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말하고 있잖아 오늘의 젊은 작가 28
정용준 지음 / 민음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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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선 듯 예민한 심리모사에 촘촘하게 두근거리다 크게 울머깅고 마는 소중한 작품.

어찌 이리도 꼼꼼히 위로해주는지.

참으로 예쁘고 소중한 소설.

나는 잘해 주면 사랑에 빠지는 사람이다. 누군가 한 손을 내밀어 주면 두 손을 내밀고, 껴안아 주면 스스로 녹아 버리는 눈사람이다. - P7

쉽게 내 속으로 들어오고 싶어 하는 어른들의 위선적인 눈을 안다. 알게 된 걸로 잘해 주려는 어른은 거의 없다. 알아서 더 잔인하고 알아서 더 괴롭히는 어른들만 있을 뿐. - P10

수업이 끝나고 둥글게 모여 앉아 돌아가며 이야기를 했다. 그러니까 여긴 고장 난 사람들만 모아 둔 창고 같은 곳일까? - P15

하늘 끝까지 헹가래질하다가 마지막에 받아 주지 않을 거잖아. 웃게 만든 다음 울게 만들 거잖아. 줬다가 뺏을 거잖아. 내일이면 모른 척할 거잖아. 이해하는 척하면서 정작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잖아. 말뿐이잖아. 결국 다 그렇잖아. 그러니까 당하면 안 된다. 그땐 진짜 끝나는 거야. 끝. - P21

아직도 무슨 길 잃은 아이 쳐다보듯 불쌍하게 바라보는 회원들 시선은 짜증 났지만 그래도 너나 할 것 없이 다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어서 신경이 덜 쓰였다. - P30

엄마는 끔찍한 일을 하면서 동시에 그 일을 못 하게 될까 봐 매일 걱정하며 산다. 집에 들어오면 엄마는 다른 사람으로 변한다. 표정을 벗고 목소리도 벗고 그저 술만 마신다. 약을 먹고 초저녁부터 잠을 잔다. 때론 약을 먹고 술을 마시고 내게 욕하기도 한다. 아들의 이름 대신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의 이름으로 나를 부르고 소리를 지른다. 그러다 마지막엔 미안하다 말하고 울며 사과하고 끌어않고 흐느낀다. - P41

정말로 하늘이 쓰레기를 데려가 버렸으면 좋겠다. 국어도 그렇고, 재능 없는 가수 지망생도 그렇고, 죽여야 할 어른들이 왜 이렇게 많은 걸까? 사는 게 너무 번거롭다. - P62

나는 속으로 그것들을 하나씩 읽어 봤다. 마음의 세계에서는 막힘이 없다. - P66

남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는 걸 누군가는 필사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슬프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했다. - P68

정리도 못 할 정도로 무차별적으로 떠오르는 생각과 이미지들을 어떻게든 사라지게 해야 했다. - P69

왜 사는지 모르겠는 날. 그냥 살고 있는 것뿐인데 엄청 살려고 발버둥 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날엔 차라리 내가 먹고 싶기도 하다. - P101

왜 사는 걸까. 생각하고 또 해 봐도 살 이유를 찾지 못했다. 죽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죽고 싶지 않은 이유도 찾을 수 없었다. 살아갈 이유도 없는데 살고 싶은 죽고 싶지 않은 이유도 없는데 죽고 싶지 않다니. 왜 나는 이유 없이 이렇게 사는 걸까? - P101

앞이 깜깜해져 기절을 해 버린다고. 나도 차라리 그랬으면 좋겠다. 정신을 잃고 쓰러져 지금 이 순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소리는 너무 잘 들렸고 낯선 이들의 표정은 사진을 찍듯 하나하나 눈에 들어왔다. 놀림거리로 살아온 사람은 알 것이다. 놀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들린다. 비웃는 표정이 보이지 않아도 보인다. 그것은 기억에 새겨져 반복 재생되는 비디오 같다. - P105

악을 쓰며 울고 싶은 기분. 토할 것 같은 기분. 아무것도 참고 싶지 않은 뜨거운 기운이 손가락 끝까지 퍼져 나갔다. 나는 더 이상 이런 모습을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 P107

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생각했다. 나는 오래전에 죽어 무덤 속에 누운 사람이다.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다. 아무 말도 들을 수 없다. 일어날 수도 없다. - P110

눈이 많이 내리는 날 창문으로 하늘을 봤다. 눈구름이 까맣게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눈이 더 많이 내렸으면, 그래서 세상이 모두 하얗게 변했으면, 그렇게 같은 날 같은 시간 모두 질식사했으면 좋겠다. 배가 고프면 배가 고파 죽었으면 싶었고 목이 마르면 목이 말라 죽었으면 싶었다. - P110

경험상 누군가의 이야기를 오래 들어 주면 좋지 않다. 누구든 어떤 이야기든 오래 들으면 결국 다 힘들고 어려운 사정을 듣게 된다. 알게 되면 아는 만큼 마음이 생기고 그 마음만큼 괴로워진다. 그 사람을 걱정하게 되고 그 사람을 생각하게 되고 경우에 따라선 사랑하게 되고 반대로 미워하게 된다. - P126

하나도 잊지 않을 거다. 어떤 기억도 희미해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거다. 때문에 써야 했다. 기록해야 했다. 그것들은 콸콸 쏟아지는 물 같아서 도저히 작은 두 손과 평평한 종이에 담아 내려면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했다. 그렇게 하려니 한 장면 한 기억을 쓸 때 시간이 오래 걸렸다. 상관없었다. 밤은 길고 잠도 안 오고 무엇보다 나는 무슨 말이든 하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으니까. - P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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