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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학 개요 프로이트 전집 15
프로이트 지음, 박성수 옮김 / 열린책들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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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정신분석학 개요』| 박성수 (옮긴이) | 열린책들 | 2004 - 프로이트 전집 15” 中「나의 이력서」(Die Medizin der Gegenwart in Selbstdarstellung, 1925)에 대한 리뷰이다.  「나의 이력서」는 짧은 분량 탓에, 프로이트 정신분석의 세세한 면모를 간취하긴 어렵지만, 그의 사상의 성좌를 그려볼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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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의 생애는 곧 (초기) 정신분석의 역사다. 프로이트 자서전,「나의 이력서」는 그 자신이 이끌었던 정신 분석의 내적 성장과 외적 운명을 시차적 관점에서 조망한다. 예나 지금이나 ‘정신=의식’라 믿는 사람들에게 “모든 정신적인 것은 우선 무의식적인 것”이라는 정신분석학의 대전제는 단지 머릿속에서 지어낸 궤변에 불과하다. 그러나 침대에 누워 사색을 즐겼던 데카르트 후예들의 과분한 염려와는 달리, 정신분석은 신경증을 진료하던 현장에서 얻은 구체적인 관찰과 시행착오로 성장한 학문이다. 프로이트를 충실히 만나려면, 무엇보다 신경증 치료법 전환이 정신분석 이론을 한 단계씩 성숙시켰던 매개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정신분석의 태동이 1885년 봄 프랑스 파리, 살페트리에르 병원, 샤르코가 진행했던 히스테리에 관한 실험에서 시작된 것은 그래서 당연하다. 거기서 프로이트는 최면 암시로 인위적인 히스테리적 마비와 수축을 만들어낼 수 있고, 여자들만의 생리적 질병으로 치부되던 히스테리가 남자에게도 일어난다는 것을 처음으로 발견한다. 정신에 가해진 어떤 조작이 (히스테리와 동일한) 신체 이상을 만들어냈다 것은 히스테리가 정신 질환일 가능성을 추론 가능케 했던 것이다.

그 후 프로이트는 전기 치료법과 최면술을 병행하다, (이후 결별하게 되는) 브로이어 박사에게 배운 일명 ‘굴뚝청소’라 불렸던 (최면을 이용한) 감정정화법을 신경증 치료에 적용하고, 그 임상결과를『히스테리 연구』로 발표한다. 아직까지는 히스테리에 대한 관찰 내용만을 서술한 데 지나지 않았고, “증상의 유지를 위해 사용된 일정량의 정동이 잘못된 길에 들어 그곳에 갇혀 있을 때 이를 정상의 길로 인도하여 발산되도록 소산하려는 것이 그의 치료적 목적”이었다. 환자를 지배하는 정동적인 환상을 ‘말로 표현하게’ 해 억압된 정신활동을 발산시키면, 증상이 호전되곤 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신경증 배후에 막연한 정동적 흥분이 아니라, “현재의 성적 갈등이든 과거의 성적 체험의 여파이든, 한결같이 성적 흥분”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치료 과정에서 숱하게 경험한다. 게다가 감정 정화를 위한 최면술의 한계에 봉착하면서, 그는 1892년 가을부터 최면술을 ‘집중의 기술’로 대체하고, 이후에는 좀 더 적극적으로 환자의 역할을 풀어놓는 ‘자유 연상법’을 채택한다. 이를 통해 정신분석은 급속하게 성장하는데, “최면으로 인해 이제까지 가려져 있던 [정신적인] 힘들의 작용이 드러나고, 그것을 파악함으로서 이론은 보다 안전한 기반을 확보”하였기 때문이다.

자유연상법을 도입하면서부터 프로이트는 환자들이 의식에 무언가를 떠올리지 않으려는 ‘저항’에 직면한다. 이를 역으로 추적해서 얻은 결론이 바로 ‘억압이론’이었다. 소위 정상인들의 정신적 갈등은 의식이 허용치 않는 본능이 패배하면서, 덩달아 에너지 집중도 중단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신경증에서는 본능적 충동과 의식적 저항 사이의 경합이 다른 결과로 빠지고 만다. “자아는 불쾌한 본능적 충동과 처음 충돌하게 되면 말하자면 움츠러들어, 그것이 의식에 들어와 직접 발산되는 것을 막는다. 그러나 이로 인해 본능적 충동은 그것의 에너지 집중량을 완전히 유지하게 된다”. 즉, 의식에 의해 억압된 본능적 충동은 단지 의식 밖으로 은폐되었을 뿐, 에너지량 자체는 그대로 생생히 살아 있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자아는 억압된 충동을 틀어막느라 용을 쓰다가 황폐해지고, ‘무의식화된 억압된 충동’은 우회적인 방식으로 발산과 대리충족의 길을 찾으면서 신경증을 유발한다는 것. 이제 “치료의 목적은 잘못된 길에 들어선 정동의 소산이 아니라, 억압을 찾아내어 전에 거부되었던 것을 받아들이거나 폐기하도록 하는 판단 행위로 억압을 대체하는 것”으로 전환된다. 프로이트는 이러한 자신의 새로운 이론적 기반을 토대로 한 연구 및 치료 방법을 ‘정신분석Psychoanalyse’이라 불렀다. 
 

이와 더불어, 프로이트는 자유 연상법의 도입 이전부터 신경증이 성적 충동에 기반한다는 것을 자주 겪게 되면서, 병의 원인을 환자의 아동기까지 찾아들어가고, 유아 성욕이라는 사실에 직면한다. 유아는 성적 쾌락을 (구순기, 항문기, 남근기로 점차 나아가는) 제 자신의 신체에서 찾는다. 이러한 자가 성애의 단계 이후, 아이는 어머니에게 성적 원망을 집중시키고, 아버지를 경쟁자로 적대시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겪으며, 거세 위협으로부터 아버지라는 이름의 법을 받아들임으로써 사회에 진입한다.

유아 성욕은 ‘순정하고 순진한 유아’라는 그간의 ‘믿고 싶었던 이미지’를 뒤집어버린데 1차적으로 기여했지만, 그 보다는 성욕 개념 확장이라는 측면에 진정한 의의가 있다. 요컨대, “첫째, 성욕을 성기와 맺는 밀접한 관계에서 분리시켜, 쾌락을 목표로 하는 2차적으로나 생식에 봉사하는 보다 포괄적인 신체기능으로 보았다. 둘째, 우리의 언어사용에서 사랑이란 모호한 말로 불리는 다정하고 호의적인 모든 충동을 성충동으로 간주하였다.” 이것은 프로이트 정신분석의 핵심인 무의식화된 억압된 충동의 성격을 밝히고 그것의 보편성을 획득하기 위해 반드시 전제되는 것이다. 

1900년에 출판된『꿈의 해석』은 정신분석을 획기적으로 도약시킨다. 이것은 예지몽이나  기껏 정신의 경련으로 치부했던 꿈이라는 현상을 근대과학 영역에 편입시킨 좁은 의미에만 머물지 않는다. 프로이트가 밝혔듯이. 누구나 꾸는 꿈이 “이미 신경증적 증상과 같이 구성되어 있”고, “자아 속에서 일어난 억압된 본능적 충동과 검열하는 힘의 저항 사이의 타협의 산물”이라면, 우리는 모두 (예비) 신경증을 앓고 있는 셈이다. 신경증 환자와 정상인의 차이는 기껏 “물질들의 큰 차이가 동일한 원소들의 결합 비율의 양적 변화”에 따라 다른 것과 진배없다. 『꿈의 해석』 이후에야, 정신 병리학의 보조학문에 묶여있었던 정신분석은 인간 정신구조에 대한 보편적 탐구로 확장할 수 있었다.

여태까지는 억압되는 것에만 머물렀던 프로이트의 지적 관심은 ‘억압하는 것’, 즉 자아 보존 본능으로 확장되고, 이것은 쾌락원칙과 현실원칙으로 세분되며, 더 나아가 에로스와 타나토스 사이의 반복강박에 이른다. 말년에 접어들면서 그는 정신분석을 예술 작품의 해석에 응용하기도 하고,『토템과 터부』,『문명 속의 불만』등의 저작을 통해 종교와 인류의 기원을 연구한다. 이것은 보편 이론 체계 구축을 운명으로 짊어진 모든 학문의 행로에 충실한 결과였으며, 인간에 대한 통시적 이해의 한 축을 풍부하게 하는데 기여한 것이기도 했다. 프로이트 이후에도 정신분석운동은 그의 적자와 탕자들에 의해 계속 되었고, 인간 주체는 의식 중심의 달콤한 독선에서 깨어날 수밖에 없었다, 무의식이라는 거대한 심연을 마주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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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헌재 2014-09-11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부분적으로 도움이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김영민의 공부론 - 인이불발, 당기되 쏘지 않는다
김영민 지음 / 샘터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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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당한 권력일수록 폭력으로 연명하는 법이라, 옛 중국의 흉포한 어느 황제도 제 수족같은 100명의 궁사를 늘 거느리고 있었다. 언제나 그는 방울이 달린 작은 깃발 하나를 들고 다녔는데, 그 깃발로 어느 방향을 가리키든 그 찰나 100대의 화살이 정확히 지목한 표적에 박혔다. 어느 날 황제는 뜬금없이 그가 가장 아끼는 후궁을 향해 깃발을 가리켰고, 100대의 화살은 어김없이 그녀의 몸을 밤송이로 만들었다. 헌데 간발의 차이지만 99대의 화살과 달리 1대의 화살이 뒤늦게 박혔고, 왕은 주춤거렸던 그 궁사를 잡아다가 목을 쳐 버렸다. 그 궁사는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절대 권력의 판단과 명령을 의심한 셈이었고, 그는 이미 체계의 단말기로는 고장난 부품에 불과했던 것이다.

비판 정신의 가장 초보적인 덕목이 활을 쏘기 전 감히 생각 따위를 했던 궁사처럼 외적인 명령 체계든 내면의 공리계든 그 호명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는 것, 의심의 눈초리를 줄창 견지하려는 자세인 것은 분명하다.  유태인 학살 과정의 총책임자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기록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한나 아렌트가  ‘사유하지 않음’을 나치즘이 저지른 만행의 뿌리로 지목하였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자신의 개인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데 각별히 근면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는 어떤 동기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 근면함 자체는 결코 범죄적인 것이 아니다. ……그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로 하여금 그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 (결코 어리석음과 동일한 것이 아닌) 철저한 무사유였다.…… 이처럼 현실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과 이러한 무사유가 인간 속에 아마도 존재하는 모든 악을 합친 것 보다 더 많은 대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사실상 예루살렘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었다.”(『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아렌트의 혜안대로, 인간의 악행이 잔혹한 기질과 성격을 가진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평범한 이웃집 슈퍼 아줌마라도 어떤 상황과 조건만 주어진다면, 근면하게 누군가를 학살할 수 있다. 하지만, 그간 많은 평자들이 지적했듯, 아렌트의 ‘나쁜 짓 안하려면, 생각해야 한다’는 해법은 소박하다 못해 실천적으로 무기력하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습속과 무의식에 깊이 각인된 체계의 공리계를 의식적인 사유만으로 변화시키기는 쉽지 않을뿐더러 ‘너무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체계의 질서를 맘먹은 대로 벗어날 수 없는 게 우리 일상의 경험이지 않는가.

오히려 체계와의 싸움은 김영민 선생의 말처럼 “생각은 공부가 아니다!”라는 의식 중심적인 공부와의 단호한 절연 속에서야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자기-생각이라는 게 워낙 타인을 배제하는 속성에 젖어 있기” 때문이다. 레비나스가 인식론을 배격하고 제 1철학의 자리를 윤리학으로 자리바꿈하려던 것도, 아도르노가 부정변증법에서 ‘비개념적인 것’을 강조한 이유도 (개념적) 사유가 가진 동일성의 폐쇄성 때문이었다. 개념의 작동 원리 자체는 개체들의 복잡성을 제거하고, 특정한 유(類) 아래 종속시켜 종차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개념의 그물이 포획할 수 없는 단독성들은 무시당하고 동일성은 그에 맞춰 강화되기 마련이다. 무사유가 문제가 아니라 (자기-생각인 줄도 모르는) 자기-생각에 푹 빠져 있는 게 병통인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 생각의 거울방을 벗어난, 공부라는 그 “돌이킬 수 없는 변화”는 무엇을 매개로 도래하는가? 일례로, 청년 비트겐슈타인과 장년 비트켄슈타인 사이의 변화는, 공부란 필히 ‘타자성과의 마주침’을 통해서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증거한다. 33세의 나이에『논리철학논고』를 발표하고 철학계에 돌풍을 일으킨 후, 철학적 문제를 모두 해결했다며 홀연히 떠났던 그는 다시 케임브리지로 돌아온다. 논리적인 언어만이 말해질 수 있는 것이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해야 한다던 그가 다양한 언어 규칙들을 가진 다양한 언어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철학적 탐구』에서 집약되는 그의 후기 사상의 연원을 케임브리지를 떠난 약 6년 동안의 오스트리아 시골 마을에서의 초등학교 교사생활의 경험에서 짐작해 볼 수도 있을 테다.

“아마도 그가 가장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곳 사람들의 언어 사용이었을 것이다. 매우 고상하고 지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랐던 비트겐슈타인에게 시골 사람들의 삶과 언어생활은 너무도 거칠고 지나치게 감정적인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하고 말할 수 있는 것만을 말하려고 했던 그의 원칙은 그곳에서 볼 때 오직 자기자신만의 원칙에 불과했다는 것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 곳 사람들도 나름대로의 완벽한 언어생활을 구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강신주,『철학 VS 철학』)

하나 유념해 둘 일은, 타자성의 체험이 의도를 벗어나고 우연찮게 찾아온다 해도, 그것은 미래에 도래할 메시아를 기다리듯 절박한 소망만으로 맺어지는 선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전으로서의 공부의 요체는 “‘어떤 틈 속으로 우연찮은 타자성의 체험’에 자신을 넉넉히 노출시킬 수 있도록 준비하는 일이다. 자기체계의 안정화가 아니라 늘 새로운 변화에 기민하도록 탄력있는 긴장의 상태로 스스로를 부단히 조율해 가는 일이다.” 김영민 선생의『공부론』의 부제이기도 한 ‘인이불발(引而不發), 당기되 쏘지 않는다’는 말은 그래서 타자성의 지평 속에서 감응할 수 있을 “몸이 좋은 사람”을 조형해가는 (활이 화살을 당기고 있을 때의) 팽팽한 긴장을 묘사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런 맥락에서『공부론』에서 가장 긴 분량인 ‘글의 공부, 칼의 공부’는 무사들의 싸움과 같은 정직한 학문 현장에 대한 그리움이자 동시에 타자성의 지평에 감응할 수 있는 주체는 어떻게 구성될 수 있는가에 대한 탐문이다. 특히 일본 검객 무사시의 “차림자세가 있으면서 차림자세가 없다”는 것에서 “ ‘없음’은 ‘있음’의 부정이 아니라 있음 그 자체의 극단을 뚫어낸 초극(超克)에 가까운 것이며, 마치 달인의 솜씨가 스스로 그 법식을 해소해 버린 경지를 가르킨다” 그것은 마치 동아시아의 현자들이 “인仁과 의義를 행동으로 옮겼다기보다는 줄곧 인과 의를 통해서through 행동했"(바렐라)던 것과 같은 이치다. 이와 같이 책상과 일상이, 정신과 육체가,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생활양식의 항상적인 리듬을 타고서야 타자성과의 접속은 가능하다. 타자성은 추상적인 판단과 추론의 문제가 아니라 구체적인 몸을 가진 너와 나의 만남에서 도래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지행병진의 길을 뚫어가는 데 있어, 비록 대증요법에 불과하다 해도, ‘자기-생각에 함몰된 전형적인 증상인 냉소와 허영’을 피해가는 길은 긴요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둘은 무엇보다 상징자본으로 먹고 사는 지식인에게는 가장 고질적인 병폐인 탓이다. 냉소와 허영은 체계 속에서의 인정 투쟁에 토대를 둔 나르시시즘의 두 얼굴이다. 흔히 냉소가 인정 투쟁에서 패배한 자들의 방어기제라면, 허영은 대개 제도의 인정 구조에서 승리한 자들의 독점욕이다. 냉소를 양식으로 삼는 자들이 권위를 까대면서 얻는 (니체가 바로 노예의 도덕이라고 불렀던) ‘반동적인reactive’ 이익으로 자신을 긍정한다면, 허영에 꽉 찬 자들은 체계가 부여해준 공식적인 직함/지위에 기생하면서 그 후광을 빌려 근근이 자신을 뽐낸다.

물론 악셀 호네트가 밝혔듯, 상호주관적 인정 유형인 사랑, 권리, 연대를 통해 인간은 자기 신뢰와 긍정 그리고 가치부여를 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그런 만큼 냉소와 허영은 단순히 인정 투쟁 자체를 (생각 속에서) 무시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을 문제가 아니다. 해법은, 인정 투쟁의 틀과 방식을 사회, 정치, 경제적인 영역들 뿐만 아니라 일상의 관계에서마저 바꿔가는 실천과 더불어 “번잡한 욕심이 아니라 하이얀 의욕”을 갖고 그 충실성 속에서 오직 살면서 공부하고, 공부하며 사는 길을 가는 것 뿐이다.

요컨대, 김영민 선생의『공부론』은 ‘인이불발(引而不發), 당기되 쏘지 않는다’는 당기는 것과 쏘는 일 ‘사이’에서 대략 세 가지로 소략하게 갈래지어 진다. 공부란, 1) 의심 많은 궁사처럼 당기되 즉각적으로 쏘지 않는, 체계의 단말기로서의 상명하복을 넘어서는 것이요 2) 당기는 것과 쏘는 일의 분법을 넘어서는, 현자들의 “행하면서 알아가는 수행성의 지혜”를 회복하는 일이며, 3) 당기는 것이 쏘는 일에 종속되지 않는, “기다리되 기대하지 않고, 알되 묵히며, 하이얀 의욕으로 생생하지만 욕심은 없는”, 그래서 당기되 쏘지 않아도 되는, 쏘지 않아도 당겨야만 하는 길이다. 그리하여, 시간의 딸(filia temporis)을 정성스레 공대하는 일, 그게 공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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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orry, monkey
    from 갈대밭 메뚜기 2010-03-29 03:03 
    쥐는 우표만하고 원숭이는 엽서만하고침팬지는 A4 한장 정도고인간은 A4 네장정도다. 꾸불꾸불한 대뇌를 쫘악~하고 펴면 그 정도가 된다는 말이다. 대뇌피질이야 말로 기억능력과 창조능력을 관장하는 고도의 기관이라고 하니..넌 이런 생각이 들꺼야 겨우 A4 네장 정도밖에 안돼?몇 백쪽 짜리 책 수십, 수백권을 읽고 공부를 하는 사람들에게 근면하게 공부해온 너에게 이건 좀 시시하다하겠지아. 그렇게 공들여 완성한 A4네장짜리 ...
 
 
 
여론 조사에서 사회 조사로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68
이성용 지음 / 책세상 / 200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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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문 조사는 지식 권력의 배출구다. 숫자의 마력들은 객관성을 뽐내면서, 사회 실태와 삶의 패턴 그리고 사람들의 머릿속을 대변하려 한다. 흔히 사회과학방법론에서 양적 방법으로 분류되는 설문조사는 경험적 증거를 통해 어떤 현상을 일반화하고자 하는 시도다. 정치인들의 가상 대결부터 잠자리 체위의 경향까지 우리는 설문조사의 통계치 속에서 세상을 읽도록 강제당한다. 곧 보게 될 테지만, 무지와 악의에 얹혀, 숱한 설문조사들이 최소한의 방법적 절차를 무시하고 엉터리 숫자들을 쏟아내고 있다.『여론조사에서 사회조사로』는 그 허접 쓰레기같은 숫자들로부터 덜 오염되고, 주체적으로 설문조사를 사용할 수 있는 구체적인 검증 잣대들을 알려주는 ‘실용교양서’다.   

설문 조사의 질을 총체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잣대를, 미국의 사회학자 그루브스는 사회 조사의 ‘총오차’라는 개념으로 체계화했다. 이것은 우선 크게 설문 조사 과정에서 관찰해야 할 것을 관찰하지 못해 생기는 ① ‘비관찰 오차’와 ② 관찰 과정에서 일어나는 ‘관찰오차’로 나뉜다. 비관찰 오차에는 배제 오차, 표집오차, 무응답오차가 있으며, 관찰 오차에는 설문지에 의한 오차, 면접자에 의한 오차, 응답자에 의한 오차, 자료 수집 방법에 의한 오차 등이 있다. 그루브스가 제시한 일곱 가지 오차에 들어가기 전에 추가로 응답자의 주관적인 생각을 객관적인 수치로 바꾸는 과정을 설명하는 개념화, 조작화 과정에서 고려할 사항들을 먼저 살펴보겠다.

설문지 작성뿐만 아니라 표본추출도 조사 목적이 명확해야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런데, 가령, 한국사회의 남녀평등을 측정하려는 목적으로 설문지를 작성한다면, 당연스레 남녀평등의 개념 정의에 따라 조사 항목이 달라지기 마련이다. 인구학자이자 페미니스트인 캐런 메이슨은 여성의 지위를 위세, 권력, 자원의 통제 등에 의거해 개념화했다. 만약 어떤 주부클럽에서 행한 설문 항목이 위세와 권력에만 치중하고, 자원의 통제를 반영하지 않았다면, 그 결과치는 캐런 메이슨이 작성한 남녀평등의 결과와는 매우 다르게 나올 게 분명하다. 그러니, 설문조사는 그 목적성에 걸맞는 명확한 개념 정립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설문지 자체에서 발생하는 오차부터 살펴보자. 이것은 설문 항목 표현으로 인한 어긋남, 설문 구조로 인한 어긋남, 설문지 번역에서 생길 수 있는 어긋남으로 크게 나눌 수 있겠다.   

 

1) 어긋남 설문지 조사
 *  설문 항목 표현으로 인한 어긋남
똑같은 내용이라도 어떤 식으로 표현하느냐에 따라 설문 조사 결과는 달리 나온다. <<ex>>“여론 조사기관인 갤럽과 미국의 한 연구소인 NORC는 1951년 미국의 한국 전쟁 파병에 대한 미국인의 여론을 알아보기 위해 서로 다른 형태의 질문으로 설문 조사를 한 바 있다. 갤럽의 질문은 “미국이 한국을 방어해주는 것은 잘하는 일입니까 아니면 잘못한 일입니까?”였다. 이 질문에 대해 응답자의 49%는 잘못하는 일이다, 38%는 잘하는 일이다. 그리고 나머지 13%는 잘 모르겠다로 응답했다. 한편 NORC가 사용한 질문은 “미국이 공산주의자의 남한 침략을 막기 위해 미군을 파병하는 것은 잘하는 일입니까 아니면 잘못하는 일입니까?”였다. 이 질문은 갤럽과 상반된 결과를 가져왔다. 응답자의 36%는 잘못하는 일이다, 55%는 잘하는 일이다, 4%는 잘 모르겠다로 응답했다....이런 차이를 발생시킨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공산주의자 침략’이라는 말이다. 은연중에 미군 파병을 정당화하는 쪽으로 응답자를 유도한 것이다.”(p.81~2)

*  설문 구조로 인한 어긋남
설문 항목은 설문지 내의 위치나 순서에 따라 응답자들에게서 다른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일반 질문의 응답은 특정 질문의 위치에 영향을 받지만, 특정 질문의 응답은 일반 질문의 위치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점이다. 따라서 설문지의 항목은 일반적인 내용들을 먼저 질문하는 게 마땅하다. <<ex>>“호주제 존속에 대한 찬성률이 1999년보다 2000년도에 무려 17.8%나 증가했다....1999년도 조사는 성차별과 남아 선호 사상에 관해 먼저 질문 한 후에 호주제에 관해 물었다. 반면 2000년도 조사에서는 호주제 관련 문항들이 설문지의 맨 앞에 있었다.”(p.86~7)

또 하나 응답 범주들은 상호 배타적이고 망라적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ex>>“예를 들어 종교를 묻는 질문에서 응답 범주를 ① 불교 ② 기독교 ③ 천주교 ④ 무교로 구성한다면 이슬람교나 천도교를 믿는 사람은 응답할 수 없게 되므로 망라성에 위배된다....‘기타’라는 항목을 응답 범주로 넣음으로써 그런 위배를 방지하고 있다. 응답 범주가 상호 배타적이어야 한다는 곳은 응답자가 응답 범주들 가운데 단 한 곳만을 선택하게끔 만들어야 한다는 것....종교를 묻는 질문에서 응답 범주를 ① 불교 ② 기독교 ③ 천주교 ④ 장로교 ⑤ 무교 ⑥ 기타로 구성했다고 하자. 기독교와 장로교는 중복된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와 장로교 중에서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지 혼란을 일으킬 것이다. 상호 배타성에 위배되는 것이다.”(p.89)

* 설문지 번역에서 생길 수 있는 어긋남
요즘은 국가 간 비교를 위해 외국의 설문 항목들을 번역해 자국의 국민들에게 사용하곤 한다. 이럴 때, 단어의 의미를 조사 목적에 연계시키지 않고 기계적으로 번역하면 황당한 결과가 나오기 십상이다. <<ex>>“2001년 3월에 《타임》은 한국, 태국, 홍콩, 싱가포르, 필리핀 5개국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한국 남성의 65%, 여성의 41%가 혼외 정사 경험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놀라운 기사를 실었다. 5개국 비교에서 한국의 혼외 정사율은 남녀 모두에서 가장 높았다....당시 한국 조사를 담당한 기관은 홍콩에 본사를 둔 ‘아시아 마켓 인텔리전스(AMI)’ 한국지사였다. 그 기관은《타임》측이 요청한 설문 항목인 “Have you ever been unfaithful?”을 “귀하는 배우자나 파트너(애인)에게 충실하지 않은 적이 있으신가요(외도 등)?”로 번역해 설문 조사를 실시했다....사실 ‘배우자에게 충실하지 않다’는 말은 ‘부정한 일’의 의미보다 ‘배우자에게 잘해주지 못한다’는 의미로 해석되기 쉽다....따라서 한국의 혼외 정사 설문 조사 결과를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혼외 정사 결과와 비교하는 것은 사과와 오렌지를 비교하는 격이다.”(p.95~7)

이러한 오차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단순, 직접 번역 방법 보다는 번역, 역번역 방법으로 행해야만 한다. “번역, 역번역은 네 단계로 이루어진다. 편의상 영어로 된 설문 항목을 우리말로 번역한다고 가정하자. ① 영어 설문지를 한국어로 번역한다. ② 한국어로 된 번역 문항을 미국인이 다시 영어로 번역한다. 이때 역번역 작업을 하는 미국인은 전 단계의 번역 작업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는 사람이어야 한다. ③ 원래의 영어 문항을 만든 사람이 재번역된 영어 문항과 자신의 원래 문항을 비교 검토한다. ④ 만약 둘 사이에서 의미가 차이난다면, 그 의미 차이를 제거하기 위해 다시 번역 작업을 한다.”(p.97)

2) 어긋남 면접자 오차
면접자가 누군가에 따라 설문결과가 달라지기도 한다. 특히, 응답자가 면접자에 대해 사회적 거리를 크게 느낄 경우, 대개는 면접자와의 불필요한 긴장을 피하고자 응답자 자신의 의견을 솔직하게 대답하기 보다는 면접자가 좋아할만한 방향으로 대답하는 경향을 보인다. <<ex>> “인종문제에 대한 설문조사에서 백인 응답자는 백인 면접자일 경우보다 흑인 면접자에게 우호적인 응답을 할 가능성이 높다. 가사와 육아 분담에 대한 설문 조사에서, 남성 응답자는 남성 면접자보다 여성 면접자를 대할 때 가사와 육아의 공동 분담에 더 많은 공감을 표한다.”(p.109)

3) 어긋남 응답자 오차
응답자 오차는 면접 과정이나 조사 과정에서 응답자가 일으킬 수 있는 오차를 말한다. 설문 조사자는 응답자가 질문 내용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고, 응답 행위에 충실할 정도로 동기화되어 있다고 가정하기 쉽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고, 거짓말을 할 줄 아는 존재다. <<ex>> “KBS1 텔레비전의 <2002 금연 전쟁. 담배, 사라질 것인가>라는 프로그램에서는 자기 기입식 설문지를 통해 남자 고등학생 72명에게 흡연 여부를 물었다. 72명 중23명이 담배를 피운다고 답했다. 그러나 학생들의 소변을 검시한 결과 36명이 담배를 피우는 것으로 드러났다. 흡연자의 3분의 1이 거짓 대답을 한 것이다.”(p.113~4)

4) 어긋남 자료 수집 방법 오차
만약 학교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아버지가 어머니를 때리는 것을 본 사람 손들어 보라’고 해 봐라, 누가 저요!저요! 하고 손을 들겠는가. 이처럼 성행위나 마약과 같은 민감한 사항을 묻는 설문조사에서는, 응답자가 실제 사실과 달리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방향에 맞추어 응답할 가능성이 상당히 높은 편이다. 이럴 경우에는 응답자에게 익명성을 확실히 보장해줄 수 있고 면접자에 대한 사회적 거리감을 덜 느끼게 하는 자료 수집 방법을 사용해야만 자료 수집 방법으로 인한 오차를 줄일 수 있다.

5) 어긋남 표집오차
화장품 샘플이 본 상품을 대표하듯 설문조사의 표본은 모집단을 대표해야 한다. 표본 오차란, 샘플이 좋아서 샀는데 본 상품이 다른 것과 마찬가지다. “모집단의 개별 요소들이 표본에 추출될 확률이 알려져 있고 그 확률이 0이 아닌 표집 방법에 의해 표본이 추출되었을 경우에만 표본의 대표성을 말할 수 있다. 그런 표본을 확률표본이라 부른다. 무작위 표본은 확률 표본의 한 예로, 이 역시 모집단의 개별 요소들이 표본에 추출될 확률이 ‘동일한 것’으로 알려진 한 확률 표집 방법에 의해 추출된 표본이다. 그렇다해서 모든 확률 표집 방법에서 모집단의 개별 요소들이 표본에 추출될 확률이 동일한 것은 아니다. 비비례층화 표본과 같이 추출 확률이 동일하지 않지만 알려진 경우도 있으며, 이때 모집단의 모수는 가중치를 사용하여 추론할 수 있다. 반면 비확률 표집 방법으로 추출된 표본은 대표성을 보장할 수 없다....할당 표집 방법은 비확률 표집 중 확률표집과 가장 유사한 접근 방식을 가지며, 그래서 연구자조차 확률 표집 방법으로 혼동한다. 할당표집에서는 모집단의 구성원들을 하위 집단들로 나누고, 하위 집단의 구성비에 비례해 응답자들을 할당한다.”(p.120~123) 이 부분은 조금 복잡한데, 특히 확률 표본과 비확률 표본 중 하나인 할당표본 사이의 구별이 책의 내용만으론 선명하게 잡히지 않는다. 짐작컨대, 모집단의 세부적인 개별 요소를 표본에 추출했느냐, 아니면 모집단을 (개별요소들 보다는 큰 분류 방식인) 하위 집단으로 나누고서 표본을 추출했느냐는 차이로 여겨진다. 

그래서, 설문조사 소비자는 표본이 실제로 추출된 모집단과 연구자가 조사 결과를 해석하고 일반화한 모집단이 일치하는지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아니면, 다음 사례와 같이 어처구니없는 결과가 발생한다. <<ex>>“2001년 1월《타임》의 혼외 정사 설문조사 : 조사대상(표본크기)-만 18~39세 남녀 100명씩, 조사지역-서울 길거리, 조사결과-남:65%, 여:41%. 한국인의 혼외 정사에 대해 조사했다고 발표했지만 실제로는 조사 지역을 서울로 국한했다.....게다가 이 조사는 표본에 기혼자 뿐만 아니라 미혼자까지 포함시켰다. 혼외정사란 배우자 이외의 사람들과의 성관계를 의미하므로 응답자, 즉 정보 제공자를 조사 목적에 부합하는 기혼자롤 국한해야 했다. 심지어 《타임》의 조사 표본에는 기혼자보다 미혼자가 더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남자 응답자의 70%와 여자 응답자의 56%가 미혼자였다.”(p.126) [그 다음에 언급됐던 어긋남 배제 오차는 다소 중복되는 내용이라 생략했다]

6) 어긋남 무응답 오차
무응답 오차는 틀 모집단에서 추출된 표본의 요소들이 관찰되지 못한 결과다. 무응답자는 응답자와 다른 특성을 갖고 있기 쉽기 때문에 무응답률이 높으면 설문 결과에 심각한 오류가 생기고 만다. 예를 들면, <<ex>>“미국에서 이혼한 남편은 법정이 정한 금액의 자녀 양육비를 전부인에게 주게 되어 있다. 이러한 금액에 대한 사회 조사는 무응답한 이혼남은 응답한 이혼남보다 부양비를 덜 주는 경향이 있고, 또 무응답한 이혼남의 평균 부양 금액이 응답한 평균 부양 금액보다 적음을 밝히고 있다.”(p.140) 이럴 경우, 무응답률을 무시하고 응답률을 토대로만 결과치를 뽑을 때 실제 보다 남편의 양육비 부담률이 높아지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 책을 완독하면, 틀림없이 당신도 나처럼 언론에 기사화되는 설문 결과치의 허술함이 현미경으로 변소를 들여다보듯 도드라져 보일 것이다. 그런데 황당함은 잠시, 더 짙은 먹구름이 몰려 올 것인데, 설문조사 대부분이 그 결과를 검증해볼 판단의 잣대를 댈 수 있는 설문조사 절차를 아예 제시하지 않고 있는 것. (칼을 갈아도, 벨 게 없다!) 이런 어처구니들에 냉소하지 않고 "의심의 심연에서 가장 악의적인 곁눈질을 해야 할 의무"(니체)를 포기할 수 없는 까닭은, 더 많은 걸 알 수 없더라도 더 잘못 아는 것을 줄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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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여행 2
김훈 지음, 이강빈 사진 / 생각의나무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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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풍경은 어떤 상처인데, 인간만이 풍경 밖에서 서성이며, 그것을 필요로 하는 까닭이다. 광릉 숲 속의 저 푸른 것들처럼 제 뿌리와 육신만으론 자존할 수 없는, 태생적으로 결핍된 존재들의 정직한 운명. 그 인간들이 짓고 부수며 제 삶을 비볐던 풍경은 그래서 온통 상처투성이다. 걸어가는 자들만이 뒤꿈치의 상처를 가질 수 있다는 것. 생은 영원히 수공업의 존재양식을 벗을 수 없다고도 말해질 수 있겠다. 허나 설령 욕망의 왕성한 촉수들이 제 둘레의 산 것들을 무참하게 뒤틀어도, 아무리 그러해도 인간은 끝내 순정한 단독자이지 못한다. 오직 그것만이 선악 너머 ‘본래 그러함’으로 풍경의 틈새를 비집고 인간의 표정으로 떠오른다.


김훈의 자전거는 그 풍경들을 찾아 헤맨다, 인간이 까놓은 상처를 만난다. 이번에 그가 밟은 땅들은 이 늙은 글쟁이가 저 젊은 한철 내내 제 밥을 벌어먹던 터전의 언저리다. 이들 서울, 경기 지역은 노쇠한 한반도와 신생의 숨결들이 가장 짙고 깊게 중첩되어 있는 곳이다. 마치 혹한의 바람을 일상으로 여기며 자란 나무의 나이테마냥. 남한산성의 치욕과 분단조국의 아픔이 공존하고 일산 신도시의 수직과 남양만 갯벌의 수평이 겹친다. 김포 전류리 포구의 노동과 광릉 수목들의 자존이, 수원화성의 정돈된 꼼꼼함과 모란시장의 활기찬 무질서가 기어이 조화롭다. 이 모두는 삶 안에서 하나로 통일되지 않고 외려 그 역설(逆說)과 부조화의 힘으로 삶을 천천히 밀어간다.


남한산성은 치욕은 삶의 일부라고 말하지만, 또한 실천 불가능한 정의가 실천 가능한 치욕을 긍정하게 하는 밑자락임을 빼먹지 않고 일러준다. 모든 등대는 저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깜박일 뿐이지만, 밤바다를 떠도는 선박의 가야할 길을 제공해주는 것과 같다. 서로의 상대성은 긍정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긍정되어지는 것이다. 이 사태는 억겁의 시간을 집어삼켜도 바뀌지 않는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은 살고자 하는 자들에게 또 다시금 새롭게 태어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세속의 슬픈 운명이지만 삶에게 허락되어진 초월은 세속의 그늘 속에서야 마침내 싹을 틔운다. 


제 스스로를 부양하는 복 받은 나무들마저 홀로 우뚝할 수 없다. 나무들은 개체 안에 세대를 축적한다. 지나간 세대는 동심원의 중심으로 이동하여 무위와 적막의 힘으로 나무의 전 존재를 수직으로 버티어준다. 거죽의 젊음은 그 뼈대에 기대어 물을 빨아들이고 호흡을 하고 열매를 영글어간다. 하지만, 나무의 싱싱한 자존에 10만년 일산의 퇴적층을 딛고 치솟은 인간의 신도시 빌딩과 네온사인 사이의 수용과 단절을 빗대기는 부끄러운 일이다, 삶이든 역사든 오로지 온전할 수 없을 지라도. 인간이 숲을 내내 그리워하는 것은 계몽의 자부심, 그 빛의 세례 속에서도 종교를 품고 사는 이유와 그리 멀지 않아 보인다. 


다시 풍경이 상처라면, 나 밖의 타인들만큼 꼭 그만치 무수한 상처다. 내 존재의 위치를 탐지하러 떠나는 도정은 기필코 너와의 소통을 조건으로 한다. 하지만, 너와의 섞임이 기껏 타인을 거울삼아 제 상처를 거듭 확인하는 자폐적 동선은 아니다. 굴뚝 청소부가 동료의 검댕이 얼굴을 보고 제 얼굴을 부지런히 닦는 것과 같은 짓. 달리 말해, 타인의 이해는 겸허한 무지의 자기고백만으론 되지 않는다. 오히려, ‘벌거벗은 임금님'의 발기된 자지가 쪼그라드는 순간, 바로 그때서야 풍경 속의 상처는 모습을 드러낸다. 그렇게 세상의 풍경과 만나 자신이 온전히 부서질 때 겨우 삶은 새로운 긍정의 물꼬를 틔울 수 있다. 김훈의 문장이 정직한 이유는 너의 상처를 대면하는 나의 힘겨움을 숨기지 않아서다. 그 보다 더 나은 진실은 끝끝내 여기 세상이 그의 문장만큼 아름다울 수는 없을 거라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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