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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말하고 있잖아 오늘의 젊은 작가 28
정용준 지음 / 민음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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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선 듯 예민한 심리모사에 촘촘하게 두근거리다 크게 울머깅고 마는 소중한 작품.

어찌 이리도 꼼꼼히 위로해주는지.

참으로 예쁘고 소중한 소설.

나는 잘해 주면 사랑에 빠지는 사람이다. 누군가 한 손을 내밀어 주면 두 손을 내밀고, 껴안아 주면 스스로 녹아 버리는 눈사람이다. - P7

쉽게 내 속으로 들어오고 싶어 하는 어른들의 위선적인 눈을 안다. 알게 된 걸로 잘해 주려는 어른은 거의 없다. 알아서 더 잔인하고 알아서 더 괴롭히는 어른들만 있을 뿐. - P10

수업이 끝나고 둥글게 모여 앉아 돌아가며 이야기를 했다. 그러니까 여긴 고장 난 사람들만 모아 둔 창고 같은 곳일까? - P15

하늘 끝까지 헹가래질하다가 마지막에 받아 주지 않을 거잖아. 웃게 만든 다음 울게 만들 거잖아. 줬다가 뺏을 거잖아. 내일이면 모른 척할 거잖아. 이해하는 척하면서 정작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잖아. 말뿐이잖아. 결국 다 그렇잖아. 그러니까 당하면 안 된다. 그땐 진짜 끝나는 거야. 끝. - P21

아직도 무슨 길 잃은 아이 쳐다보듯 불쌍하게 바라보는 회원들 시선은 짜증 났지만 그래도 너나 할 것 없이 다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어서 신경이 덜 쓰였다. - P30

엄마는 끔찍한 일을 하면서 동시에 그 일을 못 하게 될까 봐 매일 걱정하며 산다. 집에 들어오면 엄마는 다른 사람으로 변한다. 표정을 벗고 목소리도 벗고 그저 술만 마신다. 약을 먹고 초저녁부터 잠을 잔다. 때론 약을 먹고 술을 마시고 내게 욕하기도 한다. 아들의 이름 대신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의 이름으로 나를 부르고 소리를 지른다. 그러다 마지막엔 미안하다 말하고 울며 사과하고 끌어않고 흐느낀다. - P41

정말로 하늘이 쓰레기를 데려가 버렸으면 좋겠다. 국어도 그렇고, 재능 없는 가수 지망생도 그렇고, 죽여야 할 어른들이 왜 이렇게 많은 걸까? 사는 게 너무 번거롭다. - P62

나는 속으로 그것들을 하나씩 읽어 봤다. 마음의 세계에서는 막힘이 없다. - P66

남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걸 누군가는 필사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슬프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 P68

정리도 못 할 정도로 무차별적으로 떠오르는 생각과 이미지들을 어떻게든 사라지게 해야 했다. - P69

왜 사는지 모르겠는 날. 그냥 살고 있는 것뿐인데 엄청 살려고 발버둥 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날엔 차라리 내가 먹고 싶기도 하다. - P101

왜 사는 걸까. 생각하고 또 해 봐도 살 이유를 찾지 못했다. 죽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죽고 싶지 않은 이유도 찾을 수 없었다. 살아갈 이유도 없는데 살고 싶은 죽고 싶지 않은 이유도 없는데 죽고 싶지 않다니. 왜 나는 이유 없이 이렇게 사는 걸까? - P101

앞이 깜깜해져 기절을 해 버린다고. 나도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정신을 잃고 쓰러져 지금 이 순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소리는 너무 잘 들렸고 낯선 이들의 표정은 사진을 찍듯 하나하나 눈에 들어왔다. 놀림거리로 살아온 사람은 알 것이다. 놀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들린다. 비웃는 표정이 보이지 않아도 보인다. 그것은 기억에 새겨져 반복 재생되는 비디오 같다. - P105

악을 쓰며 울고 싶은 기분. 토할 것 같은 기분. 아무것도 참고 싶지 않은 뜨거운 기운이 손가락 끝까지 퍼져 나갔다. 나는 더 이상 이런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 P107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생각했다. 나는 오래전에 죽어 무덤 속에 누운 사람이다.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다. 아무 말도 들을 수 없다. 일어날 수도 없다. - P110

눈이 많이 내리는 날 창문으로 하늘을 봤다. 눈구름이 까맣게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눈이 더 많이 내렸으면, 그래서 세상이 모두 하얗게 변했으면, 그렇게 같은 날 같은 시간 모두 질식사했으면 좋겠다. 배가 고프면 배가 고파 죽었으면 싶었고 목이 마르면 목이 말라 죽었으면 싶었다. - P110

경험상 누군가의 이야기를 오래 들어 주면 좋지 않다. 누구든 어떤 이야기든 오래 들으면 결국 다 힘들고 어려운 사정을 듣게 된다. 알게 되면 아는 만큼 마음이 생기고 그 마음만큼 괴로워진다. 그 사람을 걱정하게 되고 그 사람을 생각하게 되고 경우에 따라선 사랑하게 되고 반대로 미워하게 된다. - P126

하나도 잊지 않을 거다. 어떤 기억도 희미해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거다. 때문에 써야 했다. 기록해야 했다. 그것들은 콸콸 쏟아지는 물 같아서 도저히 작은 두 손과 평평한 종이에 담아 내려면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그렇게 하려니 한 장면 한 기억을 쓸 때 시간이 오래 걸렸다. 상관없었다. 밤은 길고 잠도 안 오고 무엇보다 나는 무슨 말이든 하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으니까. - 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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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기쁨 - 책 읽고 싶어지는 책
김겨울 지음 / 초록비책공방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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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튜버 김겨울님의 첫 작품, 독서의 기쁨.


책을 친구처럼 여기며 책과 함께 하는 시간을 즐기며 마침내 책을 내고야 마는 작가의 모습에서 각자의 모습을 발견하며 즐거워 한다.


이러한 책이 어찌 기쁘지 아니한가.

독서는 돈도 비교적 적게 들고, 드는 돈에 비해 누릴 수 있는 유희의 크기가 크며, 질이 높다. 물론 책이 제공하는 유희를 온전히 즐기기 까지는 어느 정도의 훈련이 필요하지만, 일단 그 허들을 넘기면 그 뒤로는 죽을 때까지 배신하지 않는 재미를 보장한다. 죽을 때까지 세상의 모든 책을 다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자원이 풍부하기까지 하다. 오히려 읽으면 읽을수록 읽은 책이 늘어나는 마법을 경험할 수 있다. - P55

모든 진리는 그 시대의 자녀 Veritas, filia temporis다. 역사를 달달 외우고 있을 필요는 없지만, 책에서 다루는 주제의 시대가 언제인지 파악하면 더욱 풍요로운 독서가 가능하다. - P87

중요한 건 책이 나의 피와 살이라는 것이고, 인생의 삼할 정도는 책장을 넘기는 데에 썼다는 것이다. 이할 정도는 책장을 넘길 책을 살 돈을 버는 데에 썼다. 나머지 오할은 막연하고 불확실한 인생 속에서 몇 권 안 되는 책을 안고 비틀거리는 데에 썼다. 이 책도 비틀거림의 일환이다. 좀 비틀거리더라도 이해해주시면 좋겠다. 먹고 살기 힘든 세상이라 다리에 힘이 좀 없다. - P116

물론 책을 많이 읽으면 대체로 좋다고 생각한다. 이런 친구 많이 둬서 나쁠 건 없지 않은가. - P161

평생 도서관 속을 헤메다 결국 그 안에서 아무런 진리도 얻지 못한 채 삶을 마감하는 것. 무한한 책에 둘러싸여 세계의 미스터리를 궁금해 하는 것. 그 궁금함으로 사람들과 마주치고, 싸우고, 신호를 전해 듣고, 책을 읽는 것. 그것이 인간만이 누릴 수 있는 무지의 기쁨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 P218

내가 구성할 수 있는 세계와 개미가 구성하는 세계, 박쥐가 구성하는 세계의 모습은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 P225

우리는 책을 즐기며 앞으로 가자. - P2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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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셜리 클럽 오늘의 젊은 작가 29
박서련 지음 / 민음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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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해도, 어디에 있더라도, 누구와 함께라도,

아름다웠던 젊은 날을 회상케 할 선물같은 소설.


설명하기 어려운 기쁨으로 마음이 출렁거렸기에 구경꾼들과 퍼레이드 참가자들 사이를 가르고 있는 간이 펜스를 넘어가 처음부터 더 셜리 클럽의 일원이었던 것처럼 함께 걷고 싶었다. 진심으로 그들과 친구가 되고 싶었기에 겨우 참을 수 있었다. - P27

사실 난 이제 사랑에 빠질 준비가 된 것 같아, 라는 생각은 아무도 안 하잖아요. 사랑에 빠지는 데에는 아무 준비도 필요 없으니까. 생각은 사랑에 빠진 다음에 해도 충분하니까. - P31

근데 세탁기 돌릴 때마다 코끝이 찡해지는 거 있죠. 얘는 나보다 훨씬 무거울 테고 스스로 입국 수속도 할 줄 모를 테니까 엄청 힘들게 여기까지 왔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그런데 왔구나. 여기에 있구나. 열심히 하고 있구나. - P40

아, 서양 철학사를 너무 공부하고 싶다, 가 아니라 ‘서양 철학사를 공부하고 싶은 나’가 되고 싶다, 그런 마음에 가까웠으니까. 그 둘은 언뜻 비슷해 보이지만 사실은 전혀 비슷한 마음이 아니거든요. - P44

나는 언제나 내 잘못을 더 크게 느끼곤 했다. - P77

S와 더 같이 있고 싶었지만 품위를 지키고 싶은 마음도 컸다. 얼른 집으로 돌아가 씻고 싶었다. 곧 떠나야 할 마당에 집, 이라고 부르자니 약간은 서먹한 느낌도 들지만 어쨌든 집은 집이니까. - P127

네가 찾고 있는 사람도 혼혈이라고 했지. 여러 문화적 배경을 지닌 사람들은 그 문화적 배경에서보다 그들을 사랑해 주는 사람들 안에서 정체성을 찾게 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해. 우리는 우리가 사랑하고 우리를 사랑해 주는 사람들 안에서 우리가 된다.
네가 찾고 있는 사람에게 네가 주는 사랑이 그 사람을 완성해 줄 거다.
건강해야 한다. - P199

얼굴조차 생각나지 않는 사람들의 지나간 선의가 나를 울리는 것은, 그것이 상기하고 싶지 않았던 나의 무능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내가 아주 약한 사람이라는 것을 극미량의 사랑으로도 깨달을 수 있다. 매번 그렇게 된다. - P219

여행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 말이 좋아 여행이지 실은 떠돌이 개처럼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해 이리저리 헤매고 다니던 고독의 나날이었다. 언제쯤이면 확실한 내 자리를 찾게 될까? 그날이 오면 정말 꿈꾸던 내가 될 수 있을까? -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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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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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작품성, 예술성 평가는 뒤로 차치하고서라도 읽을 만한 이유와 목적이 있는 시대를 살고 있지 않은가.

사실 어린 김지영 씨는 동생이 특별 대우를 받는다거나 그래서 부럽다는 생각을 하지도 못했다. 원래 그랬으니까. 가끔 뭔가 억울하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었지만 자신이 누나니까 양보하는 거고, 성별이 같은 언니와 물건을 공유하는 거라고 자발적으로 상황을 합리화하는 데에 익숙했다. 어머니는 터울이 져서 그런지 누나들이 샘도 없고, 동생을 잘 돌봐 준다고 항상 칭찬했는데, 자꾸 칭찬을 받으니까 샘을 낼 수도 없었다. - P25

큰외삼촌은 지역의 국립 의대를 나와 모교 대학 병원에서 평생 일했고, 작은 외삼촌은 경찰서장으로 은퇴했다. 어머니는 오빠들이 성실하고 반듯하고 공부를 잘하는 게 뿌듯하고 보람 있었다. 공장의 친구들에게도 자랑을 많이 했는데, 그 자랑스러운 오빠들이 경제력을 갖게 되자 막내 외삼촌을 뒷바라지했다. 덕분에 막내 외삼촌은 서울에 있는 사범대학을 다닐 수 있었고, 큰외삼촌은 집안을 일으키고 가족을 부양한 책임감 있는 장남이라고 칭찬받았다. 그제야 어머니와 이모는 사랑하는 가족의 울타리 안에서는 자신들에게 기회가 오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두 사람은 뒤늦게 산업체 부설학교에 다니며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해 중학교 졸업장을 받았다. 어머니는 또 검정고시 공부를 했다. 막내 외삼촌이 고등학교 교사가 되던 해에 어머니는 고졸이 되었다. - P35

어머니는 자신의 인생을, 김지영 씨의 어머니가 된 일을, 후회하고 있었다. 길게 늘어진 치맛자락 끝을 꾹 밟고 선 작지만 묵직하고 굳건한 돌덩이. 김지영 씨는 그런 돌덩이가 된 기분이었고 왠지 슬펐다. 어머니는 김지영 씨의 마음을 알아채고는 너저분하게 흐트러진 딸의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다정하게 넘겨 주었다. - P36

짝꿍이 나를 좋아한다고? 괴롭히는 게 좋아한다는 뜻이라고? 김지영 씨는 혼란스러웠다. 그동안 있었던 일들ㅇ르 빠르게 되짚어 봤지만 아무래도 선생님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좋아한다면 더 다정하고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 친구에게도, 가족에게도,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나 고양이에게도 그래야 하는 거다. 그게 여덟 살 김지영 씨도 알고 있는 상식이다. 그 아이의 괴롭힘 때문에 학교생활이 너무 힘들었다. 그리고 이제껏 당해 온 것도 억울한데, 친구를 오해하는 나쁜 아이가 되기까지 했다. 김지영 씨는 고개를 저었다.
"싫어요, 너무너무 싫어요." - P41

"그리고 내가 결혼을 할지 안 할지, 애를 낳을지 안 낳을지도 모르는데, 아니, 그 전에 죽을지도 모르는데, 왜 일어날지 안 일어날지 모르는 미래의 일에 대비하느라 지금 하고 싶은 걸 못하고 살아야 해?" - P72

"여자가 너무 똑똑하면 회사에서도 부담스러워 해. 지금도 봐, 학생이 얼마나 부담스러운 줄 알아?"
어쩌라고? 부족하면 부족해서 안 되고, 잘나면 잘나서 안 되고, 그 가운데면 또 어중간해서 안 된다고 하려나? 싸움이 의미 없다고 생각한 선배는 항의를 멈추었고, 연말에 치러진 공채에 합격했다. - P97

배려라고 생각하며 아무렇지도 않게 무례를 저지르는 사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항의를 해야 할지도 가늠이 되지 않았고, 괜한 말싸움을 하기도 싫어 김지영 씨는 그냥 눈을 감아 버렸다. - P100

"너 회사 잘 다니네 해 달라고, 덜 힘들고, 덜 속상하고, 덜 지치면서, 사회생활 잘하고, 무사히 월급 받아서 나 맛있는 거 많이 사 달라고."
김지영 씨는 가슴속에 눈송이들이 성기게 가득 들어차는 느낌이었다. 충만한데 헛헛하고 포근한데 서늘하다. 남자 친구의 말처럼 덜 힘들고, 덜 속상하고, 덜 지치면서, 어머니의 말처럼 막 나대면서 잘 해내야겠다고 생각했다. - P109

할머니는 어머니가 미용 일을 하러 나간 동안 잠깐씩 막내를 봐주셨을 뿐 삼 남매를 먹이고, 씻기고, 재우는 등의 돌봄 노동은 전혀 하지 않으셨다. 다른 집안일도 거의 안 하셨다. 어머니가 차린 밥을 드시고, 어머니가 빨아 놓은 옷을 입고, 어머니가 청소한 방에서 주무셨다. 하지만 아무도 어머니에게 좋은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다. - P111

김지영 씨는 미로 한가운데 선 기분이었다. 성실하고 차분하게 출구를 찾고 있는데 애초부터 출구가 없었다고 한다. 망연히 주저앉으니 더 노력해야 한다고, 안 되면 벽이라도 뚫어야 한다고 한다. 사업가의 목표는 결국 돈을 버는 것이고, 최소 투자로 최대 이익을 내겠다는 대표를 비난할 수는 없다. 하지만 당장 눈에 보이는 효율과 합리만을 내세우는 게 과연 공정한 걸까. 공정하지 않은 세상에는 결국 무엇이 남을까. 남은 이들은 행복할까. - P123

정대현 씨는 마치 노르웨이산 고등어를 사자, 라든가 클림트의 ‘키스’ 퍼즐 액자를 걸자, 같은 말을 하는 것처럼 큰 고민 없이 가볍게 말했다. 적어도 김지영 씨에게는 그렇게 들렸다. 구체적인 가족계획이라든가 출산 시기를 얘기해 본 적은 없지만 정대현 씨도 김지영 씨도 결혼을 하면 당연히 아이를 낳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고, 정대현 씨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김지영 씨는 그렇게 쉽게 결정할 수가 없었다. - P135

"잃는 것만 생각하지 말라며. 나는 지금의 젊음도, 건강도, 직장, 동료, 친구 같은 사회적 네트워크도, 계획도, 미래도 다 잃을지 몰라. 그래서 자꾸 잃는 걸 생각하게 돼. 근데 오빠는 뭘 잃게 돼?"
"나, 나도.... 나도 지금 같지는 않겠지. 아무래도 집에 일찍 와야 하니까 친구들도 잘 못 만날 거고. 회식이나 야근도 편하게 못할 거고. 일하고 와서 또 집안일 도우려면 피곤할거고. 그리고 그, 너랑 우리 애랑, 가장으로서... 그래, 부양! 부양하려면 책임감도 엄청 클 거고." - P136

김지영 씨는 정대현 씨의 말을 감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고 노력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자신의 인생이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뒤집힐지 모르는 데에 비하면 남편이 열거한 것들은 너무 사소하게 느껴졌다.
"그렇겠네. 오빠도 힘들겠다. 근데 나 오빠가 돈 벌어 오라고 해서 회사 다니는 건 아니야. 재밌고 좋아서 다녀. 일도, 돈 버는 것도."
안 그러려고 했는데 억울하고 손해 보는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 P137

주어진 권리와 혜택을 잘 챙기면 날로 먹는 사람이 되고, 날로 먹지 않으려 악착같이 일하면 비슷한 처지에 놓인 동료들을 힘들게 만드는 딜레마. - P139

사실 김은실 팀장도 두렵고 지쳐 있었다. 김은실 팀장도, 강혜수 씨도, 함께 고민하고 있는 피해자들 모두 일이 빨리 마무리되어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가해자들이 작은 것 하나라도 잃을까 전전긍긍하는 동안 피해자들은 모든 것을 잃을 각오를 해야 했다. - P156

일반적으로 소설의 주인공은 독특하다. 독특한 주인공이 얼마나 설득력 있는 삶을 사는지가 소설의 흥미를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82년생 김지영’의 주인공은 익숙하다. 특수성이 아니라 보편성을 추구하는 것이 이 소설의 특수성이다. - P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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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볼 (양장)
박소영 지음 / 창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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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행지에서 그 곳을 추억하고 기념하기 위해 구매하는 작은 사치품, 스노우볼.

나의 현재가 어떻던지, 어둡고 춥더라도 스노우볼 속은 작가의 동화의 세상이 유지된다.


어여쁜 유니콘이 수영하고 은은한 멜로디가 흘러나오는 스노우볼을 구매해서 물끄러미 바라보다 손에서 미끄러져 산산히 깨어진 적이 있었다. 

순식간에 생긴 일이었는데, '스노볼'에서 말하는 '스노우볼'은 그것보단 더, 훨씬 더 견고하게 그려진다.

살인을 해서라도, 유전자를 조작해서라도, 이 세계를 유지시키고자, 이 세계에서 살아남고자 또한 이 세계를 소망으로 삼고자 하는 많은 이들의 욕망때문에.


이 소설은 생각보다 더 현실을 담고 있다.

기후위기로 모두 황폐해져버린 세상 속에서도 유토피아를 바라는 사람들과 그러한 사람들의 마음을 소재로 이 세상을 이끄는 거대 언론과 자본.

불공정한 걸 알면서도, 불평등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태어날 때 부터, 처음부터 그러했던 것 처럼 순응해서 살아가는 사람들.

다수가 만들어내는 방향에 생각없이, 하릴없이 이끌려 가는 사람들.


온기가 남아 있지 않은 땅에서 마침내 발견하는 인간.


독특하면서도 현실이 엿보이는 매력적인 세계관과 캐릭터들.

절정 이후에 급격한 마무리가 아쉽지만 단언컨데 단숨에 읽을 매력적인 이야기다.

전체 속 개인의 개인다움이 인상적인 장르 소설.


*창비에서 책을 제공받았습니다.


지금껏 그 어떤 디렉터도 선보인 적 없는 놀라운 드라마를 만들어 내는 일이 중요할 뿐, 디렉터가 되는 게 몇 년 늦어지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라고 나는 믿고 있다. 믿어야만 한다. 그 희망마저 없다면, 모두가 똑같이 허름한 집에서 살면서 똑같은 학교를 다니고 똑같은 발전소에서 똑같은 일을 하는 이 관성적인 삶을 하루도 더 버틸 수 없을 테니까. - P26

그러자 심장이 빠르게 뛰면서 쳇바퀴를 돌리는 두 다리에 힘이 솟는다. 나와 타인의 삶이 딱히 구별되지 않는 이 쳇바퀴 무덤을 떠나, 오직 나만이 연출할 수 있는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는 스노볼을 향해 나는 부지런히 달린다. 쳇바퀴는 단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지만, 내 마음은 부쩍 스노볼에 가까워진다. - P32

누가 올라타든 상관없이 빙빙 돌아가는 쳇바퀴의 삶이 아니라, 나만이 완성할 수 있는 인생이었다. 오로지 나만이, 해리의 마지막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었다. - P64

당연한 얘기지만, 스노볼에서 제작하는 드라마에 이본가 사람은 출연하지 않는다. 이본 미디어 그룹은 지금의 스노볼 시스템을 만든 재건 가문으로서 이 시스템을 유지하고, 액터와 디렉터를 보조하면서 자신들의 역할을 다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전력을 생산하거나 사생활을 공유하라는 시민의 기본 의무가 일절 주어지지 않는다. - P111

내가 힘든 건 나 때문이다. 나는 이 일의 밝은 면만 보고 싶어한다. 내가 해리의 해피 엔딩을 만들어 주고 있다고, 내 덕분에 수많은 사람들이 해리를 잃는 슬픔을 피해 갈 수 있게 됐다고, 그렇게만 생각하고 싶은 거지. 이 일의 어두운 이면 따위는 알고 싶지도, 보고 싶지도 않은 거다. 그래야만, 꿈을 이룬 뒤에도 아무런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테니까. - P164

"나 역시, 너희를 이용하는 또 다른 어른이 될까 봐 겁이 나."
스스로를 의심하는 차향의 고백에는 진실된 울림이 있다.
"어른이라는 작자들이 말하는 옳고 그름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 무엇이든 너희가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게 중요해. 왜냐면, 차설조차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니까. 자신이 너희에게,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액터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해 줬다고 믿는 인간이니까." - P382

‘나‘에 대한 편집권이 타인에게 넘어간 미래. 사생호라을 전부 내보여야만 잘 먹고 잘살 수 있는 시스템. 혹독하리만치 추운 바깥세상과 축복받은 스노볼로 이분화된 세상.
-작가의 말 중에서- - P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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