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학왕의 사회학 - 지방 청년들의 우짖는 소리
최종렬 지음 / 오월의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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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born 서울내기다.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지역 학교를 졸업했고 직장 역시 서울에서 잡았다. 사는 곳은 서울 안팎을 왔다 갔다 했지만 삶의 80퍼센트 이상을 서울에서 살았다. 지금도 사는 지역보다 서울지역 지리가 더 익숙하다. 상대적으로 지방은 내게 낯설고 어려운 곳이다. 비교적 가까운 강원도나 충청도는커녕 지금 살고 있는 경기지역마저도 한두 정거장만 더 가면 낯설기 그지없다. 그 말은 내가 서울의 지리뿐 아니라 서울의 문화와 인간관계 분위기에 익숙하다는 의미다. 사실 구직할 때 서울 외 다른 지역에 지원할 생각을 못 해본 건 그 낯섦을 극복할 요만큼의 용기도 의지도 없어서였다. 서울 밖에 대해선 아는 게 없었으니까. 연고도 없지만 아는 것이 없다는 건 두려움이기도 하고 머나먼 거리감이기도 하다.

『복학왕의 사회학』에서 이야기하는 대구 경북 지역은 거리감을 가늠하기도 힘들 만큼 먼 지역이다. 딱 한 번 KTX를 타고 출장 간 길에 들른 대구는 고속기차를 타고도 세 시간이 걸릴 만큼 멀고도 멀었다. 이렇게 멀기만 한 ‘지방’을 이야기하는 이 책은 ‘복학왕’이라는 구수한 키워드로 나의 흥미를 끌었다. 귀여운 제목과 아기자기한 삽화는 묵직한 책을 가뿐하게 만들며 한번 읽어봐야겠다는 의지를 자극했다. 그러나 묵직한 책은 무게 값을 한다. 진짜 진짜 길었다. 후반부에는 지루해서 책장을 휙휙 넘길 만큼 체력이 달렸다. 전하고자 하는 주제는 명확한데 사회학적 ‘질적연구’가 그렇듯이 예시가 많고 길어서, 아주 충실하지만 집중력이 축나는 책이기도 했다.

『복학왕의 사회학』은 반(反)자기계발서 같다. ‘서울내기’인 내게 “바쁨”과 “열심”이 혼합된 자기계발서적 삶은 너무나 익숙하다. 현실에 안주하면 안 되고 하나라도 더 배워야 하고 잠을 줄여서 공부하고 라이벌을 이겨야 하고 미래를 위해 오늘을 한순간이라도 낭비하면 안 되는 삶. 그것이 내가 알아온 대학생과 직장인의 보통 삶이었다. 그러나 이 책은 정말, 정말, 너무나 낯설다. “경쟁의 장”이 아닌, “가족의 장”에서 사는 사람들. 그들이 지방의 사람들이었다.

계명대학교 사회학과 최종렬 교수는 2017년, ‘복학왕의 사회학 : 지방대생의 이야기에 대한 서사 분석’이라는 논문을 써서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복학왕의 사회학』은 그 논문에 내용을 덧붙여 발간한 책이고. 제목 자체가 논문의 그것이라기에는 친근하고 귀에 쏙 들어온다. “지방대생은 이렇게 산다”는 논문의 부제 그대로 내용이다. 최종렬 교수는 지방대 재학생, 졸업생, 지방대 부모들을 인터뷰하면서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데, 핵심은 계속 반복되는 키워드에 있다. “성찰적 겸연쩍음”“적당주의 집단 스타일”“가족만이 최고”라는. 열심히 하고 잘 될 거라 확신하기엔 뭔가 부끄러운 겸연쩍음, 큰 욕심을 낸 적도 없고 욕심내야 할 필요성도 못 느끼는 적당주의, 내 주변 가족들과 친구들만 잘 챙기면 되고 연줄로 인해 많은 것들이 해결된다고 생각하는 가족주의가 이 책을 가득 채우는 이야기의 핵심이다.

다만 이들 역시 같은 열망을 가지고 있다. “잘 사는 것” 늘 고민하는 것이 무엇이 잘 사는 것인지, 어떻게 해야 잘 살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더 잘 살 수 있는지를 “복학왕”의 잘 살기는 “평범”을 향해 달려가는 우리 모두의 아주 다른 모습이다. 정말이지 사람 사는 게, 소망과 목적은 다 똑같다.

솔직히 몰랐다기보다는 피상적으로 알았다는 게 정확하다. 나는 지방의 이야기를 아주 몰랐던 건 아니지만 굳이 알려고 해 본 적이 없다. 내가 서울에서 태어났으니까, 서울에서 직업을 가졌으니까, 내가 서울에서 월급을 받고 사니까, 내가 서울에서 노니까. 사는 게 급하다 보니 그랬다는 것 역시 너무나 자기계발서적이다. 왜 모든 담론이 서울 및 수도권 중심인지, 지방민들이 왜 서울에 정착하기가 어려운지, 임금과 부동산 등 서울과 지방의 생활 격차가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키는지 미처 구체적으로 생각하지 못했다. 『복학왕의 사회학』은 신선한 책이다. 지나치게 길고(두껍고), 그로 인해 흥미롭던 이야기가 재미 없어져 버렸다는 게 단점이라면 단점이랄까.

『팩트의 감각』에 이어 최근 읽은 책들 몇몇이 편협한 내 시각을 계속 깨우쳐준다. 그냥 살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되고, 내가 선 발밑만 보게 된다. 나와 그들이 늘 그리하듯이 “잘 사는 것”에 대한 고민을 잊으면 안 된다. 제대로 살려면 눈을 크게 뜨고 두리번 두리번거리며 계속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 “도끼같은 책”도 계속 만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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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트의 감각 - 믿음이 아니라 사실을 바탕으로 생각하는 법
바비 더피 지음, 김하현 옮김 / 어크로스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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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fj는 가장 파악이 잘 안되는 MBTI 유형이라고 한다. 성질 자체가 상황 혹은 상대방의 맞춤형 변신을 잘 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기도 하고, 가까이 있는 사람의 장점을 잘 흡수하기도 하고, 가장 T를 잘 활용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기도 한다고 한다. 20대 초반 나에게 처음 MBTI를 가르쳐 준 MBTI 연수원 오빠는 “너는 전형적인 INTJ 여성이야”라며 “우리 같이 T가 발달한 인간은 왕따 중의 왕따라 외로워도 슬퍼도 꿋꿋이 살아야 해”하며 나의 T 력을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나는 꿋꿋한 T 인간이 아니었다. 인생의 질곡을 굽이굽이 넘어서자마자 나는 본성대로 돌아가고 말았다. 나는 흐트러진 실같은 F형 인간이었다.

무엇보다 나는 “꽂히는” 데 약하다. 자료를 분명 보고 분석하지 않는 건 아닌데, 결정적인 순간은 내 감정이 가는 곳이다. 마음 가는 대로 해 댄다. 그러다 보니 실수도 많고 불안도 크다. 『팩트의 감각』은 이런 나의 F 력 단점을 지그시 바라보며 시각의 전환을 요구했다. 책의 이야기는 한 줄로 요약된다. “FACT를 가지고 현상을 찬찬히 알아보면, 느낌이나 감정으로 받아들였던 것보다 실제는 훨씬 다르다는 것.” 그러니 제대로 인식하자는 것. 잘못된 인식을 발견하자는 것.

저자 바비 더피는 《1장 건강: 나 정도면 비만 아니야》, 《2장 섹스: 얼마나 하고 있습니까? 》, 《3장 돈: 은퇴 비용, 얼마가 필요할까?》, 《4장 이민과 종교: 외국인 노동자가 정말 내 일자리를 위협할까?》, 《5장 범죄와 안전: 전 세계 테러는 정말 급증하고 있을까?》, 《6장 선거: 정치인들의 말에 속지 않으려면》, 《7장 정치: 브렉시트와 트럼프 당선이 말하는 교훈》, 《8장 온라인 세계: 거품 가득한 세상에서 제정신으로 살아가는 법》, 《9장 전 지구적 이슈: 세상은 나빠지고 있다? 나아지고 있다! 》, 《10장 어느 국가가 가장 많이 틀렸을까?》, 《11장 팩트 감각을 살려주는 열 가지 방법》의 열한 장의 구성으로 다양한 주제를 이야기하고 팩트 감각을 기르는 법을 요약하여 알려주는데, 각 장마다 제시하는 일상적 주제와 통계들이 피부에 와닿아 매우 흥미롭다. 물론 《11장 팩트 감각을 살려주는 열 가지 방법》만 읽어도 『팩트의 감각』의 주제를 파악하는 데 무리가 없겠지만, 1장부터 9장까지 삽입된 이민자 수, 10대 임신율, 범죄율, 비만율, 세계적 빈곤 문제의 동향, 페이스북 이용자 수 등의 주제별 여론과 통계와의 간극은 지극히 흥미롭다. 개인적으로는 나라마다 다른 인식의 갭, “평균 추측 값과 실제 비율의 차이”를 분석한 10장이 흥미로웠는데, 1) 감정 표현의 정도, 2) 교육 수준, 3) 미디어와 정치 수준 중 ‘1) 감정 표현의 정도’, 즉 자신감을 표현하는 민족성에 대한 정도만 관련성이 있다고 볼 수 있었다. 물론 2)와 3)에도 몇 개의 끈이 연관을 찾을 수는 있지만 지나친 자신감만큼은 아니다. 이것 역시도 “내가 보는 것이 전부”라는 인식의 오류가 ‘팩트의 감각’을 주장하는 근거가 된다.

책을 읽으며 내내 스티븐 핑커의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가 떠올랐다. 세상은 점점 더 나빠지는 것 같지만, 곧 세상의 종말이 다가올 것 같지만, 사실 세상은 나날이 좋아지고 있으며 더욱 희망적이라는 것. 스티븐 핑커 역시 바비 더 피와 비슷한 방식으로 자신의 주장을 논증했다. 이제 나는 자신 있게 『팩트의 감각』을 추천한다. 무엇보다 술술 읽히고 재미있다. 책에 있어 이보다 더 좋은 덕목이 또 있나 싶다.

특히『팩트의 감각』은 내 인식의 부족분을 살짝 괴어주는 듯한 좋은 책이었다. 그동안은 대개 ‘하트의 감각’으로 세상을 살아갔다면 이제는 ‘팩트의 감각’을 먼저 사용하도록 바로 오른손 위에 오른 눈 위에 두어보려고 한다. 그러나

책을 덮으며 다시 한 번 생각해봤는데, T와 F의 간극에서 나는 어느 편의 손을 들어줄 것인가? 어떤 문제인지에 따라 달라질 것 같다. 세상과 타인의 인식에 대한 문제라면 ‘팩트의 감각’에 최선을 다해 선택하겠지만, 나 자신에 대한 문제라면 ‘하트의 감각’을 믿을 수밖에 없으리라. 가능한 내 인생의 가장 결정적 순간에는 ‘팩트의 감각’과 ‘하트의 감각’이 꼭 같은 방향을 가리키기를, 적어도 비슷한 방향을 가리키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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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은 금방 능숙해지지 않는다 - 개인 맞춤형 그림 트레이닝북
나리토미 미오리 지음, 양필성 옮김 / 스몰빅아트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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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가르치는 일을 이십 년 가까이 하고 있지만 여전히 그림 그리는 데 short-cut은 없다는 걸 실감한다. 각자가 타고난 다른 감각의 발달과 반응 속도 문제를 기반으로 하여, 무엇보다 눈과 손의 협응력을 기르는 것이고, 눈-두뇌-손까지의 정확한 정보 처리 과정을 연마하는 길뿐이다. 그냥 즐겁게 많이 그리면 될 뿐 솔직히 굉장한 비법은 없다는 게 그림 가르쳐 먹고사는 사람의 고백이다.

『그림은 금방 능숙해지지 않는다』는 이런 내게 한 줄기 동아줄이라도 될까 하여 들춰본 책. “일본 아마존 예술 분야 1위”라고 하는데, 이 책 안에는 뭔가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방법론이 분명 있을 거라는 기대가 컸다. “미술은 과학이다”라는 내 교수 표어는 수와 양으로 구조화될 수 있는 형태와 빛의 양에 기반한다. 수학적 비례에 기반을 둔 원근법이나 평행하는 빛이 다른 각도로 명면에 닿는 명암법은 분명히 체계적 이해 방법이 있다. 물론 생물학 비례에 기반을 둔 해부학에서도. 그러나 이외의 부분, 형태력이나 구도력 같은 것은 타고난 감각과 이를 촉진하는 시간의 노력뿐이다. 그러나… 미안하게도 『그림은 금방 능숙해지지 않는다』에는 그런 내 기대를 충족할만한 방법론은 없었다.

다만 이 책에는 그림에 필요한 8가지 능력(아이디어, 독창성, 형태기억력, 구도구성력, 형태파악력, 입체파악력, 테크닉, 완성력)을 구조화하고 자신이 무엇에 특화되고 무엇에 부족한지 체크하게 한다. 한편 자신이 어느 작업형에 적절한지 고민하게 하고, 8능력 중 자신이 원하는 진로에 따라 계발해야 하는 능력을 권장한다. 즉, 미술 교사가 그림의 이론 설명을 하거나 학생의 진로 상담을 하기에 유용한 정보가 삽입된 책. 분명 새로운 접근이지만 미술과 가깝고 미술 관련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게 특별한 인식의 전환이 되거나 감동적인 작업 테크닉을 소개하는 책은 아니었다.

그래도, 절대 거짓말을 하는 책은 아니다. 허황되게 “이 책만 보면 잘 그리게 되는 책”이라고 하지 않고, “그림은 금방 능숙해지지 않는다”고 했으니. 이 제목만큼은 진리 of 진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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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정리하는 법 - 넘치는 책들로 골머리 앓는 당신을 위하여
조경국 지음 / 유유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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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유 출판사의 작은 책들은 아주 작은 주제로 딱 알맞은 만큼의 수다를 전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책 정리하는 법』을 써내린 저자는 헌책방을 운영하는 조경국. 그는 나와 당신과 같은 간서치처럼 책 분리불안증을 앓고 처치 곤란 책의 성 가운데에서 활자 중독으로 침침한 눈을 비빈다. 당연히 자기의 보물 혹은 짐(?)이 되어버린 책들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고민했던 시간을, 꿈의 서재를, 그러다 헌책방을 꾸리게 된 사연을, 오랫동안 닦고 붙이고 싸매고 꿰맨 소중한 책들을 선보인다. 세상에 책 싸는 재료, 책 싸는 법, 책 닦는 오일 스프레이 사진까지 보여줄 정도니 말 다 했다.

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좀 바보스럽다. 세상천지 돈 안되는 거 책 같은 게 없는데, 책에 반해서 낡은 책들만 애지중지하다가 정신을 못 차리다가 세상의 ‘인싸’가 아니라 ‘아싸’로 내내 산다. 저자 역시 그런 사람. 늘 책 때문에 아내에게 가족에게 타박을 당하고, 돈 안 되는 헌책방을 운영하고, 관심 있는 건 남의 멋진 서재 정도뿐. 그러나 간서치만이 알 수 있는 서로의 끌림. 그것 때문에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책 수다가 계속 책이 되어 나오는 것이다.

특별히, 저자가 발췌해 적어둔 정수복의 파리 시절 서재 이야기가 눈부셨다. 몇 번을 읽어도 눈이 부시네. 아름다운 것은 눈에 담기만 해도 마음으로 읽기만 해도 사람을 적시는 것이다.

“내가 살던 아파트는 ㅁ 자 모양으로 되어 있고 가운데 정원이 있었는데, 내 아담한 서재의 유리창을 통해 그 안마당이 보였고, 마당 너머로 다른 건물 정원의 나무가 보였으며, 건너편 건물 돌벽을 덮고 있는 담쟁이덩굴도 보였다. 비가 오고 눈이 내리며 구름이 흘러가는 하늘도 보였다. 햇빛이 드는 집을 찾기 어려운 파리의 주택 사정을 고려할 때, 그런 서재를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은 내 인생의 행운 가운데 하나이다.”

정수복, 『책인시공』(문학동네, 2013)

한 시간 정도의 자투리가 나면 유유 출판사의 이북을 선택하곤 한다. 이 정도의 유쾌한 수다가 주는 기쁨은 딱 적당한 피로회복제다. 거기에 책을 놓은 수다라면 더할 나위 없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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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인문학 :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법 - 미술사 결정적 순간에서 창조의 비밀을 배우다
김태진 지음 / 카시오페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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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과 감정, 나는 둘 중 어디에 치우쳐 있는지를 굳이 묻는다면 나는 감정 쪽이다. 물론 두 가지를 균형 맞추려고 부단히 노력하지만 결정적인 순간 어느 편을 드는지를 묻는다면 어쩔 수 없이 감정이다. 『아트인문학 :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법』의 저자 김태진 역시 나와 같은 사람일 것. 굳이 ‘시대’와 ‘영혼’으로 미술을 풀어나가려다가 ‘영혼’에 방점을 두어 『아트인문학』을 썼으니.

그렇다고 『아트인문학』이 작가의 신성한 영혼과 작품의 위대함만을 서술한 작품은 아니다. 너무나 체계적으로 르네상스 이후 고전미술의 형성과 해체, 그리고 현대미술의 개화에 이르기까지 미술사의 흐름 가운데 열 가지의 관점 혹은 세계관, 즉 패러다임 전환 사건을 제시한다. 원근법, 해부학, 유화, 명암법, 알라 프리마, 색채학, 현대성, 표현, 추상, 착상의 열 번의 전복.

이 패러다임들이 바로 뼈대다. 튼튼한 구조 위에 착실히 얹힌 것은 개념들을 뒷받침하는 설득력 있는 정보들. 어느 정도 미술사 지식을 쌓은 나이지만 『아트인문학』을 통해 수많은 빈틈을 확인했다. 고화질의 도판과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들, 그들의 깨알 같은 이야기들이 부족한 내 지식의 밀도를 채웠다. 게다가 툭하면 감탄할 수밖에 없는 저자의 유려한 글줄. 이건 지식이 아니라 영혼을 건드리는 글쓰기다. 한 노인을 그린 다음 페이지의 그림을 보자. 보는 이들을 몰입시키는 이 그림에서 우리는 렘브란트가 추구한 그림이 무엇인지 확인할 수 있다. 그건 바로 ‘한 사람의 인생을 한순간에 담아내는 듯한’ 그림이다. 고요한 분위기로 화가를 바라보는 이 노인은 모자와 의상으로 보아 유대인이다. 그의 얼굴과 자세, 꼭 쥔 두 손을 보면서 우린 이 노인이 걸어온 삶의 무게가 고스란히 전해져옴을 느낀다. 그는 아마도 올곧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수많은 시련에 아픔도 많이 겪었지만 자신이 믿는 바를 단단히 지켜온 자신감이 엿보인다. 렘브란트를 뛰어난 화가를 넘어선 위대한 화가로 만든 것이 바로 그의 이러한 후반기 작품들이다. 이들에서 렘브란트의 명암법은 스스로를 과시하지 않는다. 때론 숭고한, 때론 신비로운 분위기를 연출하며 ‘인간 내면에 대한 통찰’을 드러내는 데 적절히 참여할 뿐이다. 이 그림에 이르고 보니 명암법이 이르러야 할 목적지가 어디였는지가 분명해졌다. 그 목적지는 강렬함이 아니라 깊이였던 것이다. 카라바조가 만들어낸 명암법이 이처럼 렘브란트에 이르러 완성되었다.같은 글에서 느끼는 터치.

참 감성적이지만 참 이성적이다. 베스트셀러라는 이름에 ‘믿고 거르려고’ 했던 내가 바보스러울 만큼 『아트인문학』은 좋은 책. 언젠가 나도, 공부가 쌓이고 능력이 자란다면, 이렇게 균형 잡힌 좋은 책을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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