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발레 - 그래도 안 힘든 척하는 게 발레다 아무튼 시리즈 16
최민영 지음 / 위고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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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여덟부터 마흔 사이, 일 년 반 동안 발레를 배웠다. 『아무튼, 발레』의 저자 최민영 기자와 비슷한 나이에 (나도) 취미 발레를 시작한 것. 운 좋게도 직장에서 집으로 오는 길에 딱 적당한 발레 학원이 있었고, 단 하나 있는 성인 클라스가 월요일과 수요일 일곱 시부터 아홉 시, 딱 내가 비는 시간 이틀이었다. 뜨거운 여름날 건널목 아스팔트 크랙에서 발목을 심하게 접질러 병원에서 ‘절대안정’을 요구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직도 발레를 다니고 있을 거다.

최민영 기자는 나의 발레 전도사다. 재치 있는 입담과 총명한 인사이트가 가득한 그녀의 트위터는 그야말로 ‘호감형 기자 SNS’. 감수성과 논리 사이를 오가는 균형있는 글줄 가운데 어느날 분홍색 발레슈즈 사진이 올라왔다. 한 줄 두 줄 발레 이야기가 올라왔다. 잊고 있었다, 내가 ‘발레 허우적허우적’을 해본 적이 있었다는 걸. 방과후 특별활동이 유명한 사립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여동생은 한동안 발레를 배웠지만 나는 한두 타임 기본동작을 해보고는 도망나왔다. 매년 체육대회와 학예회마다 억지로 고전무용과 민속무용을 배우는 걸로도 충분했다. 미술수업에 더 더 집중했다. 몸을 쓰는 것과는 더더욱 멀어졌다. 단언컨대 나는 최기자의 트위터에 올라오는 발레 이야기 덕분(德分)에 발레를 시작했다. 그분처럼 지덕체를 갖춘 인간이 되기를 감히 바란 게 아니라, ‘지덕체 흉내’를 내고 싶어서.

물론 그건 과욕이었다. “속 모르는 소리다. 잘 추고 싶은 마음은 마그마처럼 뜨겁게 끓어오르는데 막상 몸으로 표현되는 건 한겨울 개봉한 지 열두 시간도 더 지난 주머니 핫팩만도 못할 때, 그 서글픈 간극은 취미 발레를 배우는 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해봤을 것이다. 가끔 수업 때 안무를 따라가지 못해 ‘몸개그’ 중인 내 모습을 스튜디오 거울을 통해 발견한 날에는, 홧김에 단 음식을 잔뜩 먹고 늦은 밤 베개에 머리를 대고 내면의 눈물을 훔치며 생각하는 것이다.”《3개월 일시불 선결제 해주세요》 같은 나의 마음은 일년반 내내 하루라도 다르지 않았으니.

코어근육이 단단하기는커녕 턴아웃 자세조차 결코 안 되었던 나는 한시간 반 동안 클래식 음악에 맞춰 마음을 움직이는 데 만족했고 정말 그 시간 그걸로도 좋았다. 내게 발레는 몸도 그렇지만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해 주는 운동이었다. 폼은 엉망이어도 제법 ‘순서를’ 따라하던 시기도 있었건만, 지금은 별 기억이 안 난다. 1번 자세부터 6번 자세가 머릿속에서 다 이미지로 뒤섞이고, ‘앙아방(en avant)’, ‘앙오(en haut)’, ‘앙바(en bas)’, ‘알라스콩(à la second)’ 팔자세들도 허우적허우적 확신이 없다. 유일하게 기억나는 건 플리에(Plié)와 그랑 플리에(Grand Plié). 그나마 내가 가장 잘하고 좋아하던 다리 자세라였을까? “플리에는 스스로를 높이겠다는 마음으로는 스스로 높아지지 않는 삶과 참 많이 닮았구나, 생각할 때가 있다. 내려올 수 있는 힘이 없다면 올라갈 수 있는 힘도 나오지 않는다. 나는 바워크의 플리에를 하면서 가끔 불전에서 108배를 하는 기분이 들곤 한다. 나 자신을 최대한 낮춤으로써 사실은 스스로를 강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닮아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인생에 ‘플리에’의 순간이 있는 게 아닐까. 낮아지고, 떨어지고, 주저앉는 순간들 말이다. 원하던 일을 얻지 못했을 때, 추진하던 프로젝트가 어그러졌을 때, 사랑이 어긋났을 때, 누군가에게 거절당했을 때, 그건 넘어지는 게 아니다. 그저 각자의 ‘플리에’를 하는 거다. 높이 뛰어오르는 순간이 있으려면 플리에를 꼭 거쳐야 하고, 내려와야 할 순간에도 플리에는 꼭 필요한 거니까. 그래서 나는 자존감이 바닥을 치는 날에는 ‘오늘은 꽤 깊은 그랑 플리에를 하고 있구나’ 생각하곤 한다. 플리에 같은 그 시기를 잘 지난다면, 인생의 속근육도 자라는 것이겠지.” 《오늘은 꽤 깊은 그랑 플리에를 하고 있구나》 『아무튼, 발레』의 이런 서술은 따뜻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폴짝폴짝 뛰어오르고 내리던 한때들이 내게도 분명 있었다. 발레하며 얻은 시스터후드, 발레하며 만난 남자분들, 발레하며 만난 스트레칭의 고통, 발레하며 만난 좌절과 유투브 덕질의 순간들도.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낯익은 에피소드를 만날 때마다 꽤 오래 그때를 생각했다.

저자에게 발레는 삶의 비타민이었다. 누구나 매일 먹고 마시는 밥 같고 생수 같은 에너지원이 있다. 의식주 말고 ‘의식주 같은’ 필수품. 이건 내가 해 봐서 하는 말인데 발레는 정말 그럴 만하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는 ‘몸을 쓰는’ 무엇이라는 거다. 참 이상하지, 우리는 늘 몸을 혹사해 가며 ‘노동’을 하지 않느냐는 말이다. 몸을 힘들게 움직이는데 노동과 몸취미(여기에서는 발레)는 무엇이 다르냐는 말이다. 만약 나의 경험이 맞다면 그건 ‘반짝임’이다. 나를 반짝이게 하는 몸취미, 기꺼이 내 몸을 움직이고자 하는 내 기쁨. 그게 다르다. 그래서 “요즘 발레가 '낮은 곳'으로 임해서 동네 곳곳에 발레교습소가 생겼다”(한국일보 기사)는 우스개소리가 나오는 것. 덧붙이자면 나는 작년 재작년 이 반짝임에 숟가락을 얹어 두 개의 글을 썼다. 기꺼운 몸의 경험은 그렇게나 차원이 다르다.

또다시 몸을 쓰지 않은지 오래되었다. 요즘 나의 몸쓰기는 ‘숨쉬기 운동’ 말고는 걷기, 그것도 11월 언젠가 추운 날을 계기로 만 보 안팎을 오가는 데 꽤 되어버린. 내가 목숨처럼 여기는 ‘품위’는 ‘균형’에서 나오는데, 이노무 ‘체’는 언제 밑바닥을 안 보이는 날이 올지 한숨이다. 그러니 일단 북극곰 이글루(?!)에서 기어나와 ‘폴짝폴짝’ 뛰는 것부터 시작이다.

“몸으로 창조하고 생산하는 활동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들은 오히려 정신에 집중하다 못해 우울하게 자기 자신을 파먹지 않나요. 하지만 진짜 세상을 움직이는 사람들은 단순한 생의 원칙에 따라 부지런히 몸을 움직이지요. 몸이 진짜예요.” 《오늘은 꽤 깊은 그랑 플리에를 하고 있구나》

이런, 연분홍 봄에는 다시 발레학원에 가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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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1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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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의 책’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덮으며 내가 내린 결론이다. ‘설국(雪國, 유키구니)’이라는 제목 역시 이 ‘감각’을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하얀 눈이 흩뿌리는 나라, 뿌연 흰빛이 공기를 가득 채운 세계, 어떤 곳을 보아도 블러(blur, 흐림)처리된 이미지 뿐. 어디에도 환상 그뿐이다. 애매모호한 사람과 감정, 그리고 감각뿐이다.

『설국』의 주인공은 둘, 혹은 셋이다. 남주인 시마무라와 여주인 고마코, 그리고 비중은 적지만 여자주인공과 대조된 모습으로 강한 이미지를 남기는 요코.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시마무라의 입장에서 서술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두 여자다. 눈의 나라를 가득 채운 두 여자의 아름다움, 이 아름다움에 압도된 한 남자의 얼어붙은 행동이 이 소설의 모든 것이다.

이 남자, 시마무라는 말 그대로 한량이다. 무용 전문가라고 하지만 실상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돈으로 온천 순례가 연례행사인 금수저. 이 물렁한 남자의 특기는 아름다움을 보고 느끼는 일이다, 그 중에서도 여자의 아름다움을. 흐릿한 남자는 일에도 인간관계에도 사랑에도 이도 저도 아닌 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유랑하며 그저 산다. 그 어떤 집착도 없다, 그냥 목숨이 붙어 있으니 살아갈 뿐이다. 허무함을 한껏 만끽한다. 아름다움만 보고 듣고 만지고 느낀다. 그런 남자를 사랑하게 된 여자 고마코, 게이샤로 살면서 한 남자와 인연도 맺지만 사람 마음이 흐르는 걸 어쩔 수 없어 시마무라를 사랑한다. 한때 그녀의 연적이었던 요코는 곁에 머물며 또 다른 허무를 발산하고 시마무라의 시선은 계속 요코의 뒤를 따른다. 그녀 역시 또 달리 아름답기에.

시마무라는 부정하고 싶지만 고마코를 사랑한 것이 분명하다. 절대 고마코를 받아들일 생각은 없으면서, 그렇게 그 여자의 아름다움만을 보고 느끼다니. 그게 인간의 사랑이다. 사랑하면 안 되는 다수의 이유로 빗장을 걸어도 그 사람의 단 하나 아름다움이 넘치듯 쏟아져 들어올 때 물들어 버리는. 사랑하는 이의 아름다움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남자가 탐하는 아름다움은 요코의 것 역시 마찬가지지만 가장 충만한 아름다움은 고마코의 것이다. 닿을 수 있었던 아름다움 역시 고마코의 것이다. 요코를 향한 시선은 동경을 넘어서 설국이 만든 환상이었다고 생각한다.

시마무라가 계속 주워내는 죽은 곤충은 무엇을 설명하는 걸까? 왜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굳이 이 흰 눈의 나라에 어울리지 않는 소리, 곤충 유해가 바스락거리는 소음을 끼워 넣는가? 그건 아무래도 허무 때문. 사랑도 죽음처럼 언젠가 말라 스러질 거라는걸. 분명 시마무라는 저자 가와바타를 투영한 주인공일 것이며, 아무리 민감해진 지금 사랑이라도 언젠가 무디어져 흩어질 거라는 거라 생각하기에 고마코에게 확신을 주지 않는 것이리라. 허무에 시달리는 인간은 섣불리 사랑을 표현하지 못한다. 사랑이 찾아와도 솔직하지 않다. 자기 자신에게 가장 그리하지 못한다. 고마코의 사랑이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 때문, 허무를 종교로 믿는 남자를 사랑하는 건 그렇게나 슬프다.

이런 생명력 없으며 이기적인 남자, 그 주제에 사랑에 목마른 남자가 고마코는 어디가 좋았던 걸까? 소설을 읽으며 언제나 하는 버릇이 있다. 나는 어떤 인간에 가까운가 하는. 굳이 고마코와 요코에 비하자면 나는 요코 쪽이다. 나는 그렇게 자존심 상하는 사랑은 안 한다. 나에게 100퍼센트를 걸지 않는 남자에게 나는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곧 죽을 운명일지라도 내게 인생을 거는 이만을 나는 사랑한다. 그래서 고마코가 더욱 안쓰럽다, 가장 서러운 선택을 했기 때문에. 사랑 때문에 비참함을 느끼는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게다가 끝내 동등할 수 없는 남자를 상대로 가장 나쁜 패를 쥔 여자가 여기 있다.

왜 『설국』이 노벨문학상을 받을 만한 작품인지 와 닿지 않는다. 분명 시대의 문제가 있을 테고, ‘오리엔탈리즘’의 안경 말고는 그 어떤 이해도 내게 와닿지 않는다. 무엇이든 2018년을 살아가는 내게 ‘옛 여자의 운명’은 서글프기 그지없고, 이기적인 안도감만 베푼다.

어찌 되었건 이 책에서 부정할 수 없는 미덕은 하나다. 아름다움의 감각. 『설국』으로 확신한다. 사랑에는 촉수가 있다는걸. 이 책의 모든 글줄에는 촉감이 가득하다. 어느 한 군데 직설적인 장면이 없는데도 이 애매모호함 가운데 에로틱한 촉감이 축축하게 내 피부에 와닿았다. 하다못해 소리도 촉감처럼 들린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누군가를 사랑할 때의 형언(形言)할 수 없는 감각을 형언하였다. 놀라운 성과다.

사랑은 감각으로 스민다. 처음엔 온도로, 나중엔 촉감으로. 사랑은 민감하다. 그걸 아는 사람만이 『설국』을 온몸으로 읽어낼 수 있을 것. 『설국』덕으로 내 사랑을 충만히 사랑할 수 있을 것.

‘감각의 책’을 덮었으니 이제, 이 희뿌연 겨울의 아름다운 사랑을 하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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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의 교양 (반양장) - 지금, 여기, 보통 사람들을 위한 현실 인문학
채사장 지음 / 웨일북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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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부터 저녁까지 꼬박 하루를 쓰는 출장이라도 쉴 시간이 없는 게 아니다회의 마치고 대기시간집중업무 마치고 또 대기시간식사 마치고 또 대기시간이 있다들고간 책도 다 읽고나면 이때 빛을 발하는 것이 내 사랑 이북 리더기이천권이 넘게 들어있는 페이퍼 프로’(사실 이천권은 못 들어가고 백 권 정도다용량 때문에 그건 불가능하다.)를 훑다가 오래전 다운로드 받아둔 책 뭉텅이를 발견했다공통점은 저자 채사장’. 서사가 중요한 책이 아니라 개념과 정보가 돋보이는 책이라 자투리 시간에 읽기에 딱이다. (나는 이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처음 읽는 책처럼 새로운데 역시 온동네 정확한 핵심 줄긋기가 내가 이 책을 분명 열심히 읽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지적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두 권과 시민의 교양을 연이어 읽느라 주말을 투자했다정말 그러면 안 되지만 이런 참고서형 요약노트 정말 속시원하다어쩜 이렇게 구조화를 할 수 있나완전 매트릭스(분석도구)의 책이다세 책은 모두 교양을 위한 책이고이 교양은 세상의 구조에 대해 이해하는 능력이다지적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두 권은 각각 역사경제정치사회윤리와철학과학예술종교신비를 정보개념 위주(?) 간결히 정리했다면시민의 교양은 시민’, 즉 나 자신이라는 키워드에 맞추어 실생활 피부에 와닿도록 쓴 책이다. ‘시민의 합리적 선택을 위한 세상의 구조화라고 하는데무엇이 더 좋다 하기는 어렵지만 후자의 책이 좀더 쉽다(?)고 해야 할까뭐 하나 멀리할 개념이 없으니
 
시민은 사회와 개인의 근본적 대립을 모순 없이 내포하는 단어세금국가자유직업교육정의미래를 각 꼭지로 하여 시민’, ‘대통령’, ‘비서실장’ 등을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를 끌어내는데좀 우스꽝스럽기는 하지만 흐름은 부드럽다내게 크게 새로울 정보는 없었지만 직업과 교육의 이야기를 눈여겨보았고, ‘학교의 형식 이야기를 매트릭스 아니라 여러 각도로 보려 했다수업중에 이야기해 주려고 그랬다이 표를 사용해서 진로지도도 하고 아는 척을 좀 해보려고
 
다른 건 모르겠지만 지적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2에서 ‘예술’을 설명하는 방법이 대단하다고 느꼈다. 예술을 구조화할 수 있다니! 물론 이 구조화가 절대 정확하지는 않다. 그러나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처음 설명할 때 이보다 쉽게 설명할 수는 없지 않을까? 한편 신비부분은 내게 좀 어려웠다채사장이 타 인문학-자기계발 저자와 다른 점이 있다면 꼭 신비를 고집한다는 점인데, (이것 때문에 꼭 타 저자독자에게 안티를 몰고 오지만그 부분이 내게는 강점으로 느껴진다나도 신비에 관심이 있으니답 없는 인생을 경험해 본 사람만이 종교에 매달리고 신비를 갈구하는 게 아닐까그런 면에서 채사장은 내게 호감형 저자인 게 분명하다
 
일 년에 한번쯤은 읽어보면 좋은 책칠판에 판서할 일 많은 교사에게 유용할 책. 중고등학교 참고서를 좋아했던 사람들, 비교적 초보독서러에게 추천한다. 프로독서러라면 너무 ‘당연한’ 내용일 수도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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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뉴요커는 되지 못했지만 - 나는 나답게 살기로 했다
곽아람 지음 / 아트북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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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와 닮은 사람을 만나면 쉽게 잊지 못한다작가 역시 그렇다책을 읽다가 너무나 나다운 이야기를 읽으면 얼어붙는다. ‘그녀의 기질, ‘그녀의 에피소드, ‘그녀가 사랑한 책들 모두가 나와 같았다그래서였다 그녀의 신간을 읽어야만 했던 이유
 
나는 여간해서 놀 줄 모르는 모범생이다아침 7시 반까지 실기실에 가서 성실하게 그림을 그렸고시험 때마다 하루걸러 밤을 꼴딱꼴딱 새우며 4.0이 훌쩍 넘는 성적표를 받아들었으며, 130여 명 가까이 되는 학생 중에 4등으로 교직이수를 했다아주 우수한 성적으로 학교를 졸업했고생고생을 하긴 했지만 취업 후에는 단 한 번의 결근 없이 직장을 다녔다아무리 아픈 날에도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 수업에 들어가 꾸역꾸역 일정을 마치다 쓰러지기도 했다미련할 정도로 모범적으로 산다성실하게 산다이게 나다운 삶이다
 
그러나 모범적으로 살지 않아도 나다운 삶이다저자 곽아람은 모범적으로 살던 자기 삶을 잠시 스톱하고 뉴욕에서 연수를 받기로 한다어학연수를 하는 것도심각한 공부를 하는 것도박사논문을 쓰는 것도 아닌그저 뉴요커로서의 을 살아보기로 한다그저 살아가기만 하는 일거기에서 그녀는 나다움을 찾아낸다. 특별히 새로운 일을 해낸 게 아니다. 그녀답게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을 오가며그림을 공부하고그림 이야기를 하고배우고 성장하는… 이전의 그녀답고 지금의 그녀다운 일
 
결국 뉴요커는 되지 못했지만의 주제는 뚜렷하게 나다움이지만 내가 이 책에서 느낀 단 하나의 감정은 새로움보다는 부러움이었다.
 소련의 한 미학자가 아는 그림을 보러 미술관에 가는 건 그리운 친구를 만나러 가는 것과 같다는 얘기를 했어. 책이나 음악과 달리 그림은 복사본을 소유하는 게 의미가 없잖아. 장소 특정적이라 그 도식의 미술관에 가야만 볼 수 있다는 것이 그림과 관람자 간의 관계를 형성하게 한다는 거지. 어떤 그림에 대해 특별한 감정을 느끼게 되는 건 그런 관계 때문이라는 거야.” (P.60) 뉴욕 맨하튼에 살면서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을 제 집 드나들듯 오가며 지낼 수 있다니, 호퍼의 그림을 안팎으로 살아볼 수 있다니. 뒤러의 그림을 파고들 수 있다니. 플로린 스테트하이머의 그림을 실물로 볼 수 있다니. 이건 다 내가 상상할 수 없는 환상의 세계다. 나와 너무도 닮은 기질의 저자가 이야기하는 모범생 인생이 성실하게 놀듯 살아본 1’, 영화처럼 그림과 함께 노닐며 살았던 1년, 미국그것도 뉴욕에서 1년을 노는 듯(?) 보낼 수 있다니 부럽기 그지없다
 
나는 아직 그녀처럼 놀아볼(?)’ 생각이 없다. 여전히 아등바등하고 미래를 철저히 대비하고 있다. 이런저런 사정 덕에 사회경제적 기반을 잡지 못해서라는 핑계를 대지만, ‘하고 싶은 것이 새로이 불타오르지 않았기 때문이 더 크다얼마 전 자신의 욕망이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 내가 한 대답이란 고작 프로독서러가 되는 것’ 정도였으니그마저도 며칠을 골머리를 썩어카프카처럼 밤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뭐였는지 헤아리고 헤아려 찾아낸 열망이었다지금은 다른 것보다 책 읽는 게 가장 재미있다물론 이마저도 언제나 자리를 내줄 준비를 하고 있다나도 푹 빠진 무언가 혹은 누군가가 생길 수도신나게 놀고 싶을 때가 올지도 모르니. (지금으로썬 BTOB가 될 확률이 가장 크다.) 어찌되었건 저자는 대단한 사람이다. 자기 욕망을 확실히 인지하고 실제 그렇게 살아보았으니. 

가끔 기회가 되면 아이들에게 이야기한다, 
얘들아미술쌤이 많이 특이하긴 하지그런데 말야늬들이 잘 모르는 게 있어사람들은 다 특이해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어사람들은 자꾸 평범한 사람이라는 걸 만들어서 사람들을 한 모양에 끼워맞추거든그런데 기준이 되는 사람이란 건 존재할 수 없어그건 불가능한 거야그러니까 너희들이 조금 다른 친구들을 욕하고 왕따 시키고 그러다 싸우고 그러는 거 아냐근데늬들이 나를 보고 저 선생 진짜 특이해, 근데 저러고도 꿋꿋이 잘 사네. 저 성질 가지고도 안 꿀리네. 좀 멋지네.라는 생각을 하고 나면세상에 다양한 사람이 제 방식대로 살아간다는 걸 좀더 알게 되지 않을까? 나는 늬들이 나를 통해 사람에 대한 이해가 넓어질 거라고 생각해. 이걸 자뻑이라고 욕해도 나는 상관없어.” 기실 나는 그리 일반적인 교사다운 데가 하나도 없는 교사다. 선배교사들은 그러지 말라고 (그러면 승진 못 한다고) 하시지만 이건 내가 타고난 기질이라 어쩔 수 없다. 처음부터 그랬고 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공감 못 받으면 어때, 제대로 일하고 월급만 받으면 된다. 

결국 뉴요커는 되지 못했지만』의 부제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주황색 잉크로 살포시 인쇄된 ‘나는 나답게 살기로 했다’라는. 나도, 나도, 나도,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내 발이 재빨리 가닿았으면 좋겠다. 다시 춤을 출 수 있으면 좋겠다. 자지러지게 웃고 크게 소리 지를 수 있으면 좋겠다. 눈치 보지 않고 애교 뿜뿜을 퍼부을 수 있으면 좋겠다. 아직도 내 마음은 열여덟 싱싱한 자신만만한 그대로이니, 내가 바라는 어떤 모습이어도 좋겠지만, 지금 나 그대로 에너제틱하게 무어라도 할 수 있다. 요즘 이것이 내 관심이고 내 확신이다. 
“지금 무엇이어도 나는 나다.”  그저 사는 일에 충실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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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무해한 사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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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란 건 순간이란 게 아름답고도 아프구나.” 

비투비의 노래를 듣다가 눈물을 흘렸다가냘픈 슬픔이 휘청거릴 때 빛나는 아름다움을 느꼈기 때문최은영의 내게 무해한 사람을 읽다가도 이 가사를 떠올렸다이 연약함이 숨막히게 아름다워서모든 아름다운 것이 아프기 그지없어서

내게 무해한 사람은 일곱 개의 단편 모음이다사실 단편집을 좋아하지 않는다특히 한국 현대 단편소설은 내게 난해하다고나 할까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도 매년 사 읽지만 분절된 이야기와 낯선 분위기에 구체적인 상황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그럼에도 이 최은영의 소설을 집어든 이유는 전작 쇼코의 미소에서의 신뢰다비교적 이 작가의 단편은 현실적이다역시 나는 현실에 뿌리박은 이야기를 좋아한다

한편 이 현실에는 무엇이 피어나는가내가 발견한 이 소설의 꽃은 사랑과 상처다당연하다사랑이 있는 곳에는 상처가 남는다그럼에도 다시 살아가는 인간이 남는다넌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으려 하지그리고 그럴 수도 없을 거야. (중략넌 내게 무해한 사람이구나.” 고백에서의 이 독백은 미주의 깨달음이지만 틀린 깨달음이기도 하다그 누구도 상처를 주지 않는 이가 없기 때문이다시간이 상처를 무디게 해준다는 사람들의 말은 많은 경우 옳았다하지만 어떤 일들은 시간이 지날수록그 진상을 알아갈수록 더 깊은 상처를 주기도 했다.” “아마 미주는 자신을 안타까이 보는 무당의 그 슬픈 눈빛을 이겨내지 못했을 것이다우리는 때때로 타인의 얼굴 앞에서 거스를 수 없는 슬픔을 느끼니까너의 이야기에 내가 슬픔을 느낀다는 사실이 너에게 또다른 수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은 채로.” 내가 가장 마음에 들어 했던 단편도 고백이었다어떻게 생각하면 가장 단순한 플롯누군가에게 주었던 상처를 외면하다가 직면하고 누군가를 찾아 쏟아내는 이야기

신의 현존에는 분명 그가 말한 위안이 존재했다그런데도그런 밤이 있었다사람에게 기대고 싶은 밤나를 오해하고 조롱하고 비난하고 이용할지도 모를그리하여 나를 낙담하게 하고 상처 입힐 수 있는 사람이라는 피조물에게 나의 마음을 열어 보여주고 싶은 밤이 있었다사람에게 이야기해서만 구할 수 있는 마음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고 나의 신에게 조용히 털어놓았던 밤이 있었다.” 고백

이 연약하고 쓸쓸한 인간이라니내가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이런 비참한 인간이 소설에서 감각되는 민감함따뜻한 온도에서 가슴이 무너지는 느낌과 함께 무너지는 독자나에게 연민을 느끼고 귀하다 아름답다 바라보는 그 따뜻한 품에 뛰어들고 싶다그게 이 순간 누구더라도나의 마음을 기대고 싶다

이렇게 살포시 기댄 우리는 알고 있다무너져내린 마음이 흩어진 마음을 부여잡고 부끄러운 얼굴을 감출 때멋쩍게 웃으며 다시 일어날 거라는 것모른척 담담한 척 지내다가 다시마음을 열어 보여주러 찾아올 거라는 걸나를 오해하고 조롱하고 비난하고 이용할지도 모를그리하여 나를 낙담하게 하고 상처입힐 수 있는” 사람에게 다시 달려올 거라는 걸설령 곧 그렇더라도지금 이 따뜻함 때문에

사람이란 신기하지서로를 쓰다듬을 수 있는 손과 키스할 수 있는 입술이 있는데도그 손으로 상대를 때리고 그 입술로 가슴을 무너뜨리는 말을 주고받아난 인간이라면 모든 걸 다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하는 어른이 되지 않을 거야.” 모래로 지은 집

최은영의 글은 뭐라 말할 수 없이 내 마음 같다먹먹해서 내가 차마 표현하지 못하던 내 마음을 이렇게 정확하게 표현하다니얼마나 여러 번 독서노트를 펴봤는지얼마나 여러 번 되뇌었는지그리고 얼마나 여러 번 눈물을 흘렸는지. 잠시 안심하고 나의 마음을 열어 보여주고 싶은 소설그게 나에게는 내게 무해한 사람이었다

아름답고도 아픈 이여, 지금 당신은 내게 무해한 사람’, 나는 지금 당신에게 무해한 사람인가요? 괜찮다면, 정말 그렇다면 부끄러워 도망칠 때까지 안아줄게요. 

… 나도 책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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