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릿 로드 - 여행의 순간을 황홀하게 만드는 한 잔의 술
탁재형 지음 / 시공사 / 2013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처음 술을 마신 건 - 어린 시절 목이 너무 탄 나머지 실수로 보리차인 줄 알고 벌컥벌컥 들이켰던 맥주를 제외하고- 고등학교 3학년 때다. 우습게도 나는 여동생 친구들에게 술을 배웠다. 수능 백일 전이었다. 기념해야 한다는 후배들의 성화에 야자를 땡땡이 쳤다. 나이를 속여 소주를 사려 교복을 벗고 사복으로 갈아입었지만 어른들 눈에는 우리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햇병아리로 보였을 테다. 신분증을 보여 달라는 여러 가게를 거쳐 드디어 술을 어렵게 구했다. 술을 사는 모험을 감행한 우리와 뒤늦게 합류한 후배들은 학교 근처 공원에 있는 언덕 위에 모였다. 안주는 참치 캔과 과자 그리고 마른 오징어가 전부였다. 당시 주량을 모르던 나는 소주 두병 정도를 비웠다. 목구멍을 태우는 듯 한 알코올 향에 어른들은 왜 이런 걸 마시지, 궁금했지만 후배 녀석들에게 낮보이기 싫어서 괜찮은 척 했다. 야자가 끝날 시각, 친구들과 2차로 모일 약속이 있던 나는 학교로 향했다. 비틀거리지만 말자고 다짐하면서 보도 블럭 선을 지팡이 삼아서 걸어갔던 기억만이 희미하게 남아있다. 일층이었던 우리 반 창문에 대롱대롱 매달려 친구들에게 나 좀 끌어올려달라고 조르다가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자 야자 감독을 하는 선생님의 눈을 피해 교실로 잠입했었다. 실장을 껴안고 너는 정말 괜찮은 녀석이라 하고 반 친구들에게 사랑한다고 고백 아닌 술주정을 하다가 감독 선생님이 떴다는 말을 듣자마자 책상 밑에 웅크려 숨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선생님도 뻔히 보았을 테다. 하지만 못 본 척 지나가 주셨다. 철부지인 나는 들키지 않았다고 신나했다. 술이 더 올라오자 집에 가야겠다 싶어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문으로 냅다 뛰는데 뒤통수에서 "야, 김진희. 너 술 마셨지?"하는 친근하게 지냈던 선생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는 김진희가 아니에요."라고 고함을 지르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첫 술을 소주로 시작해서인지 내게 최고의 술은 언제나 소주였다. 맥주는 오히려 더 취하고 배만 불러 화장실을 들락날락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소주는 나의 사랑을 보았고 이별을 위로해줬으며 친구를 만들어 외로움을 달래주기도 했다. 술은 처음 마시기 시작할 때에는 양처럼 온순하고, 조금 더 마시면 사자처럼 사나워지며, 조금 더 마시면 원숭이처럼 춤추고 노래를 부르고, 더 많이 마시면 토하고 뒹굴고 하면서 돼지처럼 추해진다고 옛 어른이 말씀하셨다. 솔직히 맞는 말이긴 하다. 지인과 풍류를 나누는 수단으로 약간의 음주는 마음을 쉽게 터놓게 해주는 역할을 톡톡히 하지만 그 도가 지나치면 사람이 동물이 되는 건 순식간이다. 누구나 고치기 힘든 술버릇은 있겠다. 나의 첫 술버릇은 펑펑 울기였다. 뭐가 그리 서러운지 술만 마시면 내가 너무 불쌍해서 그냥 눈물이 나왔다. 하지만 술에서 깨면 이보다 추한 사람은 없을 거라 자책하며 벽에 머리를 박았다. 나쁜 술버릇을 고치기 위해 정 반대로 신나게 웃기로 결심했다. 손뼉을 치고 세상에 나보다 즐거운 사람이 없는 척 웃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술에 취하면 웃기부터 한다. 웃는 과정을 지나서 술이 더 들어가면 졸음이 몰려온다. 졸음을 참고 술을 더 마시면 잘 때 토할 것 같다고 중얼거리며 침을 뱉는다. 나는 술 먹고 토한 적이 한 번도 없지만 욕지기가 올라와서인지 연신 침을 뱉는다. 과음한 다음날 일어나보면 방과 내 모습은 정말 가관이다. 옷은 아무렇게나 벗어서 여기저기 굴러다니고 화장을 채 지우지 못해 아이라이너가 새까맣게 번져있다. 침대 아래에는 술김에 뱉은 침이 하얗게 굳어있다. 옛 어른들 말씀처럼 돼지처럼 지저분하다. 서른이 지난 후에는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술에 취한 적이 없다. 간의 해독력이 떨어졌는지 소주는 이제 몇 잔만 마셔도 다음날이 힘들다. 그래서 나는 맥주나 와인 한두 잔을 즐겨한다. 극단으로 치달았던 젊음은 사라지고 적당한 선을 아는 나이가 된 것 같아 조금은 씁쓸하지만 뭐, 내 몸은 소중하니까.

  내가 처음 이 책을 접할 때는 어떤 PD가 방송을 핑계로 유유자적 여행을 즐기며 그 나라의 술을 접하고 쓴 배부른 기행록 일거라고 쉽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분 고생을 너무 많이 했다. 본인은 고생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으나 내가 보기에는 몸 상하지 않을까 걱정이 든다. 일명 '오지 전문 프로듀서'인 탁재형PD는 내 생전 들어본 적이 없는 나라에 가서 본 적도 없는 술을 마셨다. 술만 마시면 되지 뭐, 라고 단순히 생각한 나는 반성이 든다. 술을 함께 하기 위해 그 나라 사람들과 어울리고 문화를 이해해야하니 낯가림 심하고 견문이 짧은 사람이라면 절대 못할 일이다. 책에는 모두 26가지의 술이 나온다. 그건 곧 저자가 스물여섯 군데의 여행지를 다녀왔다는 말이다. 러시아의 보드카나 영국의 위스키, 멕시코의 데킬라처럼 귀에 익은 술들도 등장하나 네팔의 넥시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마룰라처럼 생전 듣도 보도 못 한 술들이 더 많이 나온다. 나는 여기 나온 술중에 평생 마셔보지 못할 술도 분명 있을 터이다. 하지만 탁재형님의 맛깔 나는 설명과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숙취를 읽으면 테이블에 마주 앉아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한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술에 관해 썰을 풀기 전에 그 나라 특유의 문화나 사람들의 인심 등등 사회경제역사전반에 걸친 설명을 해준다. 그 후 술의 빚기까지의 역사 그리고 술의 먹기까지의 노고를 양념장이 매콤하게 버무려진 도토리무침처럼 고소하게 비벼나간다. 수단의 와우라는 도시는 금주법이 있다. 이슬람 원리주의 국가라서 술은 금단의 열매로 치부한다고 한다. 예전에 우리나라에서 그랬던 것처럼 여기서도 밀주를 만들어 몰래몰래 마신다고 하는데 에티오피아 출신인 의사 말릭은 코란에는 술 마시고 취하지 말라는 말씀은 있어도 술을 마시지 말라는 말씀은 없다며 탁재형님에게 밀주를 권한다. 술이 변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변했다는 탁재형님의 덧붙임이 가슴에 와 닿았다. 페루의 술, 마사또의 원료는 유까인데 당분이 적어 발효가 어렵다. 당분을 함유하지 않은 전분을 당으로 전환시키는 당화가 필요한데 동양에서는 곰팡이를 이용하고 서양에서는 몰트를 섞어준다고 한다. 그럼 유까로는 어떻게 술을 만들까? 충격적이게도 술을 만드는 사람이 술을 반죽 일부분을 입에 넣어 우물거리고 반죽에 섞는다. 침 성분인 아밀라아제(?)를 이용해서 발효를 시키는 것이다. 이렇듯 세계 곳곳에서 지금도 벌어지는 우리가 모르는 신기하고도 신비한 이야기가 책 속에 가득하다. 비단 술 이야기만 하는 책은 아닌 듯싶다. 챕터 말미에는 당시에 찍은 술과 사람들 사진이 나오는데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아, 나도 나만의 스피릿 로드를 떠나고 싶다. 내 발목을 붙들고 늘어지는 현실을 내려다보니 입 안이 쓰다. 달콤한 모스카토나 한잔 해야겠다. 내세울 건 없겠지만 나만의 스피릿 로드를 찾아 만들어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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