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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볼 (양장)
박소영 지음 / 창비 / 2020년 10월
평점 :
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행지에서 그 곳을 추억하고 기념하기 위해 구매하는 작은 사치품, 스노우볼.
나의 현재가 어떻던지, 어둡고 춥더라도 스노우볼 속은 작가의 동화의 세상이 유지된다.
어여쁜 유니콘이 수영하고 은은한 멜로디가 흘러나오는 스노우볼을 구매해서 물끄러미 바라보다 손에서 미끄러져 산산히 깨어진 적이 있었다.
순식간에 생긴 일이었는데, '스노볼'에서 말하는 '스노우볼'은 그것보단 더, 훨씬 더 견고하게 그려진다.
살인을 해서라도, 유전자를 조작해서라도, 이 세계를 유지시키고자, 이 세계에서 살아남고자 또한 이 세계를 소망으로 삼고자 하는 많은 이들의 욕망때문에.
이 소설은 생각보다 더 현실을 담고 있다.
기후위기로 모두 황폐해져버린 세상 속에서도 유토피아를 바라는 사람들과 그러한 사람들의 마음을 소재로 이 세상을 이끄는 거대 언론과 자본.
불공정한 걸 알면서도, 불평등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태어날 때 부터, 처음부터 그러했던 것 처럼 순응해서 살아가는 사람들.
다수가 만들어내는 방향에 생각없이, 하릴없이 이끌려 가는 사람들.
온기가 남아 있지 않은 땅에서 마침내 발견하는 인간.
독특하면서도 현실이 엿보이는 매력적인 세계관과 캐릭터들.
절정 이후에 급격한 마무리가 아쉽지만 단언컨데 단숨에 읽을 매력적인 이야기다.
전체 속 개인의 개인다움이 인상적인 장르 소설.
*창비에서 책을 제공받았습니다.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0/1108/pimg_7639722082725348.jpg)
지금껏 그 어떤 디렉터도 선보인 적 없는 놀라운 드라마를 만들어 내는 일이 중요할 뿐, 디렉터가 되는 게 몇 년 늦어지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라고 나는 믿고 있다. 믿어야만 한다. 그 희망마저 없다면, 모두가 똑같이 허름한 집에서 살면서 똑같은 학교를 다니고 똑같은 발전소에서 똑같은 일을 하는 이 관성적인 삶을 하루도 더 버틸 수 없을 테니까. - P26
그러자 심장이 빠르게 뛰면서 쳇바퀴를 돌리는 두 다리에 힘이 솟는다. 나와 타인의 삶이 딱히 구별되지 않는 이 쳇바퀴 무덤을 떠나, 오직 나만이 연출할 수 있는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는 스노볼을 향해 나는 부지런히 달린다. 쳇바퀴는 단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지만, 내 마음은 부쩍 스노볼에 가까워진다. - P32
누가 올라타든 상관없이 빙빙 돌아가는 쳇바퀴의 삶이 아니라, 나만이 완성할 수 있는 인생이었다. 오로지 나만이, 해리의 마지막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었다. - P64
당연한 얘기지만, 스노볼에서 제작하는 드라마에 이본가 사람은 출연하지 않는다. 이본 미디어 그룹은 지금의 스노볼 시스템을 만든 재건 가문으로서 이 시스템을 유지하고, 액터와 디렉터를 보조하면서 자신들의 역할을 다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전력을 생산하거나 사생활을 공유하라는 시민의 기본 의무가 일절 주어지지 않는다. - P111
내가 힘든 건 나 때문이다. 나는 이 일의 밝은 면만 보고 싶어한다. 내가 해리의 해피 엔딩을 만들어 주고 있다고, 내 덕분에 수많은 사람들이 해리를 잃는 슬픔을 피해 갈 수 있게 됐다고, 그렇게만 생각하고 싶은 거지. 이 일의 어두운 이면 따위는 알고 싶지도, 보고 싶지도 않은 거다. 그래야만, 꿈을 이룬 뒤에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테니까. - P164
"나 역시, 너희를 이용하는 또 다른 어른이 될까 봐 겁이 나." 스스로를 의심하는 차향의 고백에는 진실된 울림이 있다. "어른이라는 작자들이 말하는 옳고 그름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무엇이든 너희가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게 중요해. 왜냐면, 차설조차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니까. 자신이 너희에게,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액터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해 줬다고 믿는 인간이니까." - P382
‘나‘에 대한 편집권이 타인에게 넘어간 미래. 사생호라을 전부 내보여야만 잘 먹고 잘살 수 있는 시스템. 혹독하리만치 추운 바깥세상과 축복받은 스노볼로 이분화된 세상. -작가의 말 중에서- - P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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