부르며 죽어갔다.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H B 헐버트)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습니다.”(아펜젤러)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언더우드)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느니라.”(젠슨) “나에게 천의 생명이 주어진다 해도 그 모두를 한국에 바치리라.”(켄드릭)

복음을 전하기 위해 이 나라에 왔다가 이곳을 조국으로 삼은 이들의 목소리는 서울 합정동 서울외국인묘지공원에서 들을 수 있다. 공원에는 종교계 언론계 교육계에서 활동했던 외국인 인사 500여명이 묻혀 있다. 아펜젤러와 에비슨 선교사,대한매일신보의 토머스 베델, 조선 독립을 위해 투쟁했던 헐버트 박사 등 선교사 75명과 그 가족 36명도 함께 있다.

마지막 여정인 경기도 용인 한국기독교순교자기념관은 돌비 성구로 방문객을 맞이한다. 순교자기념관은 구한말 혼란기와 일제의 잔악한 탄압,냉전 이데올로기 속에서 신앙을 지킨 순교자 200여명의 사진과 유품이 전시돼 있다. 기념관 돌비에 적힌 주기철 목사의 일기 한 편이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

“주님을 위하여/오는 고난을 내가 피하였다가/이 다음 내 무슨 낯으로/주님을 대하오리까/주님을 위하여/이제 당하는 수옥(囚獄)을 내가 피하였다가/이 다음 주님이/‘너는 내 이름과 평안과 즐거움을 다 받아누리고 고난의 잔은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 /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랴/주님을 위하여/오는 십자가를 내가 지금 피하였다가/이 다음 주님이/‘너는 내가 준 유일한 유산인 고난의 십자가를 어찌하고 왔느냐’고 물으시면/나는 무슨 말로 대답하랴”

용인?여수·영광=전재우기자 jw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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