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에서 고증학으로
벤저민 엘먼 지음, 양휘웅 옮김 / 예문서원 / 2004년 9월
평점 :
절판


중국 청나라의 학풍은 매우 치밀하고 정교하다. 강희, 건륭, 옹정제 등의 뛰어난 군주들이 청나라의 문화를 화려하게 가꾸었다. 중화주의가 무서운 것은 그것을 거부하는 자들을 닮게 한다는 데 있는 것이다. 사실 싸움꾼은 자신의 적을 닮아가기 마련이다. 청나라는 오랑캐가 세운 나라였지만, 한족이 하지 못했던 많은 일들을 했다. 그중 하나가 성리학의 철옹성을 허물어뜨린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도 주먹구구식으로 난폭하게 처부순 것이 아니라 아주 주도면밀하고 계획적으로 반성과 비판을 통해 허물어뜨렸다. 그것을 수행하는 최고의 수단이 바로 고증학이었다. 유학사를 통해 아무 반성없이 전수되어왔던 그릇된 지식(경전의 권위에서 나온 거짓 신화들)이 청대 말엽에 활동했던 고증학자들의 손에서 그 진위가 가려진 경우가 무척 많다. 이 책은 미국 중국학자인 벤저민 엘먼의 박사학위 논문을 단행본으로 묶은 것이다. 유학 공부자들에게는 거의 필독서로 꼽히는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이 번역되었다는 사실이 매우 반갑다. 서구 학계의 중국학(동아시아학)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에 모자람이 없는 작품이다. 이 책은 우리의 사상사와도 무관하지 않은 흐름을 짚어준다. 추사 김정희의 존재가 아로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청대 강남 지역의 학자들이 얼마나 행복한 환경에서 고증학을 꽃피웠는지 잘 나타나 있다. 역설적인 것은 고증학이 그렇게 허물어뜨리려 했던 유학의 신화를 뒤흔들자 청나라마저 갈피를 못잡고 흔들리게 됐다는 사실이다. 의식의 지배관계, 권력관계(그람시의 용어로 하면 헤게모니)가 얼마나 위협적인가를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사방의 잡다한 사상을 빨아들여 성장한 한족이데올로기의 극복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던 것이다. 유학의 해체를 불러왔던 고증학은 사실은 유학의 깊이를 구하고자 하는 시대적 요청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강남 지역의 학자 집단이 보여줬던 역동성, 그리고 그들의 활동을 정책적으로 지원했던 청나라 조정, 그리고 또 그들이 맘껏 정보를 교환할 매체를 제공해주었던 인쇄출판문화 등의 당대 환경이 잘 묘사되어 있는 책이다. 중국은 한족의 나라가 아니라 중국 인민들의 나라다. 고증학의 역설적인 운명을 생각하면서 역사의 흐름은 인위적인 노력으로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다고 운명론적인 관점으로 손을 놓고 있을 것도 아니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 책은 한국유학사와 나란히 봐야 할 중요한 흐름의 집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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