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그림 - 그림 속 속살에 매혹되다
유경희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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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역사를 통들어 대부분의 여자는 ‘나쁜 여자’다. 예쁜 여자도 나쁜 여자, 못생긴 여자도 ‘나쁜 여자’, 똑똑한 여자도 ‘나쁜 여자’, 미련한 여자도 ‘나쁜 여자’다. 예민하고 무섭고 똘똘하고 무능한 나는 어디에 속하려나, 어떻게 해도 ‘나쁜 여자’에 속할 확률이 90퍼센트다. 그래서인가, 그걸 알아버린 요즘 여자들은 착한 여자가 될 생각은 애당초 던져버렸다. 하고 싶은 대로 한다. 예쁜 옷도 안 입고 화장도 안 한다. 가급적 결혼도 출산도 안 한다. 당하고만 있지 않는다. 학교에서도 회사에서도 사회에서도 당한 만큼 갚아주려 기를 쓴다.

이 책에 소개된 여러 그림들은 ‘나쁜 그림’이라 소개되었으나 대개의 주인공은 ‘나쁜 여자’다. 당하는 대개의 조연은 ‘착한 남자’다. 역시 시간에 흥건한 팜파탈의 역사다. 분명 여자는 똑똑하다, 아니 원하는 만큼 얼마든 똑똑해질 수 있는 게 여자다. 여자는 타고날 때부터 주어진 권력이 없기 때문이다. 권력을 가지려면 수없이 머리를 굴리고 또 굴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여자의 속성이 슬프면서도 나는 좋다. 여자로 태어나 만족스러운 건 단 하나, 사회적 약자라는 인식이다. 2등 시민으로 태어나 끊임없이 노력하고 새로워지려는 노력에 나는 자부심을 가진다. 내게 주어진 이 운명을 순전히 받아들이면서도 나는 이 운명에 번번이 반항하지 않은 적이 없다. 이 발악이 나의 자존심이고 나의 기쁨이다. 그러므로 이 책의 모든 ‘나쁜 여자’들은 나와 같은 여자다. 발악하는 여자만이 역사에 남는다, 적어도 이미지 한 컷으로 남는다. 그녀들은 만족하지 않겠지만 나름 대단하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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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신화
닐 게이먼 지음, 박선령 옮김 / 나무의철학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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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세계’ 북유럽 신화를 읽으면서 얻은 감각이다. 왜일까, 그리스 로마 신화는 자부심을 느낄 만큼 샅샅이 알고 있으면서도 북유럽 신화를 접한 건 처음이다. 마블 영화에 나온다는 ‘토르’, 아날로그시계 브랜드인 ‘오딘’이 북유럽의 신 이름이라니 그간 전혀 몰랐다. 오래된 SNS 친구 ‘펜리르’의 얼굴을 상상한 적이 있다. 용사보다는 귀족의 이미지로 그를 기억했다. 그러나 그가 녹색 눈을 한 개의 이름을 빌어왔다니 친구의 취향이 새롭다. 세상은 이다지도 넓고 내가 선 곳은 이처럼 좁다. 소설가 닐 게이먼의 입담을 빌려 그들의 이야기를 흥미진진 겉핥기 했다.

그들의 세계는 거대하다. 낯선 이름이 머릿속에서 뒤죽박죽되어 몇 번이고 앞 페이지로 돌아가 확인해야 했다. 신의 세계 아스가르드, 인간 세계 미드가르드, 거인족 세계 요툰하임을 상상하느라 초반 책에 몰입하는 데 오랜 시간이 소모했다. 생각해보니 북유럽의 무엇도 아는 것이 없다. 스칸디나비아 지역의 화가 몇 명 아는 정도뿐. 그곳의 지형과 문화유산, 특히 건축이 어떻게 생겼는지는 No No No Idea다. 자연히 내 머릿속 공간은 넓이도 높이도 색채도 장식도 제멋대로다. 신의 형상도 목소리도 내 마음대로다. 북유럽 신화의 영상물과 게임을 한 번도 접해보지 않은 내 아쉬움이자 반대로 특권이랄까. 두 번 읽을 때까지 에너지를 꽤 썼다.

올림푸스의 신들과 다른 점은 명확하다. 아스가르드의 신들은 보다 복합적이다. 힘의 강약이 절대적이지 않다. 무적의 신이 아니다, 지혜를 얻으려고 눈을 대가로 치를 정도로(오딘). 힘은 좋지만 어리석음의 캐릭터일 정도로(토르). 교활하기 그지없어 미움을 사면서도 사건 해결사로 활약할 정도로(로키). 완전한 선도 없고 완전한 악도 없다. 다들 그만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수시로 타협한다. 보다 인간적이다. 스토리마다 주인공이 수시로 바뀐다. 상황에 휘말려 우왕좌왕하기 일쑤다. 사건은 몇 겹으로 꼬인다. 그래서 스토리가 길다. 그들이 지닌 능력 아이템도 굉장히 구체적이다.

그들은 멸망한다. 마지막 전쟁 라크나로르로 인해서. 말도 안 된다, 신도 재앙을 피하지 못하다니. 신조차도 바꿀 수 없는 재앙이 있다니 너무나 인간의 세계를 맛보고 있는 신이 아닌가. 어쩌면 이 신은 인간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인간의 고통을 기꺼이 도울지도 모른다. 


새로이 경험한 거대한 감각, 새로운 세계. 삶은 역시 살아볼 만한 건가, 세계가 확장되는 감각이 이전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기쁘다. 그럴 때 조금 행복하다. 북유럽 신화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대세다. 특히 영화·영상 분야에서 그래 보인다. 앞으로 만날 일상에서 북유럽 신화의 낯선 이름을 만날 때 반가웁지 않을까. 앞으로도 나는 또 다른 이야기를 만나고 확장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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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극장 - 막이 내리고 비로소 시작되는 아버지, 어머니의 인생 이야기
노명우 지음 / 사계절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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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지욕기생(愛之欲基生)’ 논어 12권 10장의 이 구절을 나는 사랑한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람을 살게끔 하는 것이다’ 사람은 언제 살아있음을 자각하는가. 단언컨대 사랑할 때다. 사랑받을 때다. 사랑하고 사랑받을 때 사람은 자기 생명을 축복한다. 반짝반짝 빛나는 특별한 한 인간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사랑은 탐구다. 사회학자 노명우가 열심히 모으고 제시한 영화와 노래의 파편이 아니라면 이 책은 특이점이 없고, 여기 서술된 ‘그들’의 이야기는 크게 새로울 것이 없다. 일제강점기에서 전쟁, 산업화를 지나는 굴곡 많은 시기다. 남자는 여자를 만났고 아이를 넷 낳았으며, 가부장적인 남자는 밖에서 돈을 벌어오고 크게 반항할 수 없는 여자는 아이를 위해 인고의 시간을 거치고 아이 넷은 성장한다. 갑남을녀(甲男乙女) 선남선녀(善男善女)의 이야기는 어디에서나 비슷하다. 그러나 넷째 아이가 1924년생 노병욱 요셉과 1936년생 김완숙 세실리아의 삶을 사랑으로 가까이 가 탐구했을 때, 두 사람은 특별한 인생 책이 되었다.

사람은 사랑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닌가, 나의 곁을 나의 사랑으로 만들고파 먹고 마시고 움직이며 하루하루를 맺어가는 것이 아닌가. 누구나 자신이 가진 것을 다 쏟아 사랑한다. 자기의 재능으로 사랑을 표현한다. 자기 재능으로 누군가를 정성스레 빛낸다. 그를 생생하게 살게 한다. 노명우에게는 그것이 자기 학문이었다. 글이었고 사회이미지였다. 자기가 쌓아온 인생 자원으로 잘 보이지 않는 부모를 탐구한다.

사랑은 언제든 시작할 수 있다. 중년의 노명우가 부모의 사망을 눈앞에 두고 (아주 늦게) 새로운 사랑의 프로젝트를 시작했듯, 언제든 사랑은 시작되고 정성어린 과정을 거쳐 맺어질 수 있다. 어느 때고 늦지 않은 게 사랑이다. 정성을 들인다면 사랑은 사랑다워진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람을 살게끔 하는 것이’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정성을 들이는 것이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그 사람에게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다. 사랑하기 딱 좋은 노명우의 지적·심적 자원이 심히 부럽다. 나는 무엇으로 어떻게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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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이 길이 되려면 - 정의로운 건강을 찾아 질병의 사회적 책임을 묻다
김승섭 지음 / 동아시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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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0월 15일 오후 두 시, 나는 보신각 앞으로 걸어갔다. 먼저 달려온 수많은 여자들이 검은 옷을 입고 빽빽이 앉아 있었다. 이날 내가 참석했던 시위는 일명 《검은 시위》, 이 주 전 (10월 3일) 폴란드에서 있었다던 동명의 그 시위를 2016년의 한국에서 내가 참가하게 될 줄은 얼마 전까지는 상상도 못했다.

보건복지부는 2016년 9월 22일부로 의료법 시행령, 의료법 시행규칙 개정안을 발표했다. 여기에는 비도덕적 진료행위로 모자보건법을 위반해 임신중절 수술을 하는 일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를 어겼을 경우 12개월간 산부인과 의사의 자격정지를 내릴 수 있도록 명시했다. 이에 의사들은 반발하여 중절수술을 전면 중단하겠다는 내용을 발표했다.

대부분의 여성은 성폭력에 대한 공포를 안고 산다. 적어도 현재의 한국 사회에 적을 두고 살아가는 여성이라면 그렇다. 어느 설문에서 보았던가, 크거나 작거나 성희롱과 성추행 이상의 사건을 겪지 않은 한국 여성은 5프로 미만이었다. 성폭력의 공포는 자연스레 원치 않는 임신의 두려움, 낙태에 대한 공포로도 이어진다. 성인이 된 여자들이라면 대부분 쉬쉬하며 안다. 친구 누군가가 낙태를 한 적이 있으며, 그것 때문에 얼마나 큰 정신적 고통을 겪었는지, 그리고 어떤 후유증이 왔는지. 어느 병원에서 해 주었고 얼마를 지불했는지. 나 같은 사람도 화를 못 견디고 시위에 참여하게 된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나 하나라도 그들 편에 서고 싶었다.

목차를 주르륵 훑어보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을 선택한 이유는 낙태금지법 문제를 책의 앞쪽에 비치하며 ‘낙태의 경험은 평등하지 않다’고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2017년의 여성을 살고 있는 내게 공감은 중요했다. 의사이며 사회 역학자인 저자는 꼼꼼하게 데이터를 모으고 보여주며 조곤조곤하게 누군가의 아픔을 이야기한다. “한국 정부는 계속해서 여성의 몸을 통제하고 관리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 의사결정 과정에서 당사자인 여성은 항상 배제되었습니다. 이 예민하고도 복잡한 문제를 진정 해결하고 싶다면, 여성이 왜 낙태를 선택하려고 하는지에 대해 질문하고 그 고통스러운 당사자의 목소리에 차분히 귀를 기울이는 것이 시작일 것입니다.” 이 예민하고 조심스러운 말솜씨만으로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충분했다.

나는 늘 궁금했다. 왜 누군가는 나면서부터 건강하고 누군가는 나면서부터 그토록 아픈지, “나의 모든 것(대개 단점)은 DNA 때문”이라고 웃으며 말하면서도 그것이 맞는 말인지 잘 몰랐다. 저자 김승섭은 ‘성인이 되어도 몸에 남겨진 태아의 경험’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우리 모두는 특정한 시대에 특정한 공동체에서 특정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희로애락의 다양한 경험을 하지요. 그 경험들은 태아기의 굶주림처럼 우리가 인지하고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몸에 새겨져, 때로는 당뇨병의 원인이 때로는 우울증의 원인이 되어 우리 삶에 끊임없이 영향을 줍니다. 그렇게 오래 전 사회가 남긴 상처가 인간의 몸속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또한 늘 슬퍼했다. 왜 가난한 사람은 더 많이 아픈지, 보험도 치료비도 없어서 병원에도 갈 수 없는데 왜 그들이 더 아파야만 하는지. 세상은 더 잔인하다고만 생각했다. ‘가난은 우리 몸에 고스란히 새겨진다’는 꼭지는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가난이 정직하게 몸을 변형한다는 것을 알게 했다. 고흐의 그림에서 보이는 변형된 손과 구부러진 어깨, 꼬부라진 허리를 가진 사람들은 2017년 대한민국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몸의 소유자다. 그들의 지나친 노동 때문에 관절이 닳고 뼈가 휘어서 그렇게 되었다고만 생각했다. 저자가 서술한 해부학의 세계는 놀라웠다. 제대로 매장하지 못해 사체 절도범이 파내어 팔아넘긴 몸. 가난한 사람의 몸만 해부학의 역사로 기록되었기에, 가난으로 변형된 몸이 일반 내장인 것처럼 기록되었다고.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살아 있을 때의 경제적 불평등이 죽음 이후에도 지속된다는 점 외에도 중요한 함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시체만 해부되고 기록되면서 해부학의 역사에는 여러 오점이 남습니다. 왜냐하면 가난은 인간의 몸을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오랜 시간 사회적 금기였던 인체해부는 가난한 사람들의 몸을 발판으로 한 걸음씩 전진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해부학적 지식 뒤에는 가난으로 인해 물건을 훔치다가 사형을 당한, 가난으로 인해 구빈원에서 죽어갔던 이들의 몸의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나는 아직도 “자른다”라는 말을 들으면 아찔하니 몸서리가 쳐진다. 이내, 역겹기까지 하다. “아무래도 계속 함께 일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라는 말을 두고 그런 폭력스러운 말을 쓰다니. 이십 대의 불안정한 시절, 재계약 날짜가 시시각각 다가오거나 오너가 직장 사정을 들어 해고를 이야기했을 때의 공포는 내 몸에 고스란히 남았다. 십 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그렇다. “우리 모두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내가 해고를 당했을 때, 한국사회가 나를 돌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요.” 쌍용차 해고노동자가 굴뚝에 올랐을 때 동네를 돌며 버스정류장마다에 지지 포스터를 붙였던 이유는 바로 이 공감이었다. “한국과 같이 실업자의 재취업을 위한 실질적 지원이 없고 그들이 기댈 수 있는 공적 안전망이 취약한 사회에서 ‘해고는 살인’이 되기도 합니다. 정리해고는 노동자의 잘못이 아닌 사용자 측 사정으로 인한, 경영상 이유에 의한 해고를 뜻합니다. 노동자는 귀책사유가 없지만 생계기반을 잃게 되는 거대한 피해를 입기 때문에 정리해고는 매우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에는 이외에도 잠 못 자고 일하는 의사,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는 소방공무원, 원진레이온,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삼성과 원진레이온 직업병 사건, 세월호 유가족과 재난의 기록, 존재를 부정하는 성소수자, 가습기 살균제 사망사건, 존재를 부정당하는 성소수자의 아픔이 성실한 데이터와 함께 기록되어 있다. 모든 사람은 슬픔의 그릇이 아닐까,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은 더 큰 그릇을 갖고 있어 타인의 슬픔을 받아 간직하는 것이 아니려나. 감히 생각하건대 그의 성실은 사랑이었다. 만약 내가 제목을 붙였다면 《누군가는 그들 편에 서야 한다》라고 붙였으리라.

책을 읽으며 내내 ‘좋은 저자의 매력’에 빠져들었고 저자의 그릇이 부러웠다. 개인적으로는 사회 역학자로서의 저자의 분석보다 저자의 에세이가 따뜻했다. 저자의 다음 책이 궁금해지는 것은 글에 담긴 내용 때문이기도 하지만, 글에 스민 작가의 성품이기도 하다. 솔직히, 위로가 돼서 여러 번 울었다. 사회학 책을 읽다가 울다니, 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요 저자님!

김승섭의 첫 책이다. 글자 하나하나에 정성이 담겼다. 꼭지 하나하나가 얼마나 탁월한지 부러울 정도였다. 저자에게 있어 책을 쓰는 일은 행동하는 일이었다. 행동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리고 늘 행동하는 사람은 마음이 가득한 사람이다. 그래서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만이 길을 닦는다.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이 길에 이끌어 올 수 있다.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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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야 하는 이유 - 불안과 좌절을 넘어서는 생각의 힘
강상중 지음, 송태욱 옮김 / 사계절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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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슬픔의 딸로 태어났다. 맑고 밝은 기쁨에 속한 이도 있고, 평정과 온유에 속한 이도 있으나, 안타깝게도 나는 그리되지 못했다. 뼈저린 슬픔에 나의 가슴은 언제나 반응하고, 절절한 슬픔에 언제나 이끌린다. 목구멍은 언제나 헐었고, 심장은 언제나 피맺힌 상태다.

『살아야 하는 이유』는 날카로운 신음의 묵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표지를 열고 <한국의 독자들에게>의 첫 문장을 읽고 다음 문단... 그의 아들을 잃었다는 고백과 함께 쏟아진 슬픔은 내게도 동일한 날카로움으로 쏟아졌다. 그랬다. 나는 울었다. 아들을 잃은 그의 고통 때문이 아니라, 아들이 겪어온 고통이 내게 쏟아져 내렸기 때문이었다. 아들은 불치의 신경증으로 ‘자신의 출생을 저주’했다. 그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자신의 파멸과 세계의 파멸을 바랐다는 아들의 소망 역시 내게는 거울과도 같았다. 나는, 오래오래 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대로 죽어지지 않아 나는, 아직까지 살아 있다.

“이런 비참을 겪고도, 그래도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라는 아들의 물음을, 저자는 동일본 대지진 앞에서 다시 떠올려 묻는다. 수많은 사람들이 재앙 가운데 존재를 저주하고 행복의 허무함을 깨닫는다. 인간이 본디 비참한 존재라는 것을 확인한다. 저자 강상중은 자본주의의 환상 가운데 잊혀온 존재의 존재성을 다시 불러일으킨다.

“‘호모 파티엔스’란, ‘차라리 죽는 게 낫다’, ‘살아있을 의미 같은 건 없다’는 절망에 계속해서 내몰리는 수용소의 상황에서도 ‘인간적으로 고민하고 싶다’는 바람을 포기하지 않고 지겨운 끝에 다다른 말이기 때문에 아주 무거운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적어도 내게 ‘고민하는 인간’은 존엄한 인간이다. 고민이라면 나쓰메 소세키가 이야기한 돈, 사람, 가족, 자아의 돌출, 세계에 대한 절망뿐이겠는가. 살아있다는 것 자체가 투쟁이고 반항이며 긍정일 텐데. 살아있기 위해 손에 닿는 모든 것을 고민해야 한다. 손에 닿지 않는 모든 것을 긍정해야만 한다.

한편 왜 살아 있어야 하는가?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최고의 고민거리다. 강상중은 환상이란 없음을 넌지시 말하지만 나는 거기에 또다시 묻는다. 사람은 환상으로 사는 것이 아니냐고. 생은 거대한 고통이고, 연약한 인간은 환상을 덮는다. 환상이 아니라 환각이어도 좋다. 특별히 내일을 살고 싶어서가 아니라 순간을 견디기 위해서이다.

모든 절망은 미증유의 절망이다. 새롭지 않은 절망은 없다. 더욱 괴롭지 않은 절망은 없다. 그러므로 인간은 모든 고통 앞에서 낯설다. 이때의 해답은 아무것도 없다. 그저 나 자신을 순간에 맡길 뿐이다. 고통을 직면하던지, 휩쓸려가던지, 싸워 이기든지 정답은 없다. 모두 우연이다. 거대한 불행 앞에서는 인간의 의지도 크게 작용하지 않는다. 이 절망 앞에서 인간은 죽어지고, 또한 온전히 죽어지지 않아 한번 더 살아간다. 그러므로 “‘건전한 마음’으로 보통의 일생을 끝내는 ‘한 번 태어나는 형’보다는 ‘병든 영혼’으로 두 번째 삶을 다시 사는 ‘거듭나기’의 인생이 더 중요하다.” 단 한 번의 생물학적 생에서 사람은 몇 번이고 영혼의 장례를 다시 치르고 치른다. “다시 살아나 이 세상에 돌아오기를 각오한 사람”이 여기에 있다. 그런 사람은 아픔을 감추고 아름다운 태도로 존엄을 세운다. 그의 아픔은 잠시 보이지 않는다. ‘살아 있음으로’ 나날이 존엄하고 아름다운 이가 되어간다. 그는 아픔을 읽고 느끼는 사람이 된다. 그것이 또다시 살아있는 이유가 된다. 저자의 아픈 아들이 그러했고, 계속 아픈 저자가 더욱 그러했듯이.

언제나 그랬다. 나만 살고 싶지 않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때, 나는 잠시 더 살아갈 수 있었다. 나의 고통 역시 누군가에게 실낱같은 삶의 의지가 되어주리라. 만약 내가 태어난 이유가 있다면, 내가 이렇게 지독하게 불행했던 이유가 있다면, 분명 누군가를 ‘위로’하려는 목숨이었기 때문이라고. 운명론자인 나는 믿는다.『살아야 하는 이유』가 그랬던 것처럼 나의 존재도 분명 그렇다고. 이것이 나의 믿음이고 이것이 나의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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