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매가 돌아왔다
김범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이 제게 왔을 때 저는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라는 소설을 읽고있던 중이었어요. '화차'라는 영화를 본 후에 원작이 궁금해서 백여페이지를 읽고 있던 차였습니다. 영화를 본 후에 내용을 어느 정도 알고 있음에도 그 어두움에 사로잡힐 것 같았습니다. 아, 뭔가 유쾌한 에너지가 필요해. 음울함에 사로잡혔는데도 쉽게 책을 놓지 못할 때 '할매가 돌아왔다.'가 도착했습니다. 저는 구원을 받은 듯 '화차'에게서 도망쳤어요. '화차'가 재미없다거나 나쁜 소설이라는 건 아니에요. 장마라 계속 되는 비와 어두운 하늘에 읽는 책마저 아직 채 마르지 않아 끈끈한 검붉은 피처럼 질척거려 마음을 어둡게 만들었어요. 후에 화차도 서평을 남길 테니 화차는 그때 자세한 이야기를 풀어볼게요.

  처음 '할매가 돌아왔다'라는 제목을 보았을 때 김영하 소설 '오빠가 돌아왔다'가 떠올랐어요. 오빠든 할매든 떠난 이유와 돌아오지 못한 이유, 그러다 다시 돌아온 이유가 있을 거예요. 그리고 그들이 돌아왔을 때 남겨졌던 이들의 반응이 있겠죠. 모든 사람들의 사정이 궁금했어요. 소설 속 할매의 말씀이 생각나요.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겠니. 액션 영화에서 쉽게 죽는 엑스트라도 나름 사연을 안고 삶을 살아갔을 거예요. 찰나의 선택이 지금 우리와 주변 세계를 만들었겠죠. 어떤 선택을 하고 있나요? 후회는 없나요? 스스로에게 되물어봤습니다. 당신은 어떤 사연을 갖고 살아가고 있나요?

  67년 전에 일본군인하고 눈이 맞아 가족을 버린 할매. 이 한 문장의 내용만으로도 그녀를 쉽게 용서 하긴 힘들어요. 왜냐하면 할매는 나라와 가족을 둘 다 버린 거나 마찬가지니까요. 저도 단편적인 정보만 알고 있을 때 그리 생각했어요. 엄마가 그렇게 우리를 버리고 갔다면, 그 긴 세월동안의 원망이 고작 60억 가지고 녹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엄마의 어떤 변명도 듣고 싶지 않아요. 그 시간동안 우리를 찾지 않았던 건 버림 받았다는 사실의 뼈저린 반증이라고 생각할 테니까요. 67년 동안 쌓였던 자식들의 원망을 알기에 할매는 60억이라는 패를 꺼내서 자식들이 자기의 말을 들어주길 바란 건지도 모르겠어요.

  책의 화자는 할매의 손자인 동석, 나입니다. 제일 친한 친구에게 가슴이 동한, 사랑하는 애인을 빼앗기고도 그 친구에게 술을 얻어먹는, 정신연령이 낮은 벌레 같은 실업자라고 스스로를 비하하는 동석입니다. 종이접기가 취미인 동석이는 할매 역시 종이접기의 달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혈육임을 뜨겁게 느끼게 되어요. 종이접기로 통했다니 뜬금없기도 하지만 종이접기로 할매는 놓쳐버린 자식에 대한 그리움을 삭힐 수 있었고 어느 것에 의욕이 없던 동석이는 종이접기가 유일하게 즐거워하는 쉼터이기도 했습니다. 서로 좋아하는 취미가 같다니, 67년의 세월이 무색하게 조손의 마음이 잘 맞았겠죠.

  가슴이 동하는 사랑이라는 말이 참 마음에 들었어요. 할매의 사랑은 이제껏 세분이었답니다. 동석의 친할아버지인 짝불이 최종태, 할매에게 홍련을 닮았다는 말을 하고 들꽃을 선물해서 할매의 마음을 훔친 후지오카, 할매의 모든 상처를 감싸 안고 치유해준 스티브. 하지만 마음이 동한 사랑은 짝불이 할아버지뿐이었대요. 두 분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과  할아버지의 오해를 풀고 가슴이 동했던 이를 마지막으로 보고 싶어서 할매는 용기를 내어 돌아왔나 봅니다. 가슴이 말랑하고 간질간질해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랑. 손끝만 스쳐도 얼굴이 달아오르고 첫눈에 반했던 순간이 슬로우 모션으로 머릿속을 스쳐지나가 그 주위 풍경마저 잊히지 않는 그런 사랑. 할매는 어떻게 그 긴 시간 동안 젊은 시절 사랑에 빠졌던 그 찰나의 순간을 잊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어째서 짝불이는 그 순간을 잊고 할매를 믿지 못했던 걸까요. 사랑은 착각에서 오고 이별을 오해에서 오는 법이죠. 

  사랑의 비극은 사람이 변하는 데 있겠지요. 사랑의 당사자 중 어느 한쪽만 변하는 게 둘 다 변하는 것보다 더 아프다고 생각해요. 할매는 혼자만 그대로인 사랑이, 변해가는 사람이 눈물 겹지는 않았을까요. 작은 오해로 인해 어쩌면 인생이 뒤틀린 할매가 스티브를 만난 건 천운이었다고 생각해요. 마음의 간지럽고 동하는 사랑이 무슨 소용인가요. 순간의 설렘만 있고 쉽게 변하는 사랑보다는 한결같고 편안한 사랑이 좋은 지금이에요. 그런 사람이 드물기에 더 값지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할매는 엉킨 실타래를 풀고 싶었을 거예요. 서두에 '세월이 한 100년 흐르고 나도 죽고 나면 할머니의 모진 인생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 진실이란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라고 써있지만 그 진실이야말로 할매 평생의 한을 푸는 열쇠였다고 생각해요. 오해로 사랑이 어긋난 적이 있나요? 사소한 오해가 67년간의 이별을 만들었다니 서글퍼지기도 하네요. 후에 저도 나이가 들어 오해로 틀어진 인연에게 왜 그랬냐고 물을 수 있을 지 모르겠어요.

  시시콜콜 동석이와 동주(동석이 동생) 그리고 그 가족에 대한 이야기는 늘어놓지 않겠어요. 할매가 60억이 있나 없나도 밝히지 않겠어요. 사랑이든 돈이든 복수든 모든 집착을 조금씩 내려놓는 그들의 모습이 소설 끝까지 유쾌하게 그려집니다. 궁금하지 않으세요? 할매가 어떻게 되었을지, 동석이는 잘지내는 지 말이에요- 어떻게 보면 구질구질한 우리의 모습일지도 모르는 현실을 '나'라는 화자를 통해 능청스럽고도 유쾌하게 그려 낸, 코끝이 찡한 할매의 추억과 인생의 조언을 듣고 싶으면 한번 책장을 넘겨보세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할매, 바람 피워놓고 60억으로 효도를 사려고하는 이상한 할망구, 차림도 정말 싫어하는 스타일이라서 처음에는 미워했는데 잘 알지도 모르면서 오해해서 정말 죄송해요. 길을 걸을 때 지나치는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할머니들도 아름다웠던 젊은 시절과 사랑이 있었게죠. 저도 세월이 지나서 나이가 들 텐데 뒷방 늙은이 취급만 해서 죄송해요, 할매. 아름다웠던 그 시절만큼 지금도 아름다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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