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피용 (반양장)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뫼비우스 그림 / 열린책들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세상의 눈과 귀가 된 미디어 자극적인 소재만을 쫓아가는 사이,
우리들의 사는 세상엔 전쟁, 살인, 강간, 빈곤 등
인간 내부의 잔인함만을 확인할 수 있는 각종 인간성 상실의 현실에 봉착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과연 '인간답게' 살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자연스러운 고민에 빠질 수 밖에 없다.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오랜만에 들고 나온 그의 소설 [파피용]에서 주인공들이 선택한 인류 희망의 쟁취 방식은 바로 '탈출'이다.

과학자 이브가 발명한 빛으로 가는 우주선 모형, 그가 발견한 20조 킬로미터 너머 인간이 살만한 환경의 행성으로 이 모든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에게 인류의 마지막 희망은 이 몰락해가는 지구를 떠나는 것이다.
뜻을 함께 하는 재벌 맥 나마라, 항해사 엘리자베트, 기획및 관리자 사틴, 환경 및 심리 전문가 아드리앵 등은
20조 킬로미터 떨어진 행성까지 14만4천여명을 태우고 1000년에 걸쳐 항해할 우주선을 만들어 마지막 희망의 전달을 시작한다.
우주선 안엔 중력과 인공태양을 만들어지고 노아의 방주마냥 동물, 식물 등 모든 필요한 생물체와 냉동 수정란이 담겨졌다.
 
처음엔 좋았다.
그들은 이미 각종 폭력을 일으킬 수 있는 소지가 있다고 판단한 정치가, 공권력, 종교인, 군인 등을 배제시켰고
농부, 요리사, 대장장이, 건축가, 장인, 예술가 등 공동체를 유지하기 위한 전문가들을 선발한 상태였다.
그들은 자연 친화적 소재로 원하는 곳에 집을 지었고, 협동노동을 하였고 그렇게 행복한 듯 했다. 사람이 죽으면 흙에 묻히고 그 위에 나무를 심어졌다.
그러나 불현듯 발생한 첫 살인 사건을 시작으로 파피용호는 인류가 몇천, 몇만년을 걸쳐 겪었던
공권력과 왕으로 상징되는 권력의 창출, 비노동, 환경의 생존을 위한 반란, 전쟁 등을 겪게 된다.
 
그리고 결국 1000년이 조금 넘어 행성에 도착할 즈음엔 단 6명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중 행성에 착륙할 수 있었던 건 단 2명.
또 수정란으로 부화시킨 뱀에 물려 1명 사망.
 
혼자 남은 아드리앵은 인류의 마지막 희망을 잇지 못했다는 좌절과 외로움의 세월을 보내다가 문득 수정란 중 인간도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수정 시 필요한 골수를 얻기 위해 자신의 갈비뼈를 부러뜨리고 수정란을 부화시킨다.
그렇게 태어난 에야에게 아드리앵은 자신도 잘 모르는 선대의 역사를 끊임없이 이야기해준다.
그러나 에야는 난청 끼가 있는 지라
아드리앵을 '아담'이라 부르고,
우주선 만들었던 '이브'라는 이름을 자신에게 부여한다.
그리고 오래전 소형 우주선으로 탈출했던 사틴을 '사탄'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것이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생각해낸 인류 생존에 대한 단 한가지 놀라운 추측이다.
 
이것은 우주의 의지일지는 모르나
이대로라면 인간은 영원히 진보를 모르고 쳇바퀴만 돌리고 있는 다람쥐일 뿐이다.
 
그야말로 인류가 함께 행복하게 살고 싶은 사람이라면
인간에게 내재된 폭력성과 권력욕, 소유욕에 대해 거대한 두려움을 품게 된다.
우리는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는 지도 모른다.
모든 인류가 함께 행복하게 살기 위한 비결은 개미와 같은 공동체 사회의 구현일 것이라고...
그러나 행복의 기준같은 거, 사람마다 다른 게 당연하지 않을까?
쥐와 같이 각개격파의 이기주의만이 행복이라 느끼는 사람들도 있을 지 모른다.
희한한 건 쥐나 개미 양쪽 집단 모두 같은 비율의 높은 생존률을 유지할 수 있다.
 
그래서 베르베르는 질문하고 있다.
개미처럼 살건지 쥐처럼 살건지...
물론 개미처럼 살거라고 말하길 바라면서...
 
그러면서 살포시 마지막 주문과 같은 말을 내뱉는다.
'영원히 탈출을 계속할 수는 없다'
물론 이것이 베르베르의 마지막 외침이기는 하나
과연 가능한 것인지는 우리의 가슴 속에 대고 물어야 할 일이다.
 
* 사족 - 이번 소설은 베르베르의 이전 작품에 비해 극히 소품적 성격의 글이다.
그래서 실망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나 역시도 살짝 실망이다.
1000년의 역사를 [개미]만큼 풀었어도 좋았을 법 한데,
더이상 글 쓰기 싫었는지 몇 페이지로 순식간에 정리를 해버렸다.
담긴 아이디어는 참신하나 상당히 아쉬운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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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설렘
김영하의 여행자 하이델베르크 김영하 여행자 1
김영하 지음 / 아트북스 / 2007년 6월
평점 :
절판


어느날 라디오를 듣다가 작가 김영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모름지기 글쟁이는 글로 말하는 법.
그러나 그는 동료들도 인정하는 대단한 수다쟁이같다.
실제로 라디오 속 그는 나이 40이 넘었지만
마치 10대의 감성을 가진 50대 아줌마처럼 떠들고 있었다.
언젠가 미니 콘서트장에서 본 김수철이 생각났다.
이런 사람들에게 매력을 느끼는 건
어쩔 수 없이 세상이 원하는 대로 점잖빼고 살고 있어 속의 끓는 피를 어찌 다스려야 할지 골머리 썩히는 겉만 어른된 자들의 특권이다.
언제나 구름위를 걷는 듯한 그들이야말로 '차분'의 진정한 깊이를 알고 있을 지도...
 
김영하의 [여행자]는 모두 8편이 나올 예정이라는 데, 그 첫번째 여행지는 바로 하이델베르크다.
위에서 적은 바와 같이 이 책은 단편소설에 여행기, 사진, 카메라 리뷰 등이 모두 들어있다.
그러나 그는 글쟁이이다. 그것도 책을 아주 많이 읽은 글쟁이.
그가 흡수한 글만큼이나 이 책은 그 모든 것이 나름의 감성의 지도를 따로 질서정연하게 순서대로 배치되어 있다.
무언가 쓸데없는 복합과 모순에 빠질 틈조차 주지 않게 만든 깔끔한 책이다.
사실 이 점은 가장 좋은 점이긴 하지만 다소 아쉬운 점이기도 하다.
왠지 '소설을 읽는 듯 했는데, 어느새 자기 여행기가 되더니 짧은 사진집이 되었다가 소설로 돌아왔다가...' 뭐 이런 보기좋은 환타지를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사진에 중점이 가있는듯한데 소설이 더 궁금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어떻든 재미있고 좋고 쉬운 책이다.
음악을 들으며 읽다보면, 누구나 쉽게 '차분', '관조', '평온'이 일관되게 느껴진다.
나도 어딘가 여행을 다녀오면 이렇게 테마를 가지고 한권씩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는 하이델베르크에서 '죽음'을 생각한 것 같다.
'죽음을 생각하기 좋은 도시', 그가 본 하이델베르크다.
그 죽음은 따사로운 햇빛이 비치는 야외 카페에 조용히 앉아 책 한권을 읽고 있는 것만큼 차분하고 고요해보인다.
죽음을 생각하기에 삶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지도 모른다고 착각할지도 모를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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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22 22: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버자이너 문화사 - 교양과 문화로 읽는 여성 성기의 모든 것
옐토 드렌스 지음, 김명남 옮김 / 동아시아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1. 이 책은 여성 성기에 대한 의학, 해부학 뿐 아니라 문학, 인류학, 사회학 등 다양한 내용 사이를 오고가는 일종의 백과사전 같다.
하지만 백과사전이라 단정하기엔 30% 이상 모자라다.
 
'성기에 대해 궁금해'라는 생각만으로 덥석 집었다면
'버자이너'에 집중한 나머지 '문화사'임을 잠시 잊은 꼴이 된다.
수많은 정보를 주지만 정답을 주는 건 아니다.
(인류학적 접근 시도가 있다는 점을 5% 정도 상기하시길...)
 
물론 작자의 성과학자로서의 자기 입장이라는 게 언뜻 언뜻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대체로 입장을 굳이 표명하지 않아도 될만한,
여성 성기에 대한 세상의 황당한 취급이 워낙 많아서 기술만으로도 충분히 화자에게 입장을 표명할 수 있는 내용이 상당하다.
실제로 한참 읽다보면 '정말?'이라는 놀라움, '그렇구나'라는 인정과 신뢰, '뷁!'이라는 황당과 불신 사이를 분단위로 오고가게 된다.
 
이렇게 많은 이야기들과 관심에도 불구하고
왜곡된 시선과 가치의 각하 또는 외면을 통해
21세기가 된 지금에도 '이거다'싶은 연구가 절대 부족하다는 점은 참 놀라운 일이다.
 
인간 취급받지 못하는 여성들이 여신에서 창녀라는 극과 극을 오가는 동안,
그녀들의 성기 역시 그 틀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했다.
특히 성기는 이놈의 사회에서 여성을 창녀에 가까이 가게 하였므로
뭔가 적당한 조치를 취해야 하는 신체기관으로써 그 고초는 더욱 심했다할 수 있겠다.

2. 사회가 개인에게 보여주는 도덕적 강압의 힘은 놀랍다.
아마도 그 모든 강압엔 여성을 도구로 사고하다보니 초래된 것이 태반일 것이다.
 
여성은 문란하면 안된다. 여성은 해주는 대로 받는 존재이다.
<- 물론 이런 생각은 남성에게 속한 자손 생산을 위한 자산으로써, 직계 혈통이라는 확증을 위해 역으로 한 남성의 손만 닿는 조건을 마련하려다보니 이러저러한 가학적 행위가 용인된다는 기분이다.
 
 -> 여성의 성기는 더러운 것이다 : 이로 인해 겪게 되는 여성의 가장 큰 수난 중 하나는 클리토리스 절제일 것이다.
절제받다가 저세상으로 보내진 여자자매들이 수두룩한데도
하지 않은 아이는 집단사회에서 불결한 아이로 취급받고 왕따당한다.
그것도 음부봉쇄라는 형태로 이루어지기도 하는 데, 클리토리스를 몽땅 드러낸 후 외음부의 살을 끌어당겨 꿰매버린다. 윽~~
이 봉쇄조치는 첫날밤 남편의 성기에 의해 뚫리는데, 그날의 유혈낭자는 병원행을 수반할 수 밖에 없다. 윽윽~~~
 
여성이 먼저 원하는 경우도 있다.
질 삽입 성교야말로 정상 상태이기 때문에 클리토리스로 인해 오르가슴을 느끼거나 하는 건 반칙, 이런 사회에서 자신의 비상식적인 성욕을 없애기 위해 클리토리스 절제 수술을 받는 사람도 있었다. 프로이트 아저씨가 여러 여자 잡았다!
일반적으로 클리토리스가 가장 자극적인 곳이라는 데 이견이 없는데도,
그 수많은 세월동안 여성이 속고 서로 속이게끔 만드는 거대한 사회 시스템이 존재한 셈이다.
 
-> 정절을 지켜라 : 이말은 주로 '처녀막을 지켜라'의 의미가 된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도 처녀막 파열에 대한 공포는 상당히 많은 여성들이 느끼고 있을 것이다. 대부분 남자들이 '첫남자'이길 바라니까..
뭐 요즘은 연애 한두번 안하면 백치같으니까 '네가 두번째야'까지는 용납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래도 끝까지 처녀막 사수하고자 하는 여성에게 미국 소녀들의 샛길 하나 알려주자면...
의외로 유럽보다 미국은 정절에 대한 보수적 입장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네덜란드는 사회적 분위기상 처음 성경험을 16세 전후로 바라보는 반면 미국은 19세 전후로 바라보다보니,
그 이전에 성경험을 원하는 미국의 여자아이들은 항문성교를 주로 이용하게 된다(고 연구결과가 나왔다).
어떻든 처녀막만 사수하면 되니까..
섹스 = 질 삽입성교, 첫 섹스 = 처녀막 파열로 대치시켜버린 사회의 통념이 빚어낸 결과다.
성교를 성교로 바라보지 못하고
왜 항문성교를 샛길로 만들고 왜곡된 길인양, 우회로를 찾은 양 행동하게 만드는 지 알 수 가 없지만,
어쩌면... 어쩌면... 다른 씨만 안뿌리면 되니 항문성교 정도는 얘기되어지는 '첫경험' 전에 꽤나 널리 함묵적으로 용인받을 수 있을 지도..ㅋㅋ
 
3. 이 책엔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올 법한 이야기도 몇가지 눈에 띈다.
이를 테면 질이 짧아 결과적으로 질 입구가 막혀있는 관계로 주로 구강성교를 하던 한 여성이 새로운 애인과 섹스 중 들이닥친 기존 애인의 칼에 맞아 쓰러진다.
곧장 병원에 가보니 그녀는 임신 상태였다고 한다.
실제 논리적으로 정자는 인간의 간이든 위든 허파든 뇌든 어디든 갈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굳이 위의 사례가 아니더라도 질을 통해 들어온 정자가 자궁까지 찾아가 나팔관 근처에서 착상하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인체의 항해술로 여겨진다고 한다.
 
호르몬의 다양한 작동 속에 생각외로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몸에 양성을 가지고 있거나, 시기에 따라서 성이 변할 수도 있다거나 하는 사례들은 이미 심심찮게 알려지는 사실이다.
그러고보니 자궁속 태아의 성기가 초기엔 모두 여성의 성기 모양이다가 점차 남성은 남성의 성기 모양으로 변한다는 것은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된 사실이다.
어쩌면 여성과 남성의 신체적 구분은 대체로 가능할 지 모르지만 확정할 수는 없을지도... 사실 과학이란 건, 특히 의학, 생물학은 일종의 확률같은 것이니까...
 
4. 모르던 유래들도 몇가지 건질 지 모른다.
간혹 월경 중엔 일을 하지 않고 집안에만 갇혀지내거나
심지어 금식에 산속에서 사람을 만나지 말고 지내야 하는 사람들도 있다.
월경중 여성이 있으면 우유가 쉬고 마요네즈가 굳고 절인 고기도 상하고 식초로 절여도 뭐든 상한단다. 월경의 파괴력은 이다지도 엄청났단 말인가?
 
뭐 현재 내가 사는 사회에서 월경 내내 일 안할 수 있도록 허용된다면 '땡 잡았다'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실제 바빌론에선 달의 여신의 월경일엔 안식일을 가졌고,
매달 1번이던 것이 세월이 지나면서 매주 1번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매주 월경을 하는 달의 여신 덕분으로
기독교식 안식일 즉 일요일엔 쉬게 되었는 지도 모른다.
 
5. 한때 히스테리가 있는 여성들의 처방으로 난소 제거수술이 적극 권장되기도 하고,
음모를 똥 무더기에 놓고 햇빛을 쬐면 뱀이 된다고 믿었던 시절도 있었고,
여전히 많은 여성들이 느끼지도 않은 오르가슴을 꾸미고 살지만,
 
인생의 한두번쯤은 자기가 직접 자신의 성기를 살펴보기도 하고,
집단 상담치료에 참가하기도 하고,
남성이 아닌 여성이 바이브레이터의 소비 주체가 되면서 이전에 없었던 질문과 환불요구로 인해 기능의 향상이 이루어지기도 하고,
무책임한 외과적 칼부림의 정체에 대해 인식하거나,
지뢰밭같은 이 사회 성 담론의 세상에서 여성으로서, 또는 그저 한 인간으로서 답답함을 뚫고 행복감을 만끽할 수 있도록 고민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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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뜬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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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주제 사라마구가 쓴 '눈먼 자들의 도시'는
한 도시에서 단 한 사람을 뺀 모든 사람이 눈 멀면서 벌어진 일들을 담고 있다.
그 소설이 가장 가슴 치게 만드는 점은
어떤 도시라도 전 민중의 눈이 멀면 묘사되는 상황처럼 되지 않을까하는
매우 현실적인 인지, 사실주의적 감각이다.
 
눈먼 자가 사회의 일부일 땐
우리에서 '너'와 '나'의 분리가 명확해진다.
격리 수용되고, 다가온다는 이유만으로 총살당하고, 먹을 것도 제때 지급되지 않고...
아이러니하게 격리된 와중에도 배급되는 음식을 독점하여 사람들의 재산을 뺏고 강간하는 매우 조직화된 -그러나 인간의 집단 형성 본능의 실체를 의심하게 할만한 매우 사악한- 집단체가 생기고...
 
모두가 눈이 먼 시점에선

인간의 창조물 도시는
- 누군가는 몇백년 몇천년 이어갈 거라 착각할지도 모르나-
신기루와 같이 단 1주일간의 인류 생존조차 보장할 수 없는 곳이며,
이미 자연과 너무 멀리 떨어진 인간이란 존재들은
먹을 것을 약탈하고 약자를 폭행하고 함께 살기 위한 어떠한 규칙과 합의도 이루지 못한채 낱낱으로 흩어지다가
시체가 되면 개들에게 뜯어먹힌다.
 
여기서 작가는 눈이 멀지 않은 한 여인을 배치함으로써
휘몰아치는 이야기의 폭풍우 속에서 독자를 위한 작은 숨구멍 하나를 열어놓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유일한 희망인 양

눈먼 자들의 사이에서 유지할 수 없는 정신을 유일하게 유지하며
가까스로 생존한 -더불어 주위 사람들을 함께 생존시킨 - 한 여인은 그러나,
후속편격인 [눈뜬 자들의 도시] 속 '권력에 눈먼 자'들의 사이에선 끝내 생존할 수 없었다.

지자체 선거가 있은 다음날, 어느 나라의 한 수도에서 투표자의 80%이상이 백지투표를 했다.
투표 결과의 무정부주의적 성격에 흥분한 정부는 같은 선거를 다시 한번 치렀으나 백지투표자의 수를 더욱 늘려주었을 뿐이다.
 
이런 극악무도할,
어쩌면 -결코 그렇지 않았으나- 국제적 거대 무정부조직의 나라 흔들기라고 여길 수 밖에 없는 이 투표 결과에 대해 정부는 수도 민중들에게 합당한 처벌을 내리기로 한다.
 
공식적으로 행해진 처벌은 계엄령 선포와 모든 행정, 입법, 사법기관의 이전.
그러나 경찰도 정치인도 사라진 수도에서 예상된 대규모 폭력이나 약탈 사건 따윈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정부가 비공식적으로 행한 처벌 중 하나였으나 무정부주의자의 행위로 규정지워진 지하철역 폭파사건이 있었을 뿐이다.
 
정부가 아무리 시민들을 감시해도 그 뒤에 숨어있어야 할 악독한 무정부주의자들의 개입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도시의 민중들은
비록 폭압적 계엄령 속에서 입밖에 내지 못하지만
모두들 '시켜서 한게 아니예요. 내 의지대로 백지투표를 했을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처음부터 정부가 민중의 소리에 귀 기울여 항복을 선언하게 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
우연히 4년 전 모두 눈먼 사태 와중에 유일하게 눈이 멀지 않았던 한 여인을 찾아낸 정부는 그녀를 백색투표 사태의 주동자로 지목하여 여론을 조작하고 끝내 암살시키고 만다.
 
그렇다고 시민들이 정부의 장난질에 놀아나거나 한 것 또한 아니다.
정부의 조작을 드러내려는 한 경찰과 어떤 언론사의 노력으로 새벽시간 아주 잠시 가판대에 나왔던 신문기사는
-비록 단기간에 가판대에서 사라졌지만-
시민들의 손에 의해 민주화 찌라시 마냥 서로 복사하고 서로에게 나누어주고 서로 읽어나가면서 퍼져나갔다.

민중의 찬란한 단결을 믿고 민중의 분열에 좌절했던 사람이라면 이번 소설에서,
민중이 여전히 분열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한줌도 안되는 권력집단의 영원한 쳇바퀴 속에서 놀아날 수 밖에 없는 사회라는 색다른 좌절과 패배를 맛볼 것이다.
 
[눈먼 자들의 도시] 속에 나타난 긍정주의는 사라지고
노작가는 빠져나올 수 없는 인간 사회의 사슬에 갇혔다.
 
과연 이 책의 그후,
4년 전 눈이 멀지 않았던 그녀를 통해, 그녀의 죽음을 통해
민중은 무언가를 촉발시킬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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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산 무협 단편집 - 더 이상 칼은 날지 않는다
진산 지음 / 파란미디어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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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현실의 생생한 묘사를 담은 글이 내 마음에 닿을 때,
그 묘사의 상황은 어느덧 내 눈 앞에 드넓은 벌판처럼 펼쳐지고,
나는 반경 수미터, 수킬로미터에 달하는 공간을 재창조하기 시작한다.

표현이 사실적일수록 나의 머리가 수용 가능한 것일수록
재창조된 공간은 신뢰감을 얻고 사실성을 획득한다.

보통은 그러할 진데...

무협에 당도하면
수십, 수백을 단칼에 쳐도,
수백, 수천년을 뛰어넘어도,
수천, 수만리를 단숨에 넘어도
모든 상황이 생동감있게 펼쳐진다.

빙판에 매장했다가 다시 꺼내고도 동상에 걸리지 않고,
함께 묻어두었던 쇳덩이로 칼을 만들면 그 칼이 주인 옆에 붕붕 떠다니고,
심법을 쓰면 마치 거울인양 자신의 '자아'가 아닌 타인의 자아만을 비추는 얼굴이 되고,
평범한 초식 하나만 그어도 그의 숨은 내공을 눈치챌 수 있고,
뿜어져나오는 살기만으로도 죽을 듯 숨이 막히고...

어쩐지 현실에서도 존재할 것만 같다는 생각을 머리 속에 가득 채워준다.

7편의 무협단편을 담은 진산무협단편집에는
정파와 사파의 대서사나 각종 검법의 세세한 설명은 없다.
다만 읽어나가다보면 왠지 '강호에서 산다'는 것, '강호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것, '강호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 것만 같다.

단편이라는 짧은 문장들 속에서도
수많은 이들이 수많은 내용으로 드라마를 만들어가고,
아무런 거부감이나 비약없이 자연스레 넘어가는 감정선을 느끼면서 작가의 수려한 문장에 감탄하게 된다.

일찌감치 강호를 벗어난 자는 인간의 삶을 얻었고 평범한 주검이라는 선물이 덤으로 기다리고 있다.
강호에 남은 자 중 너무나 살리고 싶은 많은 사람들은 모두가 주검이라는 알지 못하는 검은 나락에 빠진 듯 쓰러져간다.
그러나 그들의 주검은 강호에 꽁꽁 묶인 자들에 비해 훨씬 담담하게 선택할 수 있는 어떤 선택지와도 같은 느낌이다.
다소 비열한 듯, 냉혹한 듯 보이는 자가 끝까지 살아남은 그 곳은 더이상 벗어날 수 없는 '강호'라는 철조망 속의 고독 뿐이다.

강호를 살아가는, 한때 강호를 살아갔던 사람들이 모든 것을 바쳐 깨닫게 되는 삶의 마음가짐과,
사랑이든 증오든 때로는 알 수 없는 그 어떤 감정이든 생생하고 애달픈 마음의 이야기를 진하게 읽은 기분이다.

고요속에 가슴에 손이 얹어지고 눈이 감겨지는,
심박동이 마구 뛰다가도 평정을 찾게 되는,
행복한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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