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정체성 -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001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1
탁석산 지음 / 책세상 / 200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본서는 평범한 동네 사람들의 맥주자리에서 시작된다. ‘책을 쓰게 된 동기’에서 밝힌 것처럼 얻어 마신 맥주 값을 하기 위해 시작한 일이라 한다. 그것이 동기였다면 의도는 달라 보인다. 그것은 정체성이란 주제를 철학적으로 풀되 가능한 쉽게 전달해 보려는 철학 하는 이의 속내가 있다. 아마도 철학자가 보기에 정체성을 너무도 개념 없이 사용하는 것이 민망했는지 아니면 이 문제를 통해 철학 한다는 것이 멀리 있거나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분명한 것은 그가 정체성이란 주제를 쉽게 풀어 보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정체성이란 말을 좀더 현실적으로 “한국적인 것은 무엇인가”로 번역하였고 이 풀이를 통해 철학 방법을 가르친다.

 

그는 먼저 철학방법을 따라 주어진 말을 분석한다. 한국적인 것이란 말에서 먼저 보편성과 특수성의 구별을 시도한다. 한국적인 것이 존재하는가? 세계적인 것은 존재하는가? 이 질문에 저자는 보편에 대한 철학적 정의를 내린다. 즉, 보편은 존재하지 않고 보편은 이름뿐이다. 따라서 ‘한국적인 것’도 없으며 동시에 ‘세계적인 것’이라거나 ‘세계화’라는 것도 구호로만 존재한다고 평한 후에 차라리 미국적인 것을 만들자는 식의 구호를 외치자고 제안한다.

 

탁석산은 이 주장을 일관성 있게 펼친다. 1부에서 한국적인 것이란 단어가 가지는 불분명한 한계를 예리하게 지적한다. 가능한 쉽게 이해시키기 위해 아프리카와 만득이 이야기가 등장하고 마침내는 모든 것을 다 바꾼 테세우스의 배 이야기가 등장한다. 그러면서 그는 한국적인 것이란 정체성의 문제이며 이것 엄격하게 한국의 정체성과 한국인의 정체성으로 구별하여야 함을 주장한다. 동시에 이러한 정체성 문제가 형이상학에 속한 문제라고 지적한다.

 

동시에 특수성에 대한 정의도 내린다. 한국적이란 것이 보편이 아닌 개별로 존재하기 위해선 개념이 있어야 하는데 그는 한국적이란 말이 시원에서 개별성을 발견할 수 없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저자는 탁월한 역사비교를 시작한다. 탈 문화의 이동을 설명하면서 한국적 탈춤이 실상은 중국의 것이라고 말하고 동시에 일본에 전달된 도기문화에 대한 것도 지적한다. 또 서예의 전달도 예를 든다. 이것은 중국에서 한국, 한국에서 일본으로 이어진 것이라는 말과 함께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일본 문화 인식에 대한 2중 잣대가 적용된다는 지적도 잊지 않는다.

 

저자는 현재성, 대중성, 주체성의 세 가지를 판단기준으로 제안하면서 창조적 수용이 있어야 할 것을 말한다. 현재성을 말하면서 북에 두고 온 금송아지를 말하고, 대중성을 말하면서 시원과 비교하고 판소리가 한국적인가에 대한 회의를 말한다. 정체성을 말하면서 성향과 대비를 설명한다. 그리고 맺으면서 더 이상 정체성의 문제를 지난 과거에 찾기 위해 쓸데없이 시간을 보내지 말라고 충고한다.

 

책을 읽으면서 균형 있게 책을 썼다는 느낌을 받았다. 지나치게 철학을 강조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지나치게 현실적 대안에 매달리지도 않고 참으로 적절하게 이것과 저것을 잘 섞어 책을 만들었다.

또한 논리적 흐름의 연결이 매끄러워 3부로 된 글이 저마다 주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마지막 결론에 이르는데 아무 무리가 없었다. 이런 점은 말을 어렵게 하거나 자신만의 용어를 가지고 말하는 대개의 철학자들의 과오를 상당부분 수정한 공로가 보인다.

 

하지만 이 책에서 철학자가 사회문제를 대할 때 자주 범하는 2가지 실수도 보인다.

첫째는 자신의 개념에 지나치게 충실하다는 것이다. 저자의 제언과 같이 한국적인 것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당장 빵을 만드는 문제는 아니라 할지라도 오늘을 사는 우리가 꼭 대답해야 할 사회 가치관의 문제이며 우리를 우리답게 만드는 핵심문제이다.

 

그런 문제에 대해 그는 철학적 답을 주려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철학자적 답이 아닌 유명론자적 입장의 답이었다. 즉 보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전제를 가진 사람들의 답인 것이다. 역으로 철학자들은 다들 유명론자들인가? 그렇지 않다. 중세로부터 심각하게 논의된 보편 개념은 오랜 철학적 주제였다. 이 주제에 대해 지금의 철학이 유명론 우세로 힘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것이 철학전체이진 않다.

 

우선 보편은 이름뿐인가? 영국의 버클리의 명제 “존재한다 함은 지각되어 있음이다(esse est percipi)”를 유일명제로 받아들이는 이에게는 이름뿐일 것이다. 하지만 지각되지 않는 존재는 사실 매우 다양하며 분명히 존재한다. 이것은 철학사에서 중세의 보편논쟁을 거쳐 근세의 관념론과 존재론의 논쟁으로 오래 되었을 뿐 아니라 지금도 이어지는 문제이다.

 

오늘날 이 문제는 인식 문제로 여전히 남아서 경험론적 관념론과 과학철학적 인식론으로 대비되고 있으며 과학적 실재론이 최근에는 크게 우위를 보이고 있다. 이런 속사정이 있음에도 철학의 이름으로 하나의 관점만을 말하고 규명하는 것은 크게 위험해 보인다.

 

두 번째 문제는 답이 정당한가 하는 검증의 문제이다. 결국 저자의 말대로 하자면 한국적인 것은 지금의 문제만이 된다. 역으로 그렇다면 춘향전은 한국적인 것이 아니라면 누구의 것이란 말인가? 비록 대중성이 없어도 바로 그 대중이 인정하는 한국의 것이 있다. 이것은 한국인의 것인가 한국의 것인가 하는 모든 문제에 다 해당되는 문제이다. 즉 역으로 되짚어 보면 말이 맞지 않는 것이다.

심지어 우리는 주변에서 나이가 들면서 우리 민요가 좋고 창을 좋아하는 어른들의 말을 듣게 된다. 이것은 대중성은 아닐지라도 바로 그 대중이 잠재적으로 인정하는 한국적인 것이다.

 

이 같은 문제는 논리에는 맞고 결과에는 틀리는 문제를 낳는다. 또 하나 예를 들어보자. 저자의 말과 같이 현재성과 대중성 그리고 주체성을 다 포함하는 현상을 들어보자. 그 중에 80년대 대만의 가요가 있다. 대만의 80년대 가요는 대부분 팝송의 번안곡이었다. 대만 사람들은 영어로 부르는 것도 영어로 듣는 것도 싫어해서 모든 곡을 새롭게 개사하여 불렀다. 이런 현상은 현재성이나 대중성이나 주체성에 다 포함되는 현상이다. 하지만 그렇게 부르는 그들이 그런 가요를 대만적인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주체성이 있다는 말에는 모두 그렇다고 말하지만, 그래서 그것이 너희의 것이냐 물으면 그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즉 논리에 따른 결과가 정확하게 맞지 않다. 왜 그런가? 그것은 보편에 대한 중요한 특징을 놓친 탓에 있다고 본다. 보편이란 실체가 없다. 그렇다고 이름뿐이지도 않다. 보편이란, 말 그대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다고 느끼는 문제이고 그 느낌은 막연하지 않다. 이것을 해석학적 입장에서 보면 각 사람들이 개별적으로 경험되고 개별적으로 인식된 것인데 그것이 집단 안에서 공통의 이해를 가진 것이다. 이점에서 실체는 없으나 분명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것은 얼마든지 있다. 사랑이란 것이 그렇다. 객체적인 사랑이 있는가? 없다. 그렇다고 세상에 사랑이 없는가? 그것은 아니다. 모두가 저마다의 사정과 상황에서 사랑이란 현실을 만나고 그 결과 결혼을 하거나 실연을 하는 일이 생긴다. 개별적이었으나 그럼에도 우리는 사랑을 말하고 공유한다.

 

한국적인 것이란 문제도 동일하다. 이것은 보편이며 따라서 현상적 객체를 처음부터 요구할 수 없는 대상인 것이다. 이 점을 조금 더 받아들였다면 모두가 공감하는 한국정체성을 말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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