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 1 코기토 총서 : 세계 사상의 고전 1
장자 지음, 이강수.이권 옮김 / 길(도서출판)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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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에 관한 책들은 무척 많다. "노자가 압축적이고 시적이라면, 장자는 유장하고 산문적이다." 노자와 장자를 흔히 이렇게 대별해 평가한다. 하지만 이 말은 어폐가 있다. 역설의 구라쟁이 장자, 그 명성을 익히 알려진 바다. 동서양 고전을 통틀어 장자만큼 흥미진진한 구라쟁이는 드물다. 그에 필적할 만한 인간을 꼽으라면 라블레 정도가 있지 않다 싶을 정도다. 하지만 장자라는 인물, 아니 장자라는 책이 보여주는 세계는 서양 근대 초입의 라블레 정도가 아니다. 우주적인 상상력의 근원에는 다양한 빛깔의 어둠이 들어 있다. 혼돈에 관한 일화를 드는 것만으로도 그 다양한 빛깔의 어둠이 빚어내는 황홀경에 취하기에 충분하리라. 그동안 장자의 한글번역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그 중 부동의 권위를 자랑했왔던 것이 바로 현암사판 장자였다. 안동림 교수가 번역한 현암사판 장자는 그러나, 눈을 피로하게 한다. 읽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다닥다닥 원문과 번역문이 줄지어 나오는 책의 면면은 휴식을 허락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에 길에 출간된 이강수, 이권 선생이 같이 번역한 길판 장자는 시원하다. 장자의 시원한 사유에 걸맞게 편집도 시원하게 했다. 그리고 책값의 문제가 걸리긴 하지만, 장자의 내편, 외편, 잡편을 각각 따로 책을 내려고 한다. 그 첫번째 책 장자 내편으로 미루어보건대, 읽는이를 고려한 편집에서 단연 다른 판본보다 훌륭한 가독성을 보이지 않을까 싶다. 편집상의 맛이야 그렇다치고, 그렇다면 번역의 상태는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이 문제 역시 걱정할 것이 못된다. 이 책은 노자와 장자 철학연구로 30여 년의 세월을 보낸 연세대 이강수 교수와 그의 제자 이권 선생이 함께 번역했다는 점에서 신뢰감에도 의문의 여지가 없다. 믿을 만하다. 우리는 결정본이라는 개념이 무척이나 약하다. 오늘날 일본의 학문적 발전은 번역을 통해 이루어졌다. 만약 우리나라처럼 정본의 개념이 없었다면 그들은 딛고 일어설 발판을 만들지 못해 오늘날과 같은 학술적 발전을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게에도 뛰어난 번역에 후한 점수를 주고, 그것을 우리 자신의 유산으로 수용하는 당당함이 있어야 한다. 서양 고전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가 수천년 동안 함께 문화적 자양분을 나누어왔던 동양고전에서도 그런 태도가 필요할 것이다. 이 책은 그러한 본보기이지 싶다. 현대적 감각에 맞게 편집하되, 내용의 치밀함과 정확도는 고전적인 기준을 그대로 따른다. 물론 새로운 연구성과의 반영도 있다. 앞으로 잇따라 소개될 장자의 외편과 잡편에도 기대감을 갖는다. 부드러운 상아빛 표지에 원문과 번역문 그리고 주해를 부담없이 볼 수 있도록 시원하게 편집한 의도가 단순한 편집 기술 이상인 것처럼 보인다. '형식은 그 운명을 결정한다.' 불현듯 이렇게 말한 한 리얼리스트의 말이 떠오른다. 책값이 부담되지만 구해둘 만한 책이란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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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쓰카 히사오와 마루야마 마사오 - 일본의 총력전 체제와 전후 민주주의 사상
나카노 도시오 지음, 서민교.정애영 옮김 / 삼인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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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틀간 정신없이 읽었다. 재미있다고 하면 어폐가 있을 테고, 뭐랄까, 논의 치밀함과 광범위함에 감탄했다고 해야 옳겠다. 매우 유익한 책이란 생각이다. 삼인출판사의 안목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 책에서 다루어지는 인물들은 전후 일본을 대표하는 사상가들이다. 저자 나카노 도시오는 이들을 아무 거리낌없이 비판하고, 전후 일본인이 가져야 할 사상이 무엇인가를 되묻는다. 베버의 사회학 이론을 수용해 일본 사회학의 비조로 불리는 오쓰카 히사오, 그리고 '텐노'(천황)로 불리며 전후 일본 사상계를 휘어잡은 거인 마루야마 마사오의 사상을 도마에 올려놓고 아주 정밀하고 날렵하게 칼질을 한다. 물론 이 두 거장의 사상이 주로 분석대상이긴 하지만, 일본의 양심으로 불리는 다른 사상가들도 그 대상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심지어 요즘 우리나라에서 내셔널리즘비판, 페미니즘이론, 젠더비평 등으로 자주 번역소개되곤 하는 우에노 치즈코조차 그 생각의 허점이 지적되고 있다. 이들을 비판하는 저자 도시오의 칼날은 매우 날카롭다. 그의 논의를 따라가다 보면 전시기의 일본과 전후의 일본이 깔끔한 단절을 이룬 것처럼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허황된 거짓말인가를 여실히 깨달을 수 있다. 특히 마루야마 마사오를 비판하는 제2장은 이 책의 압권이라 할 수 있다. 사실 나는 이 책에 소개된 일본사상가들의 면면을 잘 알지 못한다. 몇몇은 알되 많은 인물에 대한 정보가 없다. 국민국가담론에 익숙한 요즘의 젊은 인문학도들은 알 만한 사람도 그리 잘 알지 못한다. 내가 아는 사람을 꼽으면, 마루야마 마사오와 요시모토 다카아키 정도다. 요시모토 다카아키는 전후 일본의 책임론을 진지하게 파고든 비평가이자 시인으로, 우리에겐 요시모토 바나나의 아버지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마루야마 마사오가 '마루야마텐노'로 불리는 일본사상계의 거인이라는 것, 그래서 그의 저작을 접할 때마다 알 수 없는 광휘에 휘둘려, 그를 읽어봐야겠다는 의무감을 가진 적이 있음을 고백해야겠다. 통나무에서 출간된 <일본정치사상사 연구>의 글머리에 있는 김용옥 선생의 글을 읽으면,  '텐노'니 '거대한 거짓말'이니 하는 말들이 나온다. 일본에서 그는 그만큼 문제적인 인물이다. 그 책속에서 김용옥은 마루야마라는 대학자에 대한 존경과 경탄을 여과없이 쏟아낸다., 그래서 처음엔 짜증이 나기도 한다. 지나치게 우쭐해서 씌어진 것 같은 느낌이 강하다. 하지만 고비를 넘기고 그가 바라보는 마루야마와 마루야마 사상의 문제점을 접하게 되면, 역시 김용옥이 명민한 인물이란 사실을 다시금 느낄 수 있게 된다. 그의 형식은 잡스러운 반면, 그가 말하고자는 내용은 정연하게 정리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는 말이다.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지는 감이 있는데, 암튼  <일본정치사상사 연구>에서 김용옥 선생이 마사오를 학자로서 그 치밀하고 수준 높은 '필로로기'(문헌학)의 경지에 감탄하는 것이지 그의 필로소피에 감탄하는 것은 아니라고 분명히 못박고 있듯이, '텐노'로 불리는 마루야마의 사상에는 일정한 결함이 내재되어 있음은 일본사회에서도 오래전부터 지적돼온 모양이다. 이 책은 그것을 선명하게 하는데 큰 도움을 줄 책이다. 정치학 연구자나 일본사 연구자들에게 소중한 문헌으로 각광받는 마루야마 사상의 맹점을 이렇게 잘 풀어 설명하기도 어려울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특히 마루야마 마사오가 자신의 정치철학을 개진하는 매개로 삼았던  에도시대의 '오규 소라이'과 메이지유신기의 '후쿠자와 유키치'의 해석을 잘 쫒아갈 수 있는 역량이 있는 분들에겐 여러 모로 도움이 될 만한 이야깃거리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반드시 그걸 알아야 책의 주제를 파악하는 건 아니지만. 

이 책에서 저자가 주장하는 바를 요약하는 것은 어려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 책의 원제에서 너무나 뚜렷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번역본의 뒤표지에 붉은 글자로 새겨진 "동원, 주체, 전쟁책임"이라는 것을 다루기 위해서 저자는 일본의 전후를 새로운 원점으로 규정하면서 국민통합을 주장했던 사상가들의 과오를 묻고 있는 것이다. 중일전쟁부터 태평양전쟁까지 15년간 이어진 일본의 총력전 체제는 1945년 8월 15일을 기점으로 막을 내리고, 전후의 일본은 새로운 마음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던 일본의 주류 사상가들의 내면에 어떤 모순적인 논리가 잠복해 있었으며, 그것에 노출된 일본이 어떻게 하여 아무 반성없이, 오늘날과 같은, 전쟁책임을 회피하는 비겁한 길을 걷게 됐는지를 밝히는 것이 이 책의 목적이다. 저자 도시오는 마루야마 마사오가 말하는 것처럼 그의 전후 사상이 그의 전시기의 사상과 그리 깔끔하게 단절되지 않았다고 본다. 전시기의 총동원체제에 봉사하던 논리가 여전히 전후에서 숨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오늘날과 같은 일본의 모습을 만들었다는 진단에는 일본의 양심적(아니 엄격한) 지식인의 혜안이 느껴진다.

"전전과 전후의 진정한 단절은 없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그것을 그저 선언으로만 밝히는 것이 아니라 히사오와 마사오의 생각 속에 있는 어두운 그림자들을 선명히 끄집어 보임으로써 규명한다는 데 이 책의 묘미가 있다. 그 논의의 과정(논리전개)을 일일히 나열할 능력이 내겐 없다. 하지만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전쟁책임의 담론은 이런 이론적이고 심층적인 분석을 통과해야만 더 굳건한 정당성을 획득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저자는 전후 일본인의 정체성을 규정하고 있는 허상을 깨부술 것을 강력하게 주문하고 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전후 어떤 지식인도 "일본을 '깨는' 비판"에 착수하지 못한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그런 자기부정과 자기파괴 없이 구축된 건물 위에 옥탑방처럼 지어진 자원봉사, 비정부기구의 활동 역시 전전의 총동원체제의 환영에 시달리고 있는 건 아닌가 하고 자문하고 있다.

나카노 도시오는 이 책의 맺음말에서 "일본인으로서의 자기동일성을 해체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올바른 전쟁책임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기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타자의 입장에서 문제를 보면서, 자기가 분열되는, 다시 말해 주체가 분열되는 고통스러운 시간을 감내해야 한다고 말한다.

"전후 세대의 일본인으로서의 책임은 그것이 다가 아니다. 예를 들면 '종군위안부'였던 피해자들 입장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과거의 일로서의 전시 성폭력만은 아니다. 그녀들에게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성폭력의 고통은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책임의 문제는 그것만으로도 전시에 국한된 문제가 아닌 것이다. 즉, '전시'를 이어받고 있는 이 '전후'에 대해 책임이 생기는 것이다."(본문 277쪽)

"그런데 '책임을 진다'라는 것이 책임을 묻는 구체적인 '타자'에 대한 응답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자기동일의 과정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분열의 과정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즉, '일본인으로서의 책임'을 인정하고 책임을 지는 것은 '나'가 불가피하게 자기 분열적인 갈등을 겪고 그것을 헤쳐가는 과정이다. 그 출발점은 '타자의 소리를 듣는 수동적인 체험'이다. 피해자의 소리가 나에게 들리는 방법으로 혹은 '듣게 되는' 방법으로, 그렇지 않았으면 지나쳤을 과거의 폭력이나 증오의 존재를 알게 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1991년 '종군위안부'였음을 밝히고 고발하기 시작한 김학순 할머니 등의 행동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이 타자의 출현은 그것 없이는 직시할 수 없었던 과거의 폭력이나 증오의 존재를 알려주고, '나'에 대해 과거와의 관계를 묻고 죄책감 없이 만들어져온, 또는 '무구함'을 의심하지 않은 채 만들어져온 이 '나'의 동일성(정체성)을 위기에 빠뜨린다." (본문280-281쪽)

위의 인용은 일본 지식인의 전쟁책임 문제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 문장은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내가 상처주었던 모든 이들에게 내게 가져야 할 태도인 것 같다. 국가와 국가 사이의 문제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윤리적인 문제와 동떨어진 게 아님을 알겠다. 책임의 문제는 권모술수를 넘어선 곳에 자리한다. 생뚱맞은 소리 같지만,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마키아벨리가 태어난 뒤로 우리의 등에도 큰 혹이 달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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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색일대남
이하라 사이카쿠 지음, 손정섭 옮김 / 현실과미래 / 199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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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불쾌한 서평을 접하게 될 독자에게 미리 고함

이 서평은 아마 기분 나쁜 감정을 유발할지도 모른다. 불쾌해지지 않으려거든 여기서 읽기를 그만두기를 권한다. 왜냐하면, 지극히 개인적인 감정의 토로가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이란 나라에 관한 찬양을 하려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우리가 갖고 있는 커다란 편견을 광정하고픈 욕망에서 씌어진 글임을 미리 밝힌다. 이하라 사이카쿠에 관한 유일한 번역서의 서평을 쓰려고 맘먹으면서, 자연발생적으로 일본과 일본문화를 생각하게 됐기 때문인다. 출발점은 이거였다. 일본문화는 정말 한국문화에 젖줄을 대고 있었을까? 미리 답을 하자면, 아니올시다라는 것. 일본은 일본이고, 한국은 한국일 뿐이라는 너무도 당연한 대답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굳이 이런 단서를 미리 밝히는 것은 사이카쿠의 소설에 관한 서평을 통해, 일본문화의 독창성과 특수성이 제대로 평가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기 때문이다.

2. 도쿠가와 시대와 조선시대의 유사점과 차이점

도쿠가와 시대와 조선시대은 시기적으로 같을 뿐 아니라 여러 면에서 비슷하다. 특히 외부세계에 문호를 닫아걸고 자기 자신을 뚫어지게 쳐다본 시기였다는 점에서 매우 닮았다. 표명하지는 않았지만 쇄국의 노선을 걸었던 두 국가의 운명은 하지만 오늘에 와서는 판이하게 달라졌다. 단순히 경제적인 발전만을 가지고 하는 말은 아니다. 만약 지진과 태풍 같은 자연재해로 한순간에 꼴깍 일본섬이 바닷물에 잠긴다고 치자. 그럼 일본은 과연 완전히 사라질까. 적어도 내 소견으로는 일본은 살아남을 것이다. 왜냐하면 문화적인 강국이기 때문이다. 일본의 영토확장주의는 그저 땅뙈기 몇 평을 더 차지하려는 영토분쟁에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일본은 무시무시한 민족이다. 일본문화는 일본이란 네 쪽짜리 섬이 사라져도 지구상에 살아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증거는 대보라면 숱하게 많은 것을 댈 수 있을 것이다. 흔히 말하는 "니뽄필"은 차치하고, 일본만화영화인 아니메의 유산은 인류역사상 가장 탁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새로운 문화장르를 개척하는 데 있어 일본만한 창조성을 지닌 집단은 흔치 않다. 마야나 잉카처럼 일본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열패감에 젖어서 하는 말이 절대로 아니다. 일본문화는 한국인의 정서에 맞지 않는 부분이 무척 많다. 하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의 정서에도 맞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 잘못이다. 17세기 조선와 일본은 모두 유교을 숭상하던 나라였다. 하지만 일본은 한국처럼 모노톤이 아니었다. 미나모토 뇨엔이 쓴 <도쿠가와 시대의 철학사상>을 보면 얼마나 다양한 사상이 편견없이 자유롭게 탐구되었던가를 잘 알 수 있다. 성리학, 양명학, 난학 등 갖가지 학문이 꽃피어 근대로의 길을 재촉했다. 그럼 조선은? 조선 역시 훌륭한 근대화의 길을 걸었다. 서구와 달랐을 뿐이다. 조선이 형제국으로 자처했던 명나라는 당시 지구상에서 가장 앞선 문명을 자랑하던 국가였다. 조선의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는 서구유럽이 숱한 분쟁과 갈등을 통해 성취했던 것들을 적어도 2, 3백년 전에 이미 자기것으로 소화하고 있었다. 국가체제의 주도면밀함에 있어서 조선은 최강국이었다. 영토는 작았지만 사상 면에서는 최고 수준을 구가하고 있다. "과거제도"라는 관료선발 시스템은 일본에는 없는 조선만의 것이었다. 조선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마치 정교한 눈물시계(자격루)처럼 잘 짜여 돌아가는 기계장치와 같았다. 조선이 고리타분한 유교국가였다는 편견은 수정되어야 한다. 조선문명은 당대의 어느 국가보다 앞서 있었다. 그럼 일본은? 일본문명은 조선에 영향권 아래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 나름의 문화가 없었던 것은 절대로 아니다. 조선이 관료주의에 아성을 쌓아갈 때 일본은 상업주의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도쿠가와 시대와 조선시대의 결정적인 차이점은 과거제도와 상인문화의 존재 유무다. 일본어로 죠닌으로 불리는 상인계급의 성장은 도쿠가와 시대를 조선시대와 다른 것으로 만들어놓았다. 물론 조선에도 "부보상"(보부상은 일본제국주의자들의 장난으로 생겨난 용어였음)과 같은, 훌륭하고 뛰어난 유구한 상업의 전통이 있지만, 일본의 죠닌처럼 문화적인 공적을 다양하게 쌓지는 못했다.

3. 죠닌 출신의 문인, 이하라 사이카쿠의 등장

<일본문화사>를 보면 일본의 문학전통이 얼마나 뿌리깊은지 새삼 놀라게 된다. 서구 개인주의의 등장이 근대의 길목에서 개화됐던 것과 달리, 일본의 개인은 오래 전부터 그 전통을 지니고 있었다. 일본문학의 고전으로 일컬어지는 <마쿠라노소시>나 <겐지모노가타리>에 등장하는 작중화자들은 단순히 임금만을 그리지 않는다. "나"라는 존재의 내면을 향한 복잡하고 섬세한 시선이 늘 내재되어 있다. 물론 이런 전통이 조선에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양과 질에 있어서 확언하건대, 조선은 일본을 따라가지 못한다. 어쩜 그런 문화적인 전통이 있었지만 명맥이 끊긴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거나 말거나, 현재 남아있는 자료를 근거로 판단해볼 때, 일본 고전문학의 감수성은 한국 고전문학의 감수성에 비해 한 단계 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개인이라는 현대의 기준을 놓고 볼 때, 그렇다는 말이다. 오해없길 바란다. 이하라 사이카쿠의 등장은 도쿠가와 시대의 죠닌 문화의 융성과 분리해 생각할 수 없다. 죠닌 문화의 발전으로 말미암아 사이카쿠와 같은 뛰어난 문인이 등장할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죠닌 문화의 특성은 근엄한 똥폼을 잡지 않는다는 데 있다. 지식인들이 고담준론으로 구름 위를 걸을 때, 이들의 말과 생각은 시장바닥과 유곽을 거닌다. 우리의 생활과 좀더 밀접하게 닿아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고려시대의 문학이 지닌 서민적인 활력이 조선시대에 와서 퇴화한 반면, 일본은 그 반대의 양상을 보여준다는 말이다. 이는 다른 방식으로 생가해볼 수 있다. 역사는 항상 현재의 관점이 투영된다. 아무도 과거사를 과거의 눈으로 보지 않는다. 그래서 고대사는 허구의 허방에 빠질 가능성이 늘 잠복해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문학사에 대한 평가 역시 현재의 관점을 무시할 수 없다. 현재의 관점에서 우리나라 국어 교과서에서 고려속요 "쌍화점"의 전문을 본 사람은 대체 몇이나 될까. 그리고 그 짧은 민중가요 속에서 우리문학 전통이 일본의 체계적이고 장대한 서사전통에 어떻게 명함을 내밀 수 있을까. 문학을 놓고 이야기하면, 모골이 송연해질 뿐이다.

4. 사이카쿠의 글이 고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돼 있다는 것의 의미

일본문화에서 부러운 것은 똥폼을 잡지 않는다는 것이다. 엄숙주의에 찌든 한국문화와 달리 일본문화는 마치 일회적인 듯한 인상을 준다. 인생이 한번뿐이듯 먹고 싸면 그만이라는 식의 문화적 분위기가 있다. 죽음과 허무에 바탕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기묘한 풍토다. 그럼 그것이 치졸하고 미개한 것인가. 적어도 형이상학적인 것은 아니다. 우리문화의 형이상학적인 깊이를 일본문화에서 만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조선의 혈통을 지닌 우리들은 늘 고상한 생각만 하면서 사는가. 그렇지 않다. 먹고 싸고 자고, 울고불고 사랑하고 싸우고 사는 것은 마찬가지다. 그런 인간의 바닥을 보여주는 일에 우리는 왜 그렇게 색안경을 끼고 있었던가. 일본의 문화적 전통은 어찌 보면 황당하다 싶을 정도로 유연하다. 고등학교 교과서에 성문학 범주에 들어갈 만한 고전소설이 버젓이 수록되어 있다니 말이다. 하지만 성적인 것을 자극하기 위해 그것을 수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하라 사이카쿠의 글이 의미 있는 것은 도쿠가와 시대의 민중풍속을 그만큼 잘 보여주는 텍스트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과문한 탓인지 모르지만, 조선의 저자거리를 보여주는 문학작품은 대체 얼마나 있는 것일까. 사설시조의 등장도 조선 후기에나 있었던 일이다. 더욱이 여항문학의 발전이나 중인 계급의 문학적 참여도 나중 일이었다. 다양한 문인들이 나와 격조높은 문재를 뽐내긴 했지만, 성을 소재로 한 이런 유들유들한 글은 없었다. 아니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교육자들은 그런 글을 학생들에게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적어도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적에는 눈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눈치를 봐가며 "세책점"에서 음탕농염한 소설을 빌려 읽었을 숱한 사람들이 있었건만, 그렇게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을 방각본소설 한 편이 소개되지 않았던 것이 과거의 국어교과서였다. 지금의 사정은 어떤지 알 수 없지만, 문학사에서 스쳐가는 한낱 에피소드에 불과하지, 정당한 연구대상으로 삼고 치밀하게 천착한 사람이 얼마나 되는지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전기수(소설 구연(口演)하는 사내)의 구성진 목소리를 들으며 흠뻑 취했을 민중들은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물론 사이카쿠의 소설이 지닌 완성도에 비해 한참 떨어지는 문학적 구성과 수준을 보여주는 것이 싫어, 자존심 차원에서 뺀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있는 그대로 당당하게 소개하고 알아야 할 것이 아닌가. 우리의 현실을 말이다. 그런면에서 사이카쿠의 글이 교과서에 수록돼 있다는 사실은 일본문화의 자긍심을 보여주는 일면이라 하겠다.

5. 귀여운 호색한 요노스케의 일대기

이제 책 이야기를 하자. 용두사미 꼴이 됐지만, 이 책은 색정광이라 불러 마땅한 요노스케란 인물의 여성 편력기를 다루고 있다. 요노스케는 7살 때부터 여성의 아름다움에 눈뜨고 사랑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평생 많은 여성관계를 맺으며 산다. 단순하게 말하면 그것이 전부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인생사의 온갖 자질구레한 일들을 마치 파노라마처럼 그려보이고 있는 것이 색다른 면이다. 번역본에는 사이카쿠가 직접 그린 판화가 수록되어 있어 읽는 맛을 더한다. 마치 삼국지 연판화를 읽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판화 속의 인물들은 나와도 요노스케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패랭이꽃 문양이 그려진 옷을 입은 사람만 찾으면 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이 주는 기쁨은 일본의 유곽문화와 죠닌문화를 알 수 있다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요노스케란 인물의 성격은 끊임없이 실소를 자아낸다. 여자와 자기 위해 진지한 생각을 쥐어 짜내는 요노스케는 귀여운 호색한이다. 에도시대(도쿠가와 시대)의 일본이 어떠했는가를 이처럼 잘 보여주는 글이 또 있을까. 지금 보아도 손색없는 문학작품이다. 300년 전 일본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은 만큼 생생하다. 이 책은 이미 절판상태에 있는 책이다. 다른 경로로 구할 수 있는 분이 있다면 반드시 찾아서 읽어보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출판에 몸담고 있는 분이 있다면, 이하라 사이카쿠의 글들을 모아 여러 권으로 묶여내도 일정한 성공을 거둘 작품이라고 말하고 싶다. 잘된 번역으로 포장만 잘 한다면, 분명 승산이 있다. 여기서 한마디만 하고 이 지겨운 글을 그치고자 한다. 이제 더이상 일본이 우리의 영향을 받았네 어쩌네 하는 식의 문화전파론은 그만두었으면 한다. 일본문화가 한국문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인가. 문화는 원래 주고받고 하면서 변화해가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집중하고 신경써야 할 것은 문화적 수용의 주체성이 아닌가. 주체적인 문화수용이란 측면에서 일본은 일본 나름의 길을 걸었고, 우리는 우리 나름의 길을 걸었을 뿐이다. 그러니 일본문화를 바로 보고 제대로 보자. 우리보다 나은 자산들이 무척 많다는 것도 있는 그대로 인정하자. 하이쿠, 요키요에, 노, 사무라이 등등 일본만이 지닌 것들을 공부함으로써 우리 것의 독창성을 탐구하는 기회를 삼았으면 한다. 우리문화의 형이상학적이고 사변적인 전통을 폄하할 것이 아니라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길을 터보자는 말이다. 우리 고전문학에는 귀여운 귀여운 요노스케 같은 인물은 없을지언정 허생과 같은 골때리는 수완가 선비는 있지 않았는가. 우리는 우리 나름의 전통을 열나게 찾되 남의 나라의 좋은 전통도 있는 그대로 인정해, 당당하게 문화적인 차이를 나누었으면 하는 생각이다.  

6. 참고로 소개하는 번역본에 수록된 <호색일대남>의 차례 

제1장 어린 피, 못 속이는 피-7세:어둠속에서 사랑은 시작되고, 8세:그래도 연애편지는 써야 한다, 9세:은밀한 곳을 훔쳐보다, 10세:남자 대 남자, 11세: 아름다운 소년 요노스케, 12세:번뇌의 때밀이 여인, 13세:이별은 현금지불로// 제2장 호색꾼의 향기는 점점 짙어지고-14세:혼자 침실로 간 이유, 15세:머리를 잘라도 떨칠 수 없는 미련, 16세:쓰디쓴 첫경험, 17세:오, 굳은 맹세, 18세:두 자매, 19세:땡중으로 추락하다, 20세:사창가의 기둥서방// 제3장 색욕에 불타는 청춘-21세:연애착수금, 22세:색은 때와 장소가 없다, 23세:적을 알아야 한다, 24세:광란의 밤을 낚다, 25세:알고보면 외로운 남자, 26세:창녀촌의 굴뚝연기, 27세:전혀 색다른 맛// 제4장 후회도 갈등도 물리치는 힘-28세:인과응보의 관문, 29세:요노스케의 눈물, 30세:한맺힌 여귀들, 31세:생명을 구해준 육봉, 32세:낮여우, 33세:요노스케 최초의 질투, 34세:꿈에 그리던 돈,돈// 제5장 사랑이어도 좋고 아니어도 좋다-35세:드디어 정식 부인을 정하다, 36세:깊디깊은 하룻밤 의리, 37세:몸도 마음도 예쁜 여자, 38세:목숨 건 구슬빛 사랑, 39세:나 참 더러워서, 40세:사람 볼줄 아는 눈, 41세:일생일대의 봉변// 제6장 사랑의 화신, 요노스케-42세:죽음 직전에 건진 사랑, 43세:여자는 많아도 최고는 하나, 44세:환상속의 그대, 45세:품질제일주의, 46세:지성(?)과 야성을 겸비한, 47세:묻혀진 진실, 48세:삼각관계의 해프닝// 제7장 지칠줄 모르는 유곽행-49세:타유의 고집, 50세:통큰 한량들의 잔치, 51세:기생 길들이기, 52세:수수께끼 놀이, 53세:사랑의 일기장, 54세:아즈마에 대한 추억, 55세:아게야에서 키운 우정// 제8장 영원히 지지 않는 패랭이꽃-56세:타유여 영원하소서, 57세:약에는 약, 강에는 강한 여자, 58세:초심자에 대한 각별한 예우, 59세:타유 전시회, 60세:사랑의 바람이 멈추지 않는 한// 호색일대남 해설// 옮긴이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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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리학에서 고증학으로
벤저민 엘먼 지음, 양휘웅 옮김 / 예문서원 / 2004년 9월
평점 :
절판


중국 청나라의 학풍은 매우 치밀하고 정교하다. 강희, 건륭, 옹정제 등의 뛰어난 군주들이 청나라의 문화를 화려하게 가꾸었다. 중화주의가 무서운 것은 그것을 거부하는 자들을 닮게 한다는 데 있는 것이다. 사실 싸움꾼은 자신의 적을 닮아가기 마련이다. 청나라는 오랑캐가 세운 나라였지만, 한족이 하지 못했던 많은 일들을 했다. 그중 하나가 성리학의 철옹성을 허물어뜨린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도 주먹구구식으로 난폭하게 처부순 것이 아니라 아주 주도면밀하고 계획적으로 반성과 비판을 통해 허물어뜨렸다. 그것을 수행하는 최고의 수단이 바로 고증학이었다. 유학사를 통해 아무 반성없이 전수되어왔던 그릇된 지식(경전의 권위에서 나온 거짓 신화들)이 청대 말엽에 활동했던 고증학자들의 손에서 그 진위가 가려진 경우가 무척 많다. 이 책은 미국 중국학자인 벤저민 엘먼의 박사학위 논문을 단행본으로 묶은 것이다. 유학 공부자들에게는 거의 필독서로 꼽히는 책이기도 하다. 이 책이 번역되었다는 사실이 매우 반갑다. 서구 학계의 중국학(동아시아학)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기에 모자람이 없는 작품이다. 이 책은 우리의 사상사와도 무관하지 않은 흐름을 짚어준다. 추사 김정희의 존재가 아로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청대 강남 지역의 학자들이 얼마나 행복한 환경에서 고증학을 꽃피웠는지 잘 나타나 있다. 역설적인 것은 고증학이 그렇게 허물어뜨리려 했던 유학의 신화를 뒤흔들자 청나라마저 갈피를 못잡고 흔들리게 됐다는 사실이다. 의식의 지배관계, 권력관계(그람시의 용어로 하면 헤게모니)가 얼마나 위협적인가를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사방의 잡다한 사상을 빨아들여 성장한 한족이데올로기의 극복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던 것이다. 유학의 해체를 불러왔던 고증학은 사실은 유학의 깊이를 구하고자 하는 시대적 요청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강남 지역의 학자 집단이 보여줬던 역동성, 그리고 그들의 활동을 정책적으로 지원했던 청나라 조정, 그리고 또 그들이 맘껏 정보를 교환할 매체를 제공해주었던 인쇄출판문화 등의 당대 환경이 잘 묘사되어 있는 책이다. 중국은 한족의 나라가 아니라 중국 인민들의 나라다. 고증학의 역설적인 운명을 생각하면서 역사의 흐름은 인위적인 노력으로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다고 운명론적인 관점으로 손을 놓고 있을 것도 아니겠지만 말이다. 아무튼 이 책은 한국유학사와 나란히 봐야 할 중요한 흐름의 집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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