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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에게 (반양장) - 기시미 이치로의 다시 살아갈 용기에 대하여
기시미 이치로 지음, 전경아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8년 10월
평점 :
올 해 마흔이 된 신랑에게 사십춘기가 온 것 같다. 가끔 눈물도 많아지고 피곤도 늘어나고, 짜증도 늘어나고, 월급 대신 늘어나는 것들은 감정의 풍부함인가? 그런 그에게 행복한 중년을 보낼 수 있는 방법을 나는 설명할 재간이 없다. 차이나는 나이와 경험을 독서를 통해 채워주기에는 내가 그 시간을 겪어보지 못해 충분치 못한 것이다.
<미움받을 용기>의 저자 기시미 이치로의 새로운 작품 <마흔에게>는 그에게 터닝포인트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줄 수 있길 바라며 선택한 책이다.
사실 마흔에게 라는 제목으로 나오기 전에는
<어머니는 병상에서 독일어 공부를 하고 싶다 했다> 불리기도 했는데 나이가 들어감으로써 스스로 노화되는 육체를 보고 느끼면서 부정적이 생각이 많아지는 시기이자 새로운 무언가를 시작하고자 하는 터닝포인트와 같은 의미를 담고 있는 가제가 아니었나 싶다.
<마흔에게>는 꼭 그 나이층을 지정하지 않고 삶에서 행복을 느끼는 사고를 가질 수 있도록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우리가 나이 든다는 것은 퇴화이면서도 한 편으로는 그동안 가질 수 없었던 경험과 우월한 무언가를 가질 수 있는 시기이다. 계절마다 특성이 있듯 나이마다 각기 다른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에 결코 뒤떨어지는 인생이 아니라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젊은 사람은 젊기 때문에 경험이 부족하고 연륜이 부족해서 뜨거운 열정으로 살아가야 한다면
30이 되고, 40이 되면 10년씩 쌓인 경험으로 청춘처럼 모든걸 불태울 것 같이 뜨거울 수는 없지만 (물론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가진 연륜을 이용해 좀 더 능률적인 롱런의 달리기가 가능하다고 나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들러의 심리학을 통해 행복이란 무언가를 통해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지금 현재가
'행복'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작가는 50에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입원을 하고, 일 년 후 관상동맥우회술을 받았지만
60살 정도에 한국어를 배울 정도로 열정적인 삶을 살고 있다. 그에게 재활하는 날은 그나마 남은 삶은 안정적으로 살고자 하는 운동이 아닌
"어제 하지 못했던 것을 오늘은 할 수 있었다"라고 불리는 삶의 또 다른 한 걸음 인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나를 포함하여) 나이를 막론하고 병이 든다는 것은 삶이 부정적인 형태로 변한다고 생각하는 반면 저자에게는 하나의 고비, 또는 그 시간을 겪음으로써 하루하루가 행복이 되는 의욕의 원인이 되었다. '관상동맥우회술'을 받은 몸이 예전과 같을 수는 없지만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포기해야하는 원인이 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슬프게도 나는 아픈 1년동안 그걸 놓치고 있었다. 아픔으로써 걷는 것도 제한받고, 회사를 다니는 것도, 운동을 하거나 요리를 하는 것도 제한받음으로써 나는 불행하다 생각하기 바빴지 그럼에도 나는 이 것들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를 못하고 살아왔던 것이다.
지금의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어떤 상태든 거기에 있는 것만으로,
살아 있는 것만으로 타자에게 공헌할 수 있다.
공헌한다는 것을 실감하는 것은 인생의 행복과 깊이 관련이 있으며,
인생의 양식이자 행복의 초석이 된다. 죽을 수도 있다는 무서움 앞에서 몸이 아픈 상태에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때달을 수 있는 것은 내 몸이 공포로부터 조금 편해질 수 있는 기회이자 오늘을 힘 껏 살 수 있게 되는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내가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할 수 있는 것을 찾는다면 우리는 그 순간에도 행복을 느끼는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감정이 행복하다는 것은 심리적으로 통증을 조금 덜 느낄 수 있는 기회가 된다고 어떤 의사선생님에게 들은 적이 있다.
저자와 의사의 의견은 공통적이다. 고통과 공포 속에서 행복을 찾는다는 것은 쉽지 않지만 그 방법을 찾음으로써 실천한다면 조금이나마 건강할 수 있고,
하루 하루가 행복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것이다.
수술을 받고 재활을 하는 그에게 이런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 던 것에는 가제로 나왔던 그의 어머님과도 관련이 있어보인다.
이 부분은 그가 버텨냈던 것보다 좀 더 인상적이기도 했었는데 뇌경색으로 쓰러진 후 누워있는 시간이 많아졌던 그녀는 그럼에도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고자 하였다.
"독일어 공부를 하고 싶구나."
처음에는 독일어를 공부하고자 하였고, 그러다 의식 수준이 저하 되는 시기가 찾아와 공부가 어려워졌을 때에는 책을 읽어달라고 부탁했다.
남은 생이 얼마남지 않았음을 짐작하거나 의식이 불편해짐으로 많은 것을 포기하고 휴식을 우선시 할 수 있었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배우려 했고,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것은 물론이고 끝까지 의욕을 잃지 않기 위해 애썼다.
그 역시 조는 시간이 길어진 어머니의 옆에서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책을 읽어 드렸다.
아들러가 말하는 불완전함이란 인격의 불완전함이 아니라 새로 시작하는 일에 대한 지식과 기술에 대한 불완전함입니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면 그 즉시 '잘하지 못하는 자신'과 마주하게 됩니다. 새로 시작한 일이니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 자신을 받아들이는 게 '잘하게 되는' 것의 첫걸음 입니다.
어머니의 이런 모습은 가족에게 공헌을 했고,
그는 책을 읽어드리면서 공헌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아팠을 때 어머니의 덕분으로 그는 탐독을 통해 재미를 찾을 수 있었다.
점점 힘들어진 몸으로 조는 시간이 늘어난 어머니가 책의 내용을 모두 들었을지는 모른다.
자신에게 얼마나 시간이 남았는지 인지하였을지도 물음이다.
하지만 그녀는 분명히 그 순간 원하는 것을 구애받지 않고 하고자 노력했음으로 만족했을 것이고, 자신을 위해 책을 읽어주는 아들이 있다는 것으로 행복했을 것이라 생각하니 괜히 눈물이 났다.
남은 인생은 누구도 알지 못합니다. 이 사실은 바꿀 수 없습니다.
바꿀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의 의식 뿐입니다.
늙어가는 용기,
나이 든
'지금'을 행복하게 사는 용기란 인생을 바라보는 눈을 아주 조금 바꾸는 용기인지도 모릅니다. 노화가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것은 병과 쇠약만이 아닙니다. 간병 문제도 생길 겁니다. 가까운 사람의 죽음과 조우하고 슬픔을 극복해는 등의 시련에도 직면할 겁니다. 그럴 때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아주 조금만 바꿔도 마음에 구원의 빛이 따뜻하게 비치게 될 겁니다.
행복은 인격이다.
사람이 외투를 벗어버리듯이 늘 홀가분하게 다른 행복을 벗어버릴 수 있는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하지만 진정한 행복은, 그가 벗지도 않을 것이고 벗어버릴 수도 없다.
그의 행복은 그의 생명처럼 그 자신과 하나이기 때문이다.
만약 모든 것이 지쳤을 때 공헌하는 것이 내가 아니라 나를 간병하는 사람들을 위한거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아프기 전에는 간병하는 사람보다 아픈사람만이 힘이 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30도 되지 않은 나이에 상상치도 못한 시간을 경험하면서 피가 섞인 나의 엄마, 동생이 아닌 남이었던 신랑이 가족이 되어 간병을 해줌으로써 아픈 사람 옆에 있는 사람이 얼마나 피가 말리는지 내가 아픔으로 희생해야 할 것이 많은지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 뿐만 아니라 그런 가족들을 행복하기 위해 공헌한다면 나도 가족들도 행복한 하루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뇌경색으로 쓰러진 어머니,
알츠하이머형 인지증을 앓던 아버지를 간병하면서도 그가 행복할 수 있었 던 이유도, 지금에도 노력하는 인생을 사는 이유도 철학책의 도움보단 공헌함으로 느끼는 공헌감과 가족으로부터 받은 공헌감으로 만들어진 모습이 아닐까? 언제 죽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언제 아플지도 아무도 알 수 없다. 우리는 내일을 알고 현재를 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시간을 붙잡고 사는 것보다 '지금,
여기' 전념하고 산다면 어떤 오늘과 내일을 맞이할 수 있을까
마흔이 된 신랑보다 내가 더 집중해서 읽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기시마 이치로 <마흔에게>
틀에 나를 가두고 살거나 스스로에게 한계를 설정하고 살면서 행복을 찾지 못한다면 그의 책을 통해 가능성을 읽어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경험한 것,
배운 것,
그리고 '지금,
여기'에 있는 행복을,
뭔가의 형태로 직접 건네주고,
전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나이 든 사람의 사명이며, 나이들어 맛보는 행복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