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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국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1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평점 :
‘감각의 책’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을 덮으며 내가 내린 결론이다. ‘설국(雪國, 유키구니)’이라는 제목 역시 이 ‘감각’을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하얀 눈이 흩뿌리는 나라, 뿌연 흰빛이 공기를 가득 채운 세계, 어떤 곳을 보아도 블러(blur, 흐림)처리된 이미지 뿐. 어디에도 환상 그뿐이다. 애매모호한 사람과 감정, 그리고 감각뿐이다.
『설국』의 주인공은 둘, 혹은 셋이다. 남주인 시마무라와 여주인 고마코, 그리고 비중은 적지만 여자주인공과 대조된 모습으로 강한 이미지를 남기는 요코.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시마무라의 입장에서 서술되지만 가장 중요한 건 두 여자다. 눈의 나라를 가득 채운 두 여자의 아름다움, 이 아름다움에 압도된 한 남자의 얼어붙은 행동이 이 소설의 모든 것이다.
이 남자, 시마무라는 말 그대로 한량이다. 무용 전문가라고 하지만 실상은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돈으로 온천 순례가 연례행사인 금수저. 이 물렁한 남자의 특기는 아름다움을 보고 느끼는 일이다, 그 중에서도 여자의 아름다움을. 흐릿한 남자는 일에도 인간관계에도 사랑에도 이도 저도 아닌 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유랑하며 그저 산다. 그 어떤 집착도 없다, 그냥 목숨이 붙어 있으니 살아갈 뿐이다. 허무함을 한껏 만끽한다. 아름다움만 보고 듣고 만지고 느낀다. 그런 남자를 사랑하게 된 여자 고마코, 게이샤로 살면서 한 남자와 인연도 맺지만 사람 마음이 흐르는 걸 어쩔 수 없어 시마무라를 사랑한다. 한때 그녀의 연적이었던 요코는 곁에 머물며 또 다른 허무를 발산하고 시마무라의 시선은 계속 요코의 뒤를 따른다. 그녀 역시 또 달리 아름답기에.
시마무라는 부정하고 싶지만 고마코를 사랑한 것이 분명하다. 절대 고마코를 받아들일 생각은 없으면서, 그렇게 그 여자의 아름다움만을 보고 느끼다니. 그게 인간의 사랑이다. 사랑하면 안 되는 다수의 이유로 빗장을 걸어도 그 사람의 단 하나 아름다움이 넘치듯 쏟아져 들어올 때 물들어 버리는. 사랑하는 이의 아름다움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남자가 탐하는 아름다움은 요코의 것 역시 마찬가지지만 가장 충만한 아름다움은 고마코의 것이다. 닿을 수 있었던 아름다움 역시 고마코의 것이다. 요코를 향한 시선은 동경을 넘어서 설국이 만든 환상이었다고 생각한다.
시마무라가 계속 주워내는 죽은 곤충은 무엇을 설명하는 걸까? 왜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굳이 이 흰 눈의 나라에 어울리지 않는 소리, 곤충 유해가 바스락거리는 소음을 끼워 넣는가? 그건 아무래도 허무 때문. 사랑도 죽음처럼 언젠가 말라 스러질 거라는걸. 분명 시마무라는 저자 가와바타를 투영한 주인공일 것이며, 아무리 민감해진 지금 사랑이라도 언젠가 무디어져 흩어질 거라는 거라 생각하기에 고마코에게 확신을 주지 않는 것이리라. 허무에 시달리는 인간은 섣불리 사랑을 표현하지 못한다. 사랑이 찾아와도 솔직하지 않다. 자기 자신에게 가장 그리하지 못한다. 고마코의 사랑이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 때문, 허무를 종교로 믿는 남자를 사랑하는 건 그렇게나 슬프다.
이런 생명력 없으며 이기적인 남자, 그 주제에 사랑에 목마른 남자가 고마코는 어디가 좋았던 걸까? 소설을 읽으며 언제나 하는 버릇이 있다. 나는 어떤 인간에 가까운가 하는. 굳이 고마코와 요코에 비하자면 나는 요코 쪽이다. 나는 그렇게 자존심 상하는 사랑은 안 한다. 나에게 100퍼센트를 걸지 않는 남자에게 나는 아무것도 주지 않는다. 곧 죽을 운명일지라도 내게 인생을 거는 이만을 나는 사랑한다. 그래서 고마코가 더욱 안쓰럽다, 가장 서러운 선택을 했기 때문에. 사랑 때문에 비참함을 느끼는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게다가 끝내 동등할 수 없는 남자를 상대로 가장 나쁜 패를 쥔 여자가 여기 있다.
왜 『설국』이 노벨문학상을 받을 만한 작품인지 와 닿지 않는다. 분명 시대의 문제가 있을 테고, ‘오리엔탈리즘’의 안경 말고는 그 어떤 이해도 내게 와닿지 않는다. 무엇이든 2018년을 살아가는 내게 ‘옛 여자의 운명’은 서글프기 그지없고, 이기적인 안도감만 베푼다.
어찌 되었건 이 책에서 부정할 수 없는 미덕은 하나다. 아름다움의 감각. 『설국』으로 확신한다. 사랑에는 촉수가 있다는걸. 이 책의 모든 글줄에는 촉감이 가득하다. 어느 한 군데 직설적인 장면이 없는데도 이 애매모호함 가운데 에로틱한 촉감이 축축하게 내 피부에 와닿았다. 하다못해 소리도 촉감처럼 들린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누군가를 사랑할 때의 형언(形言)할 수 없는 감각을 형언하였다. 놀라운 성과다.
사랑은 감각으로 스민다. 처음엔 온도로, 나중엔 촉감으로. 사랑은 민감하다. 그걸 아는 사람만이 『설국』을 온몸으로 읽어낼 수 있을 것. 『설국』덕으로 내 사랑을 충만히 사랑할 수 있을 것.
‘감각의 책’을 덮었으니 이제, 이 희뿌연 겨울의 아름다운 사랑을 하러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