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의 비유
요아킴 예레미아스 지음 / 분도출판사 / 197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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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비유는 청중의 주의를 끌고, 특별한 중점을 두기 위해 대부분 평범치 않은 표현들을 갖고 있다. 이러한 과장들은 그것들이 지니고 있는 놀라움의 계기를 통해 해석이 가야 할 방향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예수는 놀라울 정도로 단순한 한 사상을 단지 여러 상으로 표현하였을 뿐이다. 항상 새로운 상으로 청중들에게 새겨 넣으려고 하였다. 그것은 기쁜 소식과 최후의 심판이다. 이러한 예수님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의 해석을 통해 많은 비유들이 본래의 象을 은폐하고, 핵심을 놓치고 있다는 것은 문제삼을 일이 아닌가? 수많은 번역상의 문제들이야 수정하면 되지만, 저자가 파헤친 대로 많은 것들이 개작되고, 서툰 결어들이 비유의 전체 의미를 흐리고 있다면 그것들도 독자들에게 진의를 알게 하기 위해 다시 편집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성경의 ‘완벽성’(?) 혹은 ‘온전성’을 믿으며 그대로 두어야 하는 것인지. 의문스럽다. 그러고 보면 저자는 성경의 저자들의 작업과 권위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인지 싶다.

재림의 지연과 선교 상황에 의거하여 해석한 것들은 지금 이 시대에도 똑같이 필요한 작업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우리에게 의미 있고 가치 있다. 가난한 자를 초대하고, 화해하고, 작은 자를 멸시하지 말고, 소유를 잘 사용하라는 권고들을 듣고 행하며 살면 칭찬 받는 삶이 아닌지. (바리새인처럼 경건하되 하나님께 자신을 낮추는 겸손과 순종. 이것이 이상적인 크리스챤의 삶의 모습이 아닌가?) 반면 한 구상말이 독자성을 잃고 다른 구상말의 해석이 되었다던가 비유의 결어가 혼합됨으로 인해 한 새로운 비유가 생겨난 것도 그 결과물이 가치있는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변형들도 있는 것 같다.

 

낡은 부대에 새 술을 담을 수 없다는 짧은 비유에 전승은 다음 글귀를 첨가했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함이니라”. 이것은 서투른 부가문이다. 왜냐하면 이 비유는 새것이 낡은 것과 합해질 수 없다는 것을 말하려 한 것이고, 이 경우에 새 술은 구원의 때의 표현인데 반해, 이 부가문에서는 묵은 것의 보다 귀한 가치를 말하기 때문이다. (99)

 

이 결과물이 무슨 가치를 지니는지 의문스럽다. 만약 그것이 없다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이라면 성경 안에 문맥적인 결함이 존재한다는 것이-단지 연대기적인 것이나 논리적인 결함이 아니라,(사실 이것을 결함이라고 보진 않는다) ‘가치 없고 무의미한 구절이 있다는 것’-이 새로 알게 된 사실이 될 것이다.

 

…이 결어들이 문맥에서 이차적임을 아는 것은 해당 비유들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아주 중요하다. 이는 이 비유들의 강조점이 거의 전부가 새로운 결어에 의해, 종종 근본적으로, 바뀌어졌기 때문이다… 보편타당한 금언이 첨부되면서 원래의 상황인 논쟁적인 태도, 종말적인 깨우침의 예리함, 위협의 엄격함을 모호하게 하는 도덕적인 의미를 해당 비유들이 얻게 되기 때문이다. (108)

 

왜 삶과 세상과 도덕을 초월한 ‘복음’이 보편 타당한 도덕률로 바뀌었을까. 초대교회는 더욱 그 점에 중점을 두어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해야 하지 않았을까?

 

우리는 이렇게 종합하자: 비유들은 이중의 역사적인 자리를 가지고 있다. 모든 예수의 말들과 같이 비유들의 원래의 역사적인 자리도, 구체적인 상황 안에 일회적으로 일어난 예수의 활동이다. 그러나 그 후에 비유들은 초대교회에서 “살았다”. 우리는 단지 초대교회가 비유에게 준 형태로만 비유들을 알고 있으므로 우리의 과제는 할 수 있는 한, 비유들의 원형을 되찾는 것이다.(109) … 만일 베일의 뒤 여기저기에서 인자의 얼굴을 다시 찾을 수 있다면 얼마나 큰 은혜일 것인가! 모든 관건은 그의 말에 달려있다! 그와의 해후가 비로소 우리의 선포에 전권을 제공할 것이다. (110)

 

이 비유들의 원형을 되찾은 후엔 그 내용을 담은 책이 성경에 부록으로 붙여져야 하나? 가능하다면 그렇게 되는 게 좋은 건가? 초대교회의 상황은 성경을 그런 식으로 해석하여 쓸 수 밖에 없게 하였고 지금에 와서 우리는 그것을 파헤치고, 해석을-성경의 내용인!- 도외시 함으로써 ‘예수님의 얼굴’을 찾는 것이 과제인가? 하나님이 성경에서 당신과 당신의 나라를 깨닫게 하신다는 것이 이런 방식을 통함인가? 그런데 그렇게 밖에 될 수 없는 과정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때의 교회 지도자들이 그랬듯 우리도 바리새인을 비판하여 하신 말씀을 우리 각자를 반성하는 데에 적용하지 않는가? -그리고 지금은 ‘역사적인’ 바리새인도 없다. 복음을 아는 사람, 아니면 모르는 사람 이렇게 나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 책을 읽지 않은 사람도 그리고 이러한 비유들의 역사적인 자리를 찾아 ‘인자의 얼굴을 찾는’ 귀중한 작업을 하지 않은 사람도 성경에서 하나님을 발견하고 은혜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 구원은 성경에 대한 올바른(?) 지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 테니.

 

예수가 말하고자 했던 ‘원래의’ 상황에 근거한 의미를 알고자 하는 노력은 분명 가치 있고, 필요하며, 중요하지만 지금 성경을 구성하고 있는 내용들이 실제적으로 도외시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 시대의 알레고리화의 필요가 있었고, 또 이것이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없다면, 그것은 ‘옳다’. 성경을 읽는데 있어서 그 어떤 이론이나 틀에 환원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구속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문헌적으로, 실제적으로 성경의 의미를 파헤치려는 노력은 인간의 지식을 기반한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와 같은 객관적인 연구와 함께, 상징화하는 것도, 실제적 삶에 직접적으로 적용하는 것도, 성경의 형성되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역사하셨듯, 지금의 우리에게도 성경을 통해 하나님은 이렇듯 다양함으로 역사하실 테니 말이다.(이것이 앞서 말한 모든 이들의 이해와 은혜가 가치 있다고 말하는 근거이다.) 이것이 성경의 위대함이 아닐까?  나의 이런 생각이 ‘혼합주의’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모든 것이 옳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이미 알 듯, 사람의 믿음을 보시고 그 진실성을 판단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실 테니, 우리가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그 신앙의 ‘순전함’이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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