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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1 ㅣ 코기토 총서 : 세계 사상의 고전 1
장자 지음, 이강수.이권 옮김 / 길(도서출판) / 2005년 1월
평점 :
장자에 관한 책들은 무척 많다. "노자가 압축적이고 시적이라면, 장자는 유장하고 산문적이다." 노자와 장자를 흔히 이렇게 대별해 평가한다. 하지만 이 말은 어폐가 있다. 역설의 구라쟁이 장자, 그 명성을 익히 알려진 바다. 동서양 고전을 통틀어 장자만큼 흥미진진한 구라쟁이는 드물다. 그에 필적할 만한 인간을 꼽으라면 라블레 정도가 있지 않다 싶을 정도다. 하지만 장자라는 인물, 아니 장자라는 책이 보여주는 세계는 서양 근대 초입의 라블레 정도가 아니다. 우주적인 상상력의 근원에는 다양한 빛깔의 어둠이 들어 있다. 혼돈에 관한 일화를 드는 것만으로도 그 다양한 빛깔의 어둠이 빚어내는 황홀경에 취하기에 충분하리라. 그동안 장자의 한글번역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그 중 부동의 권위를 자랑했왔던 것이 바로 현암사판 장자였다. 안동림 교수가 번역한 현암사판 장자는 그러나, 눈을 피로하게 한다.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다닥다닥 원문과 번역문이 줄지어 나오는 책의 면면은 휴식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에 길에 출간된 이강수, 이권 선생이 같이 번역한 길판 장자는 시원하다. 장자의 시원한 사유에 걸맞게 편집도 시원하게 했다. 그리고 책값의 문제가 걸리긴 하지만, 장자의 내편, 외편, 잡편을 각각 따로 책을 내려고 한다. 그 첫번째 책 장자 내편으로 미루어보건대, 읽는이를 고려한 편집에서 단연 다른 판본보다 훌륭한 가독성을 보이지 않을까 싶다. 편집상의 맛이야 그렇다치고, 그렇다면 번역의 상태는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이 문제 역시 걱정할 것이 못된다. 이 책은 노자와 장자 철학연구로 30여 년의 세월을 보낸 연세대 이강수 교수와 그의 제자 이권 선생이 함께 번역했다는 점에서 신뢰감에도 의문의 여지가 없다. 믿을 만하다. 우리는 결정본이라는 개념이 무척이나 약하다. 오늘날 일본의 학문적 발전은 번역을 통해 이루어졌다. 만약 우리나라처럼 정본의 개념이 없었다면 그들은 딛고 일어설 발판을 만들지 못해 오늘날과 같은 학술적 발전을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게에도 뛰어난 번역에 후한 점수를 주고, 그것을 우리 자신의 유산으로 수용하는 당당함이 있어야 한다. 서양 고전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가 수천년 동안 함께 문화적 자양분을 나누어왔던 동양고전에서도 그런 태도가 필요할 것이다. 이 책은 그러한 본보기이지 싶다. 현대적 감각에 맞게 편집하되, 내용의 치밀함과 정확도는 고전적인 기준을 그대로 따른다. 물론 새로운 연구성과의 반영도 있다. 앞으로 잇따라 소개될 장자의 외편과 잡편에도 기대감을 갖는다. 부드러운 상아빛 표지에 원문과 번역문 그리고 주해를 부담없이 볼 수 있도록 시원하게 편집한 의도가 단순한 편집 기술 이상인 것처럼 보인다. '형식은 그 운명을 결정한다.' 불현듯 이렇게 말한 한 리얼리스트의 말이 떠오른다. 책값이 부담되지만 구해둘 만한 책이란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