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華苑의 향연 - 이야기 장자 철학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유학도서
송항룡 지음 / 성균관대학교출판부 / 2003년 9월
평점 :
절판


남화원의 향연

 

책을 읽으며 참으로 어렵다 생각했다. 단어가 어려워서 혹은 문장이 어려워서 어려운 것이 아니라 단어는 쉽게 이해 되고 문장 역시 쉽게 이해되나,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알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어쩌면 저자가 쓴 의도만을 헤아리려고 했던 나의 잘못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글은 저자가 쓰는 것이지만 써 놓은 글은 저자의 것이 아니라 독자의 몫이다' 라고 서문에 밝혔듯 내가 읽고, 내 생각으로 만들어야 함에도 저자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끊임없이 그 의도만을 알아내려 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옛 중국의 구양수가 글 잘 짓는 법으로 언급했던 다독(多讀), 다작(多作), 다상량(多商量) 이 책 읽기에도 여실히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나로써는 '남화원의 향연' 이야 말로 '다상량' 이 정말 많이 필요한 책이 아닌가 싶다. 책을 읽고 또 읽어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그 때서야 참 의미를 조금씩 알아가게 되는 책인 것 같다.

 

이 책은 다섯개의 큰 주제 아래 장이 나뉘고 또 다시 그 아래 소주제로 이야기들이 얽혀 있다. 지은이 송항룡 선생님은 이 책을  '장자'를 읽으며 떠오르는 생각을 적은 것이라 서문에 밝혔다. 장자가 말한 한 줄의 구절에 대한 상황적 추리와 이야기의 재구성만 있을 뿐이다. 그 재구성된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바의 뜻을 알기 위해 씹고 또 씹어야 했다. 물론 그럼에도 의미 없이 지나가버리는 내용들도 있었다. '아 그냥 이러이러한 이야기가 있구나' 라고 넘어가지는 부분들. 반면에 '장자의 이야기와 맞닿아 정말 탁월하게 표현하였구나' 라며 감탄이 나오는 부분도 여럿 있었다. 아직 내 생각이 깊지 못하여 책 읽는 것이 어려웠으나 장자의 이야기를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 책이라는 것에 후한 점수를 주고 싶은 책이다.

 

가장 마음에 들었던 몇몇 장들을 추려 여기서 이야기해 볼까 한다.

 

사상가들에 대한 탁월한 묘사 - 시골장터의 약장수

 

'시골장터의 약장수' 에서 나오는 중국의 사상가들에 대한 묘사를 보고서 '아, 정말 탁월한 표현이구나' 라며 무릎을 쳤다. 장터에 나온 사상가들을 장사꾼으로 비유해 행동 거지를 묘사한 것이 그들의 사상을 쉽게 잘 표현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누가 사상가들을 이리 잘 표현 할 수 있으리. 장터에 물건을 파는 사람들에 중국 사상가들을 빗대어 표현한 것은 그들의 사상의 요점을 잘 짚어내줌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그들이 주장한 바에 대해 은근한 비꼼도 들어있었다. 도가 사상가들이 '無' 를 판다는 비유만큼 적절한 것은 없으리라 생각된다. 보이지 않는 그 실체를 표현하기란 얼마나 힘이 든가. '무無' 라 함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존재한다 존재하지 않는다고도 말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존재하지 않음이 아닌 실체 하지 않음, '무無'의 개념은 만질 수도 보여지지도 않기에 참으로 어려운 개념이다. 장자가 말한 '無爲' 라는 것이 아무 것도 하지 않음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반면 모든 것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보아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해석해도 되지 않을까? 아무튼 노자, 장자 등의 도가 사상의 핵심인 '無' 를 알기란 참으로 어려운 듯 싶다. 이 장에서는 중국 사상가들이 무엇을 주장하고 그들의 사상이 핵심이 무엇인지 아주 즐겁게 표현 해주고 있다.

 


인식론, 그것에 대한 대화 - 그들은 모두 동갑내기들

아마 인식론적인 측면에서의 접근을 가장 잘 표현하지 않았나 싶다. 장자의 이야기가 모두 옳다고도 볼 수 없으며 다른 사상가의 이야기가 모두 옳다고도 볼 수 없다. 하지만 장자의 사상을 가장 핵심적으로 짚은 부분이 아닌가 싶다. 우리가 무엇을 인식하며 타인이 무엇을 인식하는지에 대한 그 물음. 끊임없이 고찰했던 그 내용을 우화로 잘 풀어내고 있다. 역시나 한 번 읽기 보담은 여러번 읽어야 제 맛이 나는 이야기 같다. 내가 사물을 인식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이야기 할 수 없음이다.하루살이가 밤의 존재를 모른다고 해서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이야기 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루살이가 아닌 다른 동물들은 밤의 존재를 알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알지 못한다고 하여 그것이 없다고 아집을 피우진 않았는지 곰곰이 생각해본다. 내가 인식하고 있는 세계는 한계가 있음인데, 알지 못하는 많은 것들에 대해 단지 인식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 존재를 부정한 적은 없었는지..


이 생각도 맞고, 저 생각도 맞음이요. 허허 - 열어구는 그렇게 생각한 모양이더군

인터넷 상에서 '조삼모사'라는 만화가 유행 한 적 있다. 원숭이에게 아침에 3개를 주고 저녁에 4개를 준다고 했더니 펄쩍 뛰다가
아침에 4개를 주고 저녁에 3개를 준다니 기뻐했다는 이야기를 빗대어 우리 생활에서 일어날 수 있는 상황들을 재미있게 묘사한 만화였다. 결과적으로 같음인데, 단지 먼저 더 많이 준다고 기뻐한다는 이야기.. 흔히 '조삼모사'라는 사자성어는 어리석음을 일컬을 때 이야기 한다. 하지만 정말 그러한 것이 어리석은 것일까 라는 질문을 하게 만드는 이 장에선 수로 보자면 같다고 말할 수 있지만, 과연 동일한가 장자는 의문을 제기한다. 즉, 혜시는 동일성의 문제를 제기한다. 3+4였다가 4+3이 기분을 달리한다면 그들은 동일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는 이야기라고. 수의 동일성은 유지 될 수 없다고 이야기 한다. 이에 장자는 어떤 결론도 내릴 수 없다고 이야기 한다. 조삼모사를 말한 열자의 생각도 틀리지 않음을, 그리고 혜시의 생각도 틀리지 않음을 이야기 한다.



혜시와 장자의 즐거운 대화들

 

개인적으로 책 속에 혜시와 장자가 나눴던 이야기들이 재미있었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장자'를 읽은 후 지은이가 상황을 만들어낸 픽션이겠지만. 혜시의 명확한 결론과 장자의 그 무엇도 부정하지 않는 모호한 듯 한 그 문답들이 책을 덮고도 한 번 더 생각해 주게 했기 때문이다.

 

'내가 물고기가 아닌 것처럼 자네 또한 장주가 아닐세. 그렇지 않은가? 나는 결코 혜시일 수가 없으며 자네 또한 나 장주일 수는 없다는 것은 분명하네. 그렇다면 이러한 질문이 성립할 수가 있지. 자네는 내가 아닌데,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혜시라는 사람은 장주라는 사람이 아닌데 장주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지를 혜시가 어떻게 알 수 있겠나? 혜시가 장주가 아니요 장주가 혜시가 아닌 바에야 마찬가지로 자네와 나는 다른 차원의 세계에 놓여 있는 것일세. 그러니까 자네도 다른 차원의 세계를 넘나들고 있는 셈이군! 그러면 이제 더 말할 것도 없이 결론은 분명해졌네. 내가 장주 자네가 아니니까 자네의 마음을 알지 못하듯이 자네는 물고기가 아니니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네 그려.'

 

'다른 차원의 세계에 대해서는 '안다', '모른다'라는 것이 모두 간섭일세. 그러므로 그 어떤 것도 명확한 것이 아닐세.
그러나 그러는 가운데도 한가지 명확한 것이 있다면 나는 물고기의 즐거움을 안다고 생각하고 있고 자네는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는 두 사람의 대화, 곧 생각이라는 것이 있을 뿐일세.'


 

그들의 오고 가는 문답을 통해 장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이었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와닿은 것은 있으나, 이를 글로 표현하기란 참으로 힘든 듯 싶다. 앞서도 이야기 했지만, 보고 또 보면서 장자의 생각을 엿보는 것도 좋을 듯 싶다. 더불어 장자에 대해 알고자 이 책을 읽는다면, 조금은 부족한 면이 있으니, '장자' 를 읽고 또 그에 대해 조사를 깊이 한 후에 읽으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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