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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콜리 해피엔딩
강화길 외 지음 / 작가정신 / 2019년 1월
평점 :
<멜랑콜리 해피엔딩>은
한국대표작가 29인이 모여 '아름다운 삶에 대한 추구'라는 일관된 문제의식을 보여준 박완서 작가의 정신을 기리자는 취지에서 계획 된 책으로 <나의 아름다운 이웃>이
70년대 콩트를 개정판으로 출간한 작품이라면 이건 콩트 오마주 작품이라는 말이 딱 어울리겠네요
엔딩이 어떻든, 언제나 다시 시작된다는 것만 깨달으면 그 다음겐
다 괜찮아져요.
언제나,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열린 결말은 누군가에게 희망이 될 수 있는
단어가 된다. 철학적이어서 심리를 이야기 하기 때문에 반성하고 다짐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삶 속에 내가 던져짐으로써 간접적으로 인생을 경험하고 깨닫는다는게 생각보다 무서운 영향력을 미칠 때가 있다.
그런 점에서 오랜시간
잊혀지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찾는 책이 되었으면 하는 박완서 소설가의 작품을 기억하고, 언제까지나 읽힐
것이라는 한마디는 독자로써 찡한 감동을 한스푼 얹고 시작하게 된다. 무거울 수 있는 시대의 배경이나
사건들, 혹은 어려울 수 있는 문장들이 어렵지 않게 읽히고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은 참 좋은 것 같다.
개인적으로 한국 소설가
중 박완서 작가님을 참 사랑한다면 반대편에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작품도 어릴 때부터 함께한 추천소설인데 두 작가의 차이점은 소설의 난이도가 극단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여성작가로써 삶을 묘사하는 문장이 감칠맛 나면서 읽기 쉬운 박완서작가와는 다르게 베르나르의
작품은 어렵고 난해한데 재밌다는 것이다. 그래도 1순위를
정해보라면 허심탄회한 사람 사는 이야기속 현실비판과 모르고 살던 것들의 발견에 있어 박완서 작가의 소설이 우선
'-'b
29인,
29개의 콩트 소설 모두가 좋아하던 그 문체 그대로를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각기 다른 개성있는 필력으로 오마주한 맛과 70년대, 80년대를 지나 2019년의
현재와 딱 맞아 떨어지는 말투 등을 <멜랑콜리 해피엔딩>에서
읽을 수 있다. 참고로 멜랑콜리와 해피엔딩은 각기 다른 두 개의 제목을 합쳐놓은 것인데 책을 읽기 전에는
제목 사이에 "/" 표시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짐작도 못했는데 센스있는 반전이다.
정말 죄송스럽게도 작가의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해서 처음에는 낯설기도 했지만 콩트소설을 보기 전 작가의 이력 소개에서 내가 읽어보았던 소설작품들을 보며 이번 기획에 참가한
작가분들 역시 심상치 않은 분들이라는 것 하나와 책의 제목처럼 끝이 멜랑콜리한데 결과적으로는 열린 결말로 웃음이 나오는 해피엔딩이라 고거 참 제목
한 번 잘지었다 두개의 포인트를 찾아내었다.
참고로 <나의 아름다운 이웃>과 같이 읽으면서 시대별로 다른 느낌과
오마주의 재미를 즐기는 것도 추천한다. 이런 느낌의 독서는 처음인데 다른 작가와도 기획되어 나온다면
어떨까?
"꿈엔들 잊힐리야"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방안의 물건은 하나씩 사라지기 시작했지만 할머니가 전해준 이야기만큼은 남아 있는 이 작품은 사람이 죽고 사라지고,
흔적이 사라진들 추억만큼은 잊혀지지 않는다는 의미를 남기고 있다.
은행 직원이었던 외할머니와
손님이었던 외할아버지가 만나 결혼을 했는데 검소하지만 한 번씩 한달치 월급을 써가며 가방을 사기도 했던 멋쟁이 그녀와 미남이고, 다정하며, 손재주가 좋았던 그는 만나서 밥을 먹고 산책을 하다 결혼을
했다. 전쟁 후 7년을 넘긴 시점에서 연애란 결혼을 의미한다니
지금과 다른 모습일 수 밖에 없다. 수년을 만나다 결혼을 해도 모르는게 남편인데 짧게 만나다 좋아서
결혼한 부부가 얼마나 좋아죽을 수 있을까 (결혼해보니 그렇더라)
물론 좋아죽어 결혼했지만
손재주가 좋지만 돈을 버는 재주는 없던 무능력한 남편과 더이상 한번씩 가방조차 살 수 없던 알뚤하고 생활력이 강하지만 늘 화가 매우, 많이 나있던 아내는 아이들이 모르게 싸움은 일본어로 했다고 한다. 기회를
노리는 남편, 현실에 정착하지 못한다고 힘들어하는 아내
그런 그들에게도 기회가
찾아온 적이 있었다. 남편의 고모가 세상을 떠나면서 유산이 생겼고 부부는 각자의 생각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도시가 들어서는 곳에 아파트를 사자는 그녀 (현명한 생각이었지만
생각에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전셋집을 구하고 나머지 돈은 사업을 하겠다는 남편, 결국 사업은 1년만에 실패했고 이혼은 하지 않았지만 두 부부는 더이상
일본말로 싸울 일도 없었다. 그렇게 몇 년 후 그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나서는 집안에서도 암묵적
침묵의 존재였던 그에 대해 어느날 손녀가 "외할아버지는 어떤 사람이었어요?" 물었을 때 외할머니는 그의 나쁜점, 성격을 이야기하지
않고 첫만남을 야기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계속
일본어로 이야기했다고
사실 손녀가 궁금했던
것은 가족들을 힘들게 한 그의 존재였지만 외할머니에게 남은 추억은 퇴근하기를 기다리던 그 남자, 오래
된 카페에서 일본어로 계속 대화하던 남자만이 기억에 남은 듯하다. 애증 속에 남은 애정이었을까?
만약에 결혼하기 전에
이 글을 읽었더라면 이해하지 못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무엇이지? 손녀는 무엇듯 알 것 같다 한 것이지? 뒤적거리다 넘겨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지지고 볶고 5년차 부부가 되어보니까 뭐라 답하기는 어려운데
그런 기억이 남는다.
글로도 말로도 잘 설명되지
않는 그런거...
"등신, 안심" 은 또 다른 부부의 이야기이다.
인생의 절반을 아이처럼
살아오면서 나머지 절반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결혼이라는 실수를 한 그녀는 사랑만으로 결혼이 행복할 것이라 생각했다. 사랑에 눈이 멀어 현실을 보지 못해 신혼이 가시기도 전에 싸우기 시작했고, 사랑보다
증오가, 그 사이에 태어난 아이가 자라는 속도가 더 빨랐다.
싸움이 계속될 수록 몸도
정신도 지치기 마련이라 회피하기 위해 다른 것에 정신을 몰두하려고 하고, 또 그러다 싸우게 되면 핵폭탄보다
무서운 언어로 서로를 너덜너덜하게 만든다. 좀 더 보수적인 시대에서는 여자가 의견을 말하지 못했다고도
하는데 요즘은 늦게 결혼하거나 극단적으로 빠르게 만나 빠르게 후루룩 해치워버리는 경향이 있어서 이런 부부싸움이 심심치 않게 하소연하는 글로 올라오는
걸 볼 수 있다.
언어폭탄을 맞고 피흘리는
그녀에게 지혈제는 필사적으로 철학적인 책을 읽고 개념을 종이에 적고 쇼핑을 하는 것이다. 일종의 회피, 이런 회피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상처가 조금 아물고 남편에게 휴전을 신청하게 된다.
미안해/나도
정말 미안하고 미안한지는
모르겠지만 싸움에 소모되는 에너지가 너무 크기 때문에 싸움이 빈번해질 수록 이 짧은 단어들로 상황을 무마하려는 경황이 있다. 무튼 아침의 부부싸움이 끝나고 남편에게서 전화가 온다.
아파트 장터에서 만 원에
일곱 장 든 돈가스를 등심과 안심으로만 사오라는 거. 전화를 받으며 메모 밑에 등심과 안심이라 적는데
펜 뚜껑을 닫지 않은 탓인지 획 하나를 제대고 긋지 못한 탓인지 '등심, 안심'은 '등신, 안심'이라 적혀있다. 전쟁같이
싸우는 우리는 둘도 없는 상등신들이고 우리는 화해가 이루어져 안심하고 있구나
만 원에 일곱 장 하는
돈가스가 가져다 준 평화와 저녁식사, 딸을 생각해서라도 평화를 지키기 위해 등심도 안심도 질겅질겅 씹으면서
시트콤 같은 인생을 생각하고, 우스꽝스러움과 유치함과 통속의 세계를 용서한다.
멜랑콜리하다가 해피엔딩하는
삶은 생각보다 별거 없다는게 70년대에도 현재에도 느껴진다. 물론
이야기 속에 부부들의 사연만 있는게 아니지만 어린시절 나에게는 여성으로써의 삶을 책 속에서 찾았다면 이십대 중반의 나에게는 싸우고 화해하고, 사랑하고, 미워하는 부부의 모습 속에서 '나'에서 조금 진화한 '우리'를 찾고 있는 듯 싶다. 그때에는 없던 SNS가 생기고 정글의법칙을 책에서 찾을 수 있지만 인생사는 희노애락은 시간이 지나도 비슷비슷하다. 다만 책을 읽는 독자가 얼마나 살았냐, 지금 기분이 어떤가에 따라서
집중하는 주제가 조금씩 달라질뿐
그래서 <나의 아름다운 이웃>도
<멜랑콜리 해피엔딩>도 10년 후에
사람사는 세상 속에서 찾게 되는 책으로 남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