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를 나눈 형제
엘리야스 샤쿠르 외 지음, 류대영 외 옮김 / 예영커뮤니케이션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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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선생님의 좋아하는 글.

 (초판 역자 후기)

 

5년이 넘는 유학생활, 즉 경제적 무능력의 삶을 지탱해 오는 동안 내가 아내와 자식들에게 해 놓은 것은 덕지덕지 가난의 딱지들을 붙여 놓은 일이다. 가난하게 산다는 것. 뭐 크게 부끄러울 것은 없다손 치더라도 내세울 일은 더더욱 아닌 것이다. 아내는 가난한 남편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나는 그런 아내가 고맙고 존경스럽다. 그러나 아내는 아이들의 가난에 가끔씩 분노를 표시한다. 나는 그런 아내가 애처롭고 사랑스럽다. 무슨 선언서를 써 놓고 서명날인 한 것은 아니지만, 물질적으로 윤택한 삶을 사는 것은 우리의 결혼 목표가 아니었다. 그저 하나님과 역사 앞에서 정신 차리고 살자는 것이 눈에서 눈으로 맺어진 합의라면 합의였다.

하나님과 역사를 두려워하며 산다는 것. 이제 속절없이 중년의 문턱에 들어서면서, 나는 그 명제의 무게를 느낀다. 그것은 이십대의 어린 나이에 꿈꾸던 선언적인 삶이 아니다. 그것은 두 아이의 가난한 아비로서 느끼는 의무이다. 참된 아버지가 된다는 것과 하나님과 역사 앞에 바로 서는 삶을 산다는 것은 하나이다. 이것은 나에게 있어서 구원에 이르게 하는 깨달음이다.

참된 아버지가 된다는 것. 나는 그것이 글 쓰기와 같다고 느낀다. 대학 시절, 문학의 열병을 앓으면서 체득한 것은 글 쓰기에 완성이란 아예 없다는 것이었다. 이제 두 아이의 아비가 되어 나는 참된 아버지가 된다는 것에는 아예 완성이란 없다고 절감한다. 시쓰기를 그만둔 지는 이미 오래이다. 그러나 나는 참된 아버지가 되는 일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엘리야스 샤쿠르의 이야기를 처음 읽은 후 내린 결론은, 이야기의 주인공이 엘리야스가 아니라 그의 어머니와 아버지라는 것이었다. 번역을 하면서 나는 그것이 정확한 판단이었다고 다시 느꼈다. 미카엘 샤쿠르는 적어도 나에게 참된 아버지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비록 그가 역사의 변화에 역동적으로 대처하지는 못했지만, 엘리야스 샤쿠르는 그가 있었기에 만들어질 수 있었다. 한 인간의 역사는 결코 한 세대로 판단될 일이 아니다.

문학에 대한 열정은 사라졌지만, 써 놓은 한 줄의 글에 대해 가지는 고집과 애착은 지워지지 않는 흔적처럼 남아 있다. 번역이 글쓰기의 서자 취급을 받는 실정이지만, 이 글이 내가 낳은 정신의 자식인 것은 틀림없다. 아내와 내가 같이 만들어 내었으니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못난 자식은 못난 부모의 탓이다.

아내를 대신하여 내쉬빌에서
류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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