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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이 길이 되려면 - 정의로운 건강을 찾아 질병의 사회적 책임을 묻다
김승섭 지음 / 동아시아 / 2017년 9월
평점 :
2016년 10월 15일 오후 두 시, 나는 보신각 앞으로 걸어갔다. 먼저 달려온 수많은 여자들이 검은 옷을 입고 빽빽이 앉아 있었다. 이날 내가 참석했던 시위는 일명 《검은 시위》, 이 주 전 (10월 3일) 폴란드에서 있었다던 동명의 그 시위를 2016년의 한국에서 내가 참가하게 될 줄은 얼마 전까지는 상상도 못했다.
보건복지부는 2016년 9월 22일부로 의료법 시행령, 의료법 시행규칙 개정안을 발표했다. 여기에는 비도덕적 진료행위로 모자보건법을 위반해 임신중절 수술을 하는 일이 포함되어 있었고, 이를 어겼을 경우 12개월간 산부인과 의사의 자격정지를 내릴 수 있도록 명시했다. 이에 의사들은 반발하여 중절수술을 전면 중단하겠다는 내용을 발표했다.
대부분의 여성은 성폭력에 대한 공포를 안고 산다. 적어도 현재의 한국 사회에 적을 두고 살아가는 여성이라면 그렇다. 어느 설문에서 보았던가, 크거나 작거나 성희롱과 성추행 이상의 사건을 겪지 않은 한국 여성은 5프로 미만이었다. 성폭력의 공포는 자연스레 원치 않는 임신의 두려움, 낙태에 대한 공포로도 이어진다. 성인이 된 여자들이라면 대부분 쉬쉬하며 안다. 친구 누군가가 낙태를 한 적이 있으며, 그것 때문에 얼마나 큰 정신적 고통을 겪었는지, 그리고 어떤 후유증이 왔는지. 어느 병원에서 해 주었고 얼마를 지불했는지. 나 같은 사람도 화를 못 견디고 시위에 참여하게 된 데는 이런 배경이 있었다. 나 하나라도 그들 편에 서고 싶었다.
목차를 주르륵 훑어보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을 선택한 이유는 낙태금지법 문제를 책의 앞쪽에 비치하며 ‘낙태의 경험은 평등하지 않다’고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2017년의 여성을 살고 있는 내게 공감은 중요했다. 의사이며 사회 역학자인 저자는 꼼꼼하게 데이터를 모으고 보여주며 조곤조곤하게 누군가의 아픔을 이야기한다. “한국 정부는 계속해서 여성의 몸을 통제하고 관리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 의사결정 과정에서 당사자인 여성은 항상 배제되었습니다. 이 예민하고도 복잡한 문제를 진정 해결하고 싶다면, 여성이 왜 낙태를 선택하려고 하는지에 대해 질문하고 그 고통스러운 당사자의 목소리에 차분히 귀를 기울이는 것이 시작일 것입니다.” 이 예민하고 조심스러운 말솜씨만으로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는 충분했다.
나는 늘 궁금했다. 왜 누군가는 나면서부터 건강하고 누군가는 나면서부터 그토록 아픈지, “나의 모든 것(대개 단점)은 DNA 때문”이라고 웃으며 말하면서도 그것이 맞는 말인지 잘 몰랐다. 저자 김승섭은 ‘성인이 되어도 몸에 남겨진 태아의 경험’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우리 모두는 특정한 시대에 특정한 공동체에서 특정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희로애락의 다양한 경험을 하지요. 그 경험들은 태아기의 굶주림처럼 우리가 인지하고 기억하지 못할지라도 몸에 새겨져, 때로는 당뇨병의 원인이 때로는 우울증의 원인이 되어 우리 삶에 끊임없이 영향을 줍니다. 그렇게 오래 전 사회가 남긴 상처가 인간의 몸속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또한 늘 슬퍼했다. 왜 가난한 사람은 더 많이 아픈지, 보험도 치료비도 없어서 병원에도 갈 수 없는데 왜 그들이 더 아파야만 하는지. 세상은 더 잔인하다고만 생각했다. ‘가난은 우리 몸에 고스란히 새겨진다’는 꼭지는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가난이 정직하게 몸을 변형한다는 것을 알게 했다. 고흐의 그림에서 보이는 변형된 손과 구부러진 어깨, 꼬부라진 허리를 가진 사람들은 2017년 대한민국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몸의 소유자다. 그들의 지나친 노동 때문에 관절이 닳고 뼈가 휘어서 그렇게 되었다고만 생각했다. 저자가 서술한 해부학의 세계는 놀라웠다. 제대로 매장하지 못해 사체 절도범이 파내어 팔아넘긴 몸. 가난한 사람의 몸만 해부학의 역사로 기록되었기에, 가난으로 변형된 몸이 일반 내장인 것처럼 기록되었다고.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살아 있을 때의 경제적 불평등이 죽음 이후에도 지속된다는 점 외에도 중요한 함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시체만 해부되고 기록되면서 해부학의 역사에는 여러 오점이 남습니다. 왜냐하면 가난은 인간의 몸을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인류 역사에서 오랜 시간 사회적 금기였던 인체해부는 가난한 사람들의 몸을 발판으로 한 걸음씩 전진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해부학적 지식 뒤에는 가난으로 인해 물건을 훔치다가 사형을 당한, 가난으로 인해 구빈원에서 죽어갔던 이들의 몸의 역사가 있는 것입니다.”
나는 아직도 “자른다”라는 말을 들으면 아찔하니 몸서리가 쳐진다. 이내, 역겹기까지 하다. “아무래도 계속 함께 일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라는 말을 두고 그런 폭력스러운 말을 쓰다니. 이십 대의 불안정한 시절, 재계약 날짜가 시시각각 다가오거나 오너가 직장 사정을 들어 해고를 이야기했을 때의 공포는 내 몸에 고스란히 남았다. 십 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도 그렇다. “우리 모두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습니다. 내가 해고를 당했을 때, 한국사회가 나를 돌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요.” 쌍용차 해고노동자가 굴뚝에 올랐을 때 동네를 돌며 버스정류장마다에 지지 포스터를 붙였던 이유는 바로 이 공감이었다. “한국과 같이 실업자의 재취업을 위한 실질적 지원이 없고 그들이 기댈 수 있는 공적 안전망이 취약한 사회에서 ‘해고는 살인’이 되기도 합니다. 정리해고는 노동자의 잘못이 아닌 사용자 측 사정으로 인한, 경영상 이유에 의한 해고를 뜻합니다. 노동자는 귀책사유가 없지만 생계기반을 잃게 되는 거대한 피해를 입기 때문에 정리해고는 매우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아픔이 길이 되려면」에는 이외에도 잠 못 자고 일하는 의사,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는 소방공무원, 원진레이온,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 삼성과 원진레이온 직업병 사건, 세월호 유가족과 재난의 기록, 존재를 부정하는 성소수자, 가습기 살균제 사망사건, 존재를 부정당하는 성소수자의 아픔이 성실한 데이터와 함께 기록되어 있다. 모든 사람은 슬픔의 그릇이 아닐까,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은 더 큰 그릇을 갖고 있어 타인의 슬픔을 받아 간직하는 것이 아니려나. 감히 생각하건대 그의 성실은 사랑이었다. 만약 내가 제목을 붙였다면 《누군가는 그들 편에 서야 한다》라고 붙였으리라.
책을 읽으며 내내 ‘좋은 저자의 매력’에 빠져들었고 저자의 그릇이 부러웠다. 개인적으로는 사회 역학자로서의 저자의 분석보다 저자의 에세이가 따뜻했다. 저자의 다음 책이 궁금해지는 것은 글에 담긴 내용 때문이기도 하지만, 글에 스민 작가의 성품이기도 하다. 솔직히, 위로가 돼서 여러 번 울었다. 사회학 책을 읽다가 울다니, 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요 저자님!
김승섭의 첫 책이다. 글자 하나하나에 정성이 담겼다. 꼭지 하나하나가 얼마나 탁월한지 부러울 정도였다. 저자에게 있어 책을 쓰는 일은 행동하는 일이었다. 행동하는 사람은 드물다. 그리고 늘 행동하는 사람은 마음이 가득한 사람이다. 그래서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만이 길을 닦는다.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만이 다른 사람을 이 길에 이끌어 올 수 있다. 마음이 아름다운 사람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