딕의 소설은 어디까지가 계산적이고 어디까지가 즉흥적인지 구별하기가 무척 어렵다. 거의 모든 부분에서, 순간순간 떠오르는 영감에 의존해서 쓴 게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강하긴 하다. 기본적인 인물 몇 명만 간단하게 설정한 뒤(직업이나 나이 정도) 그들의 관계나 인물들의 디테일한 부분은 써가면서 떠올린 것 같다.

무엇보다 조직되었다고 인식할 수 있는 소설의 구조 같은 게 거의 없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즉흥적으로 이야기를 이어나간 것 같다. 그럼에도 이야기의 아귀가 그럭저럭 잘 맞아떨어진다는 점은 쵸큼 신기하다.

소설의 제목 역시 그 소설의 이야기를 완전히 포섭하지 못한다. 굳이 유빅일 필요도 없고, 높은 성의 사내일 필요도 없으며 닥터 블러드머니일 필요도 없다. 이야기와 제목 사이에 큰 개연성을 못 느끼겠다. 하지만 딱히 그것보다 더 좋은 제목이 떠오르는 것도 아니다. 하나의 메인 스토리를 뽑아내기 어려운 만큼, 하나의 제목을 정하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인 것 같다.

그의 소설은 대체로로 디스토피아적인 배경에서 시작된다. 혹은 차츰 그런 상황으로 변해간다. 하지만 그런 환경 속에 사는 등장인물들의 결말은 결국 그럭저럭 해피하다. 딕이 삶을 대하는 태도랄까, 마음가짐 같은 걸 잘 보여주는 것 같다.

여러 부분에서 도스토예프스키적인 냄새가 많이 난다.



어쨌건,
이번에도 또 발췌.



12쪽
길 건너편에서 은근슬쩍 움직이던 미친놈은 검은 머리에 검은 눈, 그리고 밝은색 피부를 크고 시커먼 코트로 단단히 감싸고 있었다. 그가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주위를 힐끔거렸다. 스튜어트는 남자의 공허해 보이는 얼굴과 어딘가를 응시하는 눈, 그리고 입, 특히 입을 보았다. 남자는 입을 단단하게 오므리고 있었는데도 어딘가 모르게 축 늘어져 보였다. 마치 압박감과 긴장감이 이미 오래전에 이빨과 턱을 갈아서 없애버리기라도 한 듯이. 불행해 보이는 남자의 얼굴에는 여전히 긴장감이 남아 있었다 스튜어트는 고개를 돌렸다. / 원래 저런 건가? 그는 궁금했다. 미친다는 건 저런 건가? 저렇게 마음을 좀먹는 건가? 뭔가에 잡아먹힌 것 같잖아...

ㅡ 아니나 다를까, 이 소설에서도 미친다는 것에 대한 인식이 나타난다.




16쪽
편집증이로군. 스톡스틸 박사가 생각했다. 몇 가지 검사는 해야겠지만 말이야. 로르샤흐 검사(각주: Rorschach test. 스위스 정신의학자 H. 로르샤흐가 발표한 인격진단 검사. 투영법의 대표적인 방법임)는 꼭 해야겠군... 꽤 진행된 잠행성 정신분열증일 수도 있어. 평생 달고 사는 만성 질병이 막바지까지 온 건지도 모르겠군.

ㅡ 위키에 의하면 로르샤흐 검사는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 로르샤흐가 1921년에 개발한 성격검사 방법으로 좌우 대칭의 잉크 얼룩이 있는 열 장의 카드로 이루어져 있다. 형태가 뚜렷하지 않은 카드의 그림을 보여주면서 무엇처럼 보이는지, 무슨 생각이 나는지 등을 자유롭게 말하여 피험자의 성격을 테스트한다. 로르샤흐 테스트 라고도 불린다." (출처: 이곳)


34쪽
아니, 사실 그렇게 행복하지는 않았다. 그냥 평범하게, 무난한 정도로 행복했다. 보니는 아직 일주일에 한 번 - 예전엔 세 번이었지만 - 심리 분석을 받아 여러 측면에서 자기 자신을, 그러니까 자신의 무의식적인 충동이나 현실 상황을 다양하고 체계적으로 왜곡하는 증상 따위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6년에 걸친 심리 분석은 그녀에게 큰 도움이 됐다. 하지만 완전히 나은 건 아니었다. 사실 완전히 낫는다는 건 없었다. 그런 ‘병’은 삶 그 자체였고, 언제나 커지기만 하거나(아니면 현실 적응력이 늘어나거나) 심적으로 정체되기 마련이었다.





34쪽
현재 보니는 [서구의 몰락]을 독일어 원전으로 읽고 있었다. 이제 50쪽을 넘겼는데 읽을 만한 가치가 있었다. 보니가 아는 사람 중에 이 책을 읽은 사람이 어디 또 있으랴?

ㅡ 범우사 판은 1,2,3권이 나왔지만 이미 1,3권은 품절 상태다. 책세상 판은 "1918년 초판 제1권 머리말과 1922년 개정판 머리말, 제1권 서론 그리고 슈펭글러만의 독창적 인식이 담긴 세계사 연표를 함께 번역해 묶어"냈다고 한다.


36-37쪽
보니는 화면 속에서 기술자들이 로켓을 최종 검검하는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안정적으로 하는 걸 뭐라고 부르더라? 어쨌든 달결을 한 바구니에 담으면 안 되는 법이지...

ㅡ 이런 걸 뭐라고 하더라... (분산 투자? 응?)




81쪽
이제 예상대로 균형 감각의 왜곡이 청력에도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눈과 귀가 하나의 게슈탈트를 이루다니 아주 매혹적이었다. 처음에는 시력, 다음에는 균형, 그리고 이제는 소리가 일그러져 들렸다.

ㅡ 게슈탈트 이론은 "우리의 관심은 의미 없는 라인으로 보기보다는 뭔가 의미를 갖는 규칙이나 유사한 요소들을 그룹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다. 가까이 근접해 있는 것들을 밀접하게 연관시켜 보려는 이러한 성향을 게슈탈트 이론으로도 설명할 수 있다. 게슈탈트 심리학은 사물을 있는 그대의 형이나 형태로 지각하지 않고, 더욱 단순하고 더욱 규칙적이며 대칭적인 것으로 사물이 지각되는 방식에 대한 인간의 시지각에 대한 원리를 이론적으로 설명하고 있다"고 한다. (더 자세한 내용은 여기에서.)

ㅡ 게슈탈트란 "게슈탈트라는 말은 형태나 모양을 의미하는 독일어 명사에서 유래했습니다. 영상 인식의 게슈탈트 이론은 독일의 심리학자 막스베르트하이머(Max Wertheimer)가 1910년 여름 기차 여행을 하는 동안 영감을 얻어서 주장하게 되었는데, 그는 기차의 불투명한 벽과 창문 프레임이 부분적으로 자신의 시야를 가리고 있는데도 바깥 경치를 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눈이 단순하게 모든 영상 자극을 받아들이고 뇌는 이러한 감각을 일관된 이미지로 정리한 것으로 결론 내렸습니다. 게슈탈트 심리학자들은 베르트하이머에 의한 최초 연구를 더욱 심화 시켜서 영상 인식은 감각적 요소와 형태를 다양한 그룹으로 조직한 결과라고 결론지었"다고도 한다. (더 자세한 내용은 여기에서)




95쪽
어둠 속에서 하피는 계획을 짰다. 온갖 영감이 떠올랐다. (...) 계획이 어떻고 실행하면 정말 어떻게 될지 궁금해 참을 수가 없었다. 대부분은 생존과 관련이 있었다. 아무도 거대한 사회에 의존하지는 않을 터였다. 아인 랜드(각주: Ayn Rand(1905~1982). 러시아 태생의 미국 소설가이자 철학자)가 책에서 이야기했듯이 작은 마을과 개인 위주의 사회가 될 공산이 컸다.

ㅡ 러시아 태생이 미국 소설가가 나보코프 외에도 또 있다니, 혹시나 싶어 검색했더니 그의 책들이 꽤 많이 보였다. 하지만 대부분이 품절/절판 상태고 [마천루]와 [파운틴 헤드]만이 아직 판매되고 있어서 살펴보았더니 [마천루]와 [파운틴 헤드]는 번역된 제목만 다를 뿐 같은 책이었다... 외래어 표기법에 따라 작가의 이름도 아인 랜드에서 에인 랜드로 바뀐 건지 어떤 건지... 품절 상태인 [낭만주의 선언]도 한번 보고 싶다.
 

124쪽
“이 상황에서 섹스 생각이 나?” 스튜어트는 몰랐다. “빌어먹을. 폭탄이 떨어진 뒤로 한 번도 그런 충동을 느껴본 적이 없다. 무서워서 아예 사라진 것 같다고. 아예.”
“위험이 닥치면 간뇌가 성적 충동을 억제해서 그래.” 켄이 말했다. “하지만 곧 돌아올 거야.”

ㅡ 간뇌라... 그렇군...




131쪽
“위성 방송을 들어요?” 엘던이 흥분해 말했다. “우리는 라디오가 죽었어요. 수리공은 냉장고 부품을 찾으로 샌프란시스코 남쪽 어딘가로 갔고요. 앞으로 한 달은 안 돌아올 거예요. 요새는 뭘 읽어주고 있어요? 마지막으로 들은 게 정말 오래전인데, 그때 파스칼의 [시골사람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고 있었어요.”
“데인저필드는 지금 [인간의 굴레]를 읽고 있어요.”

ㅡ 데인저필드는 대참사가 있던 날 화성으로 떠났다가 "지구 궤도를 벗어나지 못한 채 지구 주위를 공전하며 지상의 사람들에게 음악을 들려주고 책도 읽어주는 DJ로 확약하"(372쪽)는 인물이다. 파스칼의 [시골사람에게 보내는 편지]는 [화성의 타임슬립]에서도 언급됐었는데 이번 책에서도 다시 나왔다. 아무래도 필립 K. 딕이 즐겨 읽었던 책이 아닌가 싶다. 서머싯 몸의 [인간의 굴레]는 발췌해둔 131쪽만 아니라 소설 곳곳에 걸쳐 여러 번 나온다. 딕은 어쩌면 [닥터 블러드머니]를 쓸 즈음하여, 혹은 쓰는 동안, [인간의 굴레]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두 소설 사이에 유사성을 찾을 수도 있을 것 같고.




143쪽
그냥 유문판幽門瓣 경련인 것 같군. 페노바르비탈(각주: 최면, 진정, 항경련 작용이 있는 바르비투르산 유도체)이 있으면 좋겠는데, 몇 년 전에 다 써버렸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심각한 자살 충동을 겪던 아내가 전부 써버렸던 것이다.

ㅡ [알기 쉬운 의학용어 풀이집]에 의하면 페노바르비탈이란 "수면제의 일종. 과잉 복용시 호흡을 억제시켜 생명에 지장을 가져온다. 장기간 복용시 내성이 증가하기도 함. 수면제외에 전신마취시에, 호흡마취 이전에 빠른 마취유도와 환자의 마취에 따른 고통을 감소하기 위한 정맥마취제로 이용한다. 또한, 이 약은 독성작용빈도가 적고, 값이 싸므로 장기간의 치료를 필요로 하는 간질치료제로도 널리 이용된다"고 한다.

ㅡ 기억이 정확하지는 않지만 페노바르비탈은 지금까지 본 딕의 책에서 자주 나온 것 같다. 작가가 실제로 즐겨(?) 먹었던 약품이 아닐까. [유빅]이나 [높은 성의 사내]에선 출처를 찾기 어렵지만 [화성의 타임슬립]에선 시작하자마자 등장한다. (“페노바르비탈을 먹고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실비아 볼렌은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9쪽)) 근데 이 약품에 대한 각주는 [닥터 블러드머니]에서 처음 본 것 같다.



154쪽
톨만 부인은 쌓아놓은 책 더미를 살펴보고 있었다. “칼 융의 [심리유형론]이 있네요. 심리학도 잘 아는 분야인가요? 좋네요. 먹을 수 있는 버섯 찾는 방법을 가르칠 수 있는 동시에 프로이트와 융에 대해 잘 아는 선생님이라니.”

ㅡ 책 말미에 있는 “작가 연보”에 의하면 실제로 딕은 버클리 고등학교에 입학한 뒤 “독일어를 배우고 칼 구스타프 융의 저서를 읽기 시작했다”고 나온다. 소설에서 번역된 [심리유형론]이 어떤 책인지는 모르겠고, 우선 집에 있는 융 자서전부터 읽어봤으면 좋겠네.


201쪽
보니가 누군가와 바람을 피워 비정상적인 아이를 낳은 일을 가지고 스스로 비난하고 죄책감을 느낀다면 그 결과는 에디에게 돌아갈 거야. 보니는 에디를 미워하고 에디에게 모두 풀어버리겠지. 언제나 그런 식이야. 아이는 부모가 과거에 저지른 일에 대한 비난의 대상이지.


203쪽
“나한테도 그 소릴 해요.” 조지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보니는 인류가 일만 하다 사라지는 쇠똥구리라고 보거든요. 당연히 자기는 빼고요.”


246쪽
“고마워요.” 앤드류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어쩌면 세상은 과거의 것들을 다시 되살려가기 시작하는 건지도 몰랐다. 예의와 관습, 몰입 등 세상을 진정으로 아름답게 만들어주던 형식을. 스튜어트 맥콘치가 하는 이런 말, 이런 게 진짜야. 앤드류는 생각했다. 단순한 흉내가 아니라 살아남은 자야. 이 사람은 어떻게 해서인지 그 모든 일을 벌어지는 동안에도 과거의 세계관과 열정을 보존해냈어. 여전히 계획을 짜고 궁리하고 허풍을 치고 있지. 아무것도 그를 막을 수 없을 거야.

ㅡ 처음엔 딕이 진짜와 가짜에 대한 혹은 진실과 거짓에 대한 인식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차음 그가 진짜와 가짜에 대한 구별, 또는 사실과 환상에 대한 구별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이건 가짜가 분명해. 속임수야. 진짜가 아니야”(278쪽) 같은 구절을 보면. 어쩌면 딕은 무엇이 진짜고 무엇이 가짜인지 헷갈렸던 게 아닐까.


254쪽
에디가 말했다. “죽는다는 건 어떤 거야? 나도 언젠간 죽을 거니까 알고 싶어.”
“그건 좀 웃긴 거야. 구멍에 빠져서 위를 올려다보는 거야. 그리고 약간 맥이 빠진 듯한 건데, 음, 그러니까 텅 빈 것처럼 말이야. 뭔지 알겠어? 그랬다가 잠시 후에 다시 돌아오는 거야. 날아가버렸다가 날아가버린 곳으로 다시 돌아오는 거라고! 이거,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네가 지금 있는 곳으로 돌아온다는 거야. 그것도 빵빵하고 살아 있는 채로.”

ㅡ 단순한 상상일까. 어쩌면 유사하게나마 실제로 경험했을 일일지도...


266쪽
“미치겠네.” 반즈가 말했다. “이 사람은 당신이 무슨 얘길 하는지 몰라요. 정신이 이상하다고요.” 반즈는 스톡스틸 박사에게 말했다. “의사 선생님. 사람이 문화나 가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면 정신분열증 아닌가요? 이 사람이 그래요. 들어보시라니까요.”

ㅡ 그렇군...


267쪽
뒤에서 블루스겔드가 중얼거렸다. “똑같은 사람이 분명하다고요, 스톡스틸 선생. 왜냐하면 내가 길에서 그놈과 마주쳤을 때, 그때 난 사료 가게에서 사료를 사고 있었는데, 녀석이 이상한 표정으로 날 보더라고. 마치 놀리는 것처럼. 그런데 녀석이 알아챈 거요. 나를 놀리면 내가 다시 그런 일이 벌어지게 할 수 있다는 걸. 이번에는 녀석이 겁먹었지. 예전에 한 번 봤으니까 아는 거요. 그건 사실 아니오, 스톡스틸 선생? 지금도 녀석은 알거요. 내 말이 맞지요?”

ㅡ 강박 증상이 있는 사람의 모습을 잘 보여준 것 같다. 


268쪽
차라리 그날 다 같이 죽는 게 나았을지도 몰라. 보니는 생각했다. 그러면 병신이나 기형아나 방사능 검둥이나 돌연변이로 지능이 높아진 동물을 보지 않을 수 있었을 테니까. 전쟁을 시작만 해놓고 끝장을 안 봤어. 난 지쳤고 이제 쉬고 싶어.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 어디든 가서 눞고 싶어. 어둡고 아무도 말하지 않는 곳으로 가서 영원히. / 그러자 좀 더 현실적인 생각이 떠올랐다. 어쩌면 이 문제는 모두 내가 아직 알맞은 남자를 못 찾았기 때문에 생긴 건지도 몰라. 그러면 아직 안 늦었어. 난 아직 젊고 뚱뚱하지도 않잖아. 그리고 다들 내 치아 상태가 좋다고 말하지. 아직 할 수 있어. 계속 살펴봐야 해.

ㅡ 이 부분 역시, 등장인물의 ‘남자 집착증(?)’이 어떤 식으로 합리화되는지 잘 보여준다.

 
272쪽
블루스겔드는 팔짱을 끼고 눈을 감은 채 앉아서 힘을 모으는 일에 집중했다. 힘이여 자라라. 그가 중얼거렸다. 세계 어디서든 내 명령을 들어라. 과거에 그랬듯이 모두 힘을 합쳐 강력해져라. 그대들 모두에게 고한다. / 그러나 라디오 스피커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정신을 산만하게 해서 집중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잠깐. 블루스겔드는 생각했다. 난 방해받으면 안 돼. 계획이 어긋난다고. 누가 이렇게 떠드는 거지? 전부 이자의 말을 듣고 있어. 이자로부터 지시를 받는 건가?

ㅡ 하피의 초능력 때문에, 처음엔 블루스겔드 역시 초능력을 가졌고 그로 인해 재앙이 닥쳤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구절에 와서야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브루스겔드는 자신이 예전에 행했던 실험의 실패로 인한 죄책감이 빚어낸 정신 질환, 즉 “전지전능하다는 강박적 환각”(275쪽)에 휩싸여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소설 뒤로 갈수록 이 사실 또한 아리송하게 된다. 특히 “데인저필드는 특유의 웃음소리를 내며 창문을 통해 기이한 폭발을 계속 지켜보았다. 더 먼 곳에서 희미하게 폭발 하나가 보였다.”(283쪽) 같은 구절. 그러니까 블루스겔드는 정말 초능력을 가진 사람일 수도 있고, 단순히 정신질환자일 수도 있는 것이다.




282쪽
데인저필드는 자기 자신을 위해 바흐의 B단조 미사곡을 틀었다. 웅장한 합창 소리가 위성 안을 채우며 모든 것을 잊게 해주었다. 몸속의 고통, 창밖으로 보이는 흐릿하고 오래된 폭발. 이 모두가 마음속에서 사라졌다.



ㅡ 책 말미의 “작가 연보”를 보면 10대 시절 딕은 “고전 음악과 오페라에 열중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실제로 음악에 대한 얘기는 딕의 소설들에서 꾸준히 나왔던 것 같다. “그러는 동안 음악을 좀 들어볼까요. 정통 밴조(각주: 미국의 민속 음악이나 재즈에 쓰이는 현악기. 기타와 비슷하나 공명동이 작은북처럼 생겼으며 현은 4~5줄이다) 연주 어때요? 과거 미국의 정통 포크 뮤직... ‘페니의 농장에서’. 위대한 포크 음악가인 피트 시거가 부릅니다”(335쪽) 같은 대목도 나온다.


318쪽
스톡스틸 박사가 곧바로 마이크에 대호 말했다. “좋아요. 데인저필드 씨. 당신이 겪고 있다는 통증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데요. 저기, 위성에 종이봉투가 있습니까? 탄산가스요법을 시도해보려고요. 우리 함께요. 종이봉투를 들고 그 안에 숨을 내쉬세요. 그 안에다 숨을 내쉬고 들이쉬기를 계속하세요. 그러면 마지막엔 순수한 탄산가스를 들이마시게 될 겁니다. 이해하시겠죠? 사소해 보이지만 합당한 근거가 있는 요법이에요. 아시다시피 산수가 너무 많으면 간뇌의 특정 반응을 유발해 자율신경계에 나쁜 순환을 일으킵니다. 자율신경계가 너무 활성화되어서 나타나는 증상 중 하나가 연동항진인데요, 그것 때문에 통증이 오는 걸지도 모릅니다. 기본적으로 그건 근심 걱정 때문에 오는 증상입니다.”


319쪽
“폐소공포증은 공간 감각의 혼란이라는 점에서 직접적으로 간뇌와 연관된 공포증이에요. 실제 위험이나 상상의 위험 때문에 공황 상태에 빠지는 것과 관련이 있어요. 도망치고 싶은 욕구에 대한 억압인 겁니다.”


323쪽
“난 담배 안 피워요.” 하피가 담배를 훑어보며 말했다. 하피는 그 귀한 담배를 한 움큼 집어 들어 뭉갰다. 가루가 떨어졌다. “담배는 암을 유발하죠.”
“음.” 앤드류가 말했다. “양면성이란 게 있긴 한데. 그게...”

ㅡ 하지만 그 양면성이란 건 흡연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그런 양면성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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