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쇠 창비세계문학 16
다니자키 준이치로 지음, 이한정 옮김 / 창비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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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등학교 다닐때 날마다 일기 검사를 했다. 나는 일기 쓰기가 귀찮아서 굉장히 싫어했다. 그래서 매일 의미 없는 비슷한 이야기만 썼다. 후에 일기쓰기 숙제가 글쓰기 연습이라는 걸 깨달았을 때 열심히 하지 않았던 기억이 후회로 덮어졌다. 감수성이 또래보다 앞서가던 친구들은 선생님께 보여주는 일기와 자기만 아는 일기를 따로 쓰며 이중생활을 했다. 사춘기 소녀들에게 일기는 남에게 보여주기 싫은 스스로와의 비밀스러운 대화였을까.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SNS에 일기를 쓴다. 자신의 무얼 보고 어떤 음식을 뭐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낱낱이 모르는 사람들도 볼 수 있겠끔 인터넷 상에 올려놓는다. 보는 사람들을 의식한 나머지 하루의 이야기를 포장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정작 마음 바닥 가까이의 이야기는 쓰지 못하겠지. 그래서인지 나는 나 또한 블로그에 일상의 글을 올리면서도 인터넷 상의 일상들은 그저 이야기일 뿐 일기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일기는 어두운 곳에서 몰래 훔쳐보고 훔쳐써야 할, 유창한 말과 글이 아닌 더듬거리며 드러내놓기 망설이는 언어일 듯하다.

  책의 내용은 간단하다. 부부에게 딸이 있는데 사위 될 사람과 장모가 불륜을 저지른다. 이렇게 적으니 삼류 이야기일 듯 하지만 인물의 심리 묘사나 심리전이 뛰어나서 흡사 추리소설을 읽는 느낌이었다. 또한 사위될 이와 장모가 넘어서는 안될 선을 과감히 넘어서기까지는 남편과 아내사이 아슬아슬한 욕망의 줄타기와 듣도보도 못할 기상천외한 비밀이 숨겨져 있다. 우습게도 책 속의 부부는 일기를 못보게 숨겨놓으면서도 상대가 자신의 일기를 훔쳐 읽을 것이라 예견하고 또 원한다. 그리고 부부 사이임에도 원하는 바를 직접적으로 말하지 못하고 일기를 통해 자신의 욕구를 표출한다. 남편은 여자가 소극적이고 내성적이라 섹스에 적극적이지 않지만 음욕이 강하여 늙은 자신이 그의 욕구를 충족해줄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내는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아 여성은 조신하고 기품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남편과 섹스에 대해 대화하기를 매우 꺼려하지만 주체할 수 없는 성욕에 괴로워한다. 그리고 남편은 아내의 몸 구석구석을 미친듯이 탐하고 사랑하지만 아내는 남편의 몸이 자신이 원하는 모습이 아니기에 극도로 혐오한다. 이 부부의 은밀한 성생활를 쓴 일기를 교차하며 보여주고 원초적 욕망만이 가득한 인간들이 어디까지 추악해질 수 있는지를 에둘러 보여준다. 에둘러 보여준다고 표현한 건 아내와 남편의 일기만으로 벌어진 일들의 유추해야 하기에 일기에 나오는 사위될 남자인 '키무라'와 딸 '토시코'가 당최 무슨 생각으로 이 부부의 위험한 게임에 합류했는지 알 수 없다. 남편은 질투심으로 성욕과 정력을 되살리기 위해 키무라를 이용하고 아내는 그런 남편의 의도를 모른 척 젊은 피로 자신의 욕구를 채우려고 했다. 책 속 일기의 내용은 서로가 볼 것을 예상하고 썼기에 어떤 면이 '진심'인지, '진실'로 이 가정에 일어난 일은 무엇인지 독자들은 알 길이 없다. 비록 마지막 장에서는 아내가 이제는 남편이 읽지 못할 일기장에 그의 부재를 빌려 낱낱이 고백하지만 남편의 고백을 우리는 읽지 못한다. 읽으면서 제일 이해 할 수 없는 사람은 그들의 딸인 '토시코'였는데 무슨 생각으로 남편이 될 키무라와 어머니의 정사를 만류하지 않고 되려 적극적으로 도왔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책이 발표될 당시로써는 굉장히 파격적인 결말도 동화 속 이야기의 뒷이야기처럼 그들의 나중의 삶이 어떻게 흘러갔을지 매우 궁금해졌다.

 열쇠는 딱 맞는 자물쇠가 있어야 제 구실을 하고 자물쇠 역시 그에 맞는 열쇠가 있어야 열릴 수 있다. 너무나도 다른 기호를 가진 이들이 부부가 되어 성의 문을 열지 못한 게 비극의 시작이 아닐까 싶다. 남편은 구식열쇠로 맞지 않는 자물쇠(아내)를 열기 위해 스스로를 비극으로 몰아갔고 '키무라'는 신식열쇠로 어쩌면 '토시코'와 아내를 동시에 농락한 만능키였는지 모르겠다. 열쇠는 상당히 많은 것을 상징하는데 남자의 성기 뿐 아니라 인간 내면에 숨겨진 성적 욕망을 열고 싶어한 작가의 의도가 보인다. 비밀을 열기 위해서는 어쨌든 열쇠는 필요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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