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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민의 공부론 - 인이불발, 당기되 쏘지 않는다
김영민 지음 / 샘터사 / 2010년 1월
평점 :
품절
부당한 권력일수록 폭력으로 연명하는 법이라, 옛 중국의 흉포한 어느 황제도 제 수족같은 100명의 궁사를 늘 거느리고 있었다. 언제나 그는 방울이 달린 작은 깃발 하나를 들고 다녔는데, 그 깃발로 어느 방향을 가리키든 그 찰나 100대의 화살이 정확히 지목한 표적에 박혔다. 어느 날 황제는 뜬금없이 그가 가장 아끼는 후궁을 향해 깃발을 가리켰고, 100대의 화살은 어김없이 그녀의 몸을 밤송이로 만들었다. 헌데 간발의 차이지만 99대의 화살과 달리 1대의 화살이 뒤늦게 박혔고, 왕은 주춤거렸던 그 궁사를 잡아다가 목을 쳐 버렸다. 그 궁사는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절대 권력의 판단과 명령을 의심한 셈이었고, 그는 이미 체계의 단말기로는 고장난 부품에 불과했던 것이다.
비판 정신의 가장 초보적인 덕목이 활을 쏘기 전 감히 생각 따위를 했던 궁사처럼 외적인 명령 체계든 내면의 공리계든 그 호명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않는 것, 의심의 눈초리를 줄창 견지하려는 자세인 것은 분명하다. 유태인 학살 과정의 총책임자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기록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한나 아렌트가 ‘사유하지 않음’을 나치즘이 저지른 만행의 뿌리로 지목하였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자신의 개인적인 발전을 도모하는 데 각별히 근면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는 어떤 동기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그 근면함 자체는 결코 범죄적인 것이 아니다. ……그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로 하여금 그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게 한 것은 (결코 어리석음과 동일한 것이 아닌) 철저한 무사유였다.…… 이처럼 현실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과 이러한 무사유가 인간 속에 아마도 존재하는 모든 악을 합친 것 보다 더 많은 대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사실상 예루살렘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었다.”(『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아렌트의 혜안대로, 인간의 악행이 잔혹한 기질과 성격을 가진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평범한 이웃집 슈퍼 아줌마라도 어떤 상황과 조건만 주어진다면, 근면하게 누군가를 학살할 수 있다. 하지만, 그간 많은 평자들이 지적했듯, 아렌트의 ‘나쁜 짓 안하려면, 생각해야 한다’는 해법은 소박하다 못해 실천적으로 무기력하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습속과 무의식에 깊이 각인된 체계의 공리계를 의식적인 사유만으로 변화시키기는 쉽지 않을뿐더러 ‘너무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체계의 질서를 맘먹은 대로 벗어날 수 없는 게 우리 일상의 경험이지 않는가.
오히려 체계와의 싸움은 김영민 선생의 말처럼 “생각은 공부가 아니다!”라는 의식 중심적인 공부와의 단호한 절연 속에서야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자기-생각이라는 게 워낙 타인을 배제하는 속성에 젖어 있기” 때문이다. 레비나스가 인식론을 배격하고 제 1철학의 자리를 윤리학으로 자리바꿈하려던 것도, 아도르노가 부정변증법에서 ‘비개념적인 것’을 강조한 이유도 (개념적) 사유가 가진 동일성의 폐쇄성 때문이었다. 개념의 작동 원리 자체는 개체들의 복잡성을 제거하고, 특정한 유(類) 아래 종속시켜 종차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개념의 그물이 포획할 수 없는 단독성들은 무시당하고 동일성은 그에 맞춰 강화되기 마련이다. 무사유가 문제가 아니라 (자기-생각인 줄도 모르는) 자기-생각에 푹 빠져 있는 게 병통인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 생각의 거울방을 벗어난, 공부라는 그 “돌이킬 수 없는 변화”는 무엇을 매개로 도래하는가? 일례로, 청년 비트겐슈타인과 장년 비트켄슈타인 사이의 변화는, 공부란 필히 ‘타자성과의 마주침’을 통해서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증거한다. 33세의 나이에『논리철학논고』를 발표하고 철학계에 돌풍을 일으킨 후, 철학적 문제를 모두 해결했다며 홀연히 떠났던 그는 다시 케임브리지로 돌아온다. 논리적인 언어만이 말해질 수 있는 것이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해야 한다던 그가 다양한 언어 규칙들을 가진 다양한 언어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 것이다.『철학적 탐구』에서 집약되는 그의 후기 사상의 연원을 케임브리지를 떠난 약 6년 동안의 오스트리아 시골 마을에서의 초등학교 교사생활의 경험에서 짐작해 볼 수도 있을 테다.
“아마도 그가 가장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곳 사람들의 언어 사용이었을 것이다. 매우 고상하고 지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랐던 비트겐슈타인에게 시골 사람들의 삶과 언어생활은 너무도 거칠고 지나치게 감정적인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하고 말할 수 있는 것만을 말하려고 했던 그의 원칙은 그곳에서 볼 때 오직 자기자신만의 원칙에 불과했다는 것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 곳 사람들도 나름대로의 완벽한 언어생활을 구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강신주,『철학 VS 철학』)
하나 유념해 둘 일은, 타자성의 체험이 의도를 벗어나고 우연찮게 찾아온다 해도, 그것은 미래에 도래할 메시아를 기다리듯 절박한 소망만으로 맺어지는 선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전으로서의 공부의 요체는 “‘어떤 틈 속으로 우연찮은 타자성의 체험’에 자신을 넉넉히 노출시킬 수 있도록 준비하는 일이다. 자기체계의 안정화가 아니라 늘 새로운 변화에 기민하도록 탄력있는 긴장의 상태로 스스로를 부단히 조율해 가는 일이다.” 김영민 선생의『공부론』의 부제이기도 한 ‘인이불발(引而不發), 당기되 쏘지 않는다’는 말은 그래서 타자성의 지평 속에서 감응할 수 있을 “몸이 좋은 사람”을 조형해가는 (활이 화살을 당기고 있을 때의) 팽팽한 긴장을 묘사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런 맥락에서『공부론』에서 가장 긴 분량인 ‘글의 공부, 칼의 공부’는 무사들의 싸움과 같은 정직한 학문 현장에 대한 그리움이자 동시에 타자성의 지평에 감응할 수 있는 주체는 어떻게 구성될 수 있는가에 대한 탐문이다. 특히 일본 검객 무사시의 “차림자세가 있으면서 차림자세가 없다”는 것에서 “ ‘없음’은 ‘있음’의 부정이 아니라 있음 그 자체의 극단을 뚫어낸 초극(超克)에 가까운 것이며, 마치 달인의 솜씨가 스스로 그 법식을 해소해 버린 경지를 가르킨다” 그것은 마치 동아시아의 현자들이 “인仁과 의義를 행동으로 옮겼다기보다는 줄곧 인과 의를 통해서through 행동했"(바렐라)던 것과 같은 이치다. 이와 같이 책상과 일상이, 정신과 육체가,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생활양식의 항상적인 리듬을 타고서야 타자성과의 접속은 가능하다. 타자성은 추상적인 판단과 추론의 문제가 아니라 구체적인 몸을 가진 너와 나의 만남에서 도래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지행병진의 길을 뚫어가는 데 있어, 비록 대증요법에 불과하다 해도, ‘자기-생각에 함몰된 전형적인 증상인 냉소와 허영’을 피해가는 길은 긴요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둘은 무엇보다 상징자본으로 먹고 사는 지식인에게는 가장 고질적인 병폐인 탓이다. 냉소와 허영은 체계 속에서의 인정 투쟁에 토대를 둔 나르시시즘의 두 얼굴이다. 흔히 냉소가 인정 투쟁에서 패배한 자들의 방어기제라면, 허영은 대개 제도의 인정 구조에서 승리한 자들의 독점욕이다. 냉소를 양식으로 삼는 자들이 권위를 까대면서 얻는 (니체가 바로 노예의 도덕이라고 불렀던) ‘반동적인reactive’ 이익으로 자신을 긍정한다면, 허영에 꽉 찬 자들은 체계가 부여해준 공식적인 직함/지위에 기생하면서 그 후광을 빌려 근근이 자신을 뽐낸다.
물론 악셀 호네트가 밝혔듯, 상호주관적 인정 유형인 사랑, 권리, 연대를 통해 인간은 자기 신뢰와 긍정 그리고 가치부여를 할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그런 만큼 냉소와 허영은 단순히 인정 투쟁 자체를 (생각 속에서) 무시한다고 해서 피할 수 있을 문제가 아니다. 해법은, 인정 투쟁의 틀과 방식을 사회, 정치, 경제적인 영역들 뿐만 아니라 일상의 관계에서마저 바꿔가는 실천과 더불어 “번잡한 욕심이 아니라 하이얀 의욕”을 갖고 그 충실성 속에서 오직 살면서 공부하고, 공부하며 사는 길을 가는 것 뿐이다.
요컨대, 김영민 선생의『공부론』은 ‘인이불발(引而不發), 당기되 쏘지 않는다’는 당기는 것과 쏘는 일 ‘사이’에서 대략 세 가지로 소략하게 갈래지어 진다. 공부란, 1) 의심 많은 궁사처럼 당기되 즉각적으로 쏘지 않는, 체계의 단말기로서의 상명하복을 넘어서는 것이요 2) 당기는 것과 쏘는 일의 분법을 넘어서는, 현자들의 “행하면서 알아가는 수행성의 지혜”를 회복하는 일이며, 3) 당기는 것이 쏘는 일에 종속되지 않는, “기다리되 기대하지 않고, 알되 묵히며, 하이얀 의욕으로 생생하지만 욕심은 없는”, 그래서 당기되 쏘지 않아도 되는, 쏘지 않아도 당겨야만 하는 길이다. 그리하여, 시간의 딸(filia temporis)을 정성스레 공대하는 일, 그게 공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