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전거여행 2
김훈 지음, 이강빈 사진 / 생각의나무 / 2004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모든 풍경은 어떤 상처인데, 인간만이 풍경 밖에서 서성이며, 그것을 필요로 하는 까닭이다. 광릉 숲 속의 저 푸른 것들처럼 제 뿌리와 육신만으론 자존할 수 없는, 태생적으로 결핍된 존재들의 정직한 운명. 그 인간들이 짓고 부수며 제 삶을 비볐던 풍경은 그래서 온통 상처투성이다. 걸어가는 자들만이 뒤꿈치의 상처를 가질 수 있다는 것. 생은 영원히 수공업의 존재양식을 벗을 수 없다고도 말해질 수 있겠다. 허나 설령 욕망의 왕성한 촉수들이 제 둘레의 산 것들을 무참하게 뒤틀어도, 아무리 그러해도 인간은 끝내 순정한 단독자이지 못한다. 오직 그것만이 선악 너머 ‘본래 그러함’으로 풍경의 틈새를 비집고 인간의 표정으로 떠오른다.


김훈의 자전거는 그 풍경들을 찾아 헤맨다, 인간이 까놓은 상처를 만난다. 이번에 그가 밟은 땅들은 이 늙은 글쟁이가 저 젊은 한철 내내 제 밥을 벌어먹던 터전의 언저리다. 이들 서울, 경기 지역은 노쇠한 한반도와 신생의 숨결들이 가장 짙고 깊게 중첩되어 있는 곳이다. 마치 혹한의 바람을 일상으로 여기며 자란 나무의 나이테마냥. 남한산성의 치욕과 분단조국의 아픔이 공존하고 일산 신도시의 수직과 남양만 갯벌의 수평이 겹친다. 김포 전류리 포구의 노동과 광릉 수목들의 자존이, 수원화성의 정돈된 꼼꼼함과 모란시장의 활기찬 무질서가 기어이 조화롭다. 이 모두는 삶 안에서 하나로 통일되지 않고 외려 그 역설(逆說)과 부조화의 힘으로 삶을 천천히 밀어간다.


남한산성은 치욕은 삶의 일부라고 말하지만, 또한 실천 불가능한 정의가 실천 가능한 치욕을 긍정하게 하는 밑자락임을 빼먹지 않고 일러준다. 모든 등대는 저 자신의 이름을 부르며 깜박일 뿐이지만, 밤바다를 떠도는 선박의 가야할 길을 제공해주는 것과 같다. 서로의 상대성은 긍정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 긍정되어지는 것이다. 이 사태는 억겁의 시간을 집어삼켜도 바뀌지 않는다. “나는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은 살고자 하는 자들에게 또 다시금 새롭게 태어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세속의 슬픈 운명이지만 삶에게 허락되어진 초월은 세속의 그늘 속에서야 마침내 싹을 틔운다. 


제 스스로를 부양하는 복 받은 나무들마저 홀로 우뚝할 수 없다. 나무들은 개체 안에 세대를 축적한다. 지나간 세대는 동심원의 중심으로 이동하여 무위와 적막의 힘으로 나무의 전 존재를 수직으로 버티어준다. 거죽의 젊음은 그 뼈대에 기대어 물을 빨아들이고 호흡을 하고 열매를 영글어간다. 하지만, 나무의 싱싱한 자존에 10만년 일산의 퇴적층을 딛고 치솟은 인간의 신도시 빌딩과 네온사인 사이의 수용과 단절을 빗대기는 부끄러운 일이다, 삶이든 역사든 오로지 온전할 수 없을 지라도. 인간이 숲을 내내 그리워하는 것은 계몽의 자부심, 그 빛의 세례 속에서도 종교를 품고 사는 이유와 그리 멀지 않아 보인다. 


다시 풍경이 상처라면, 나 밖의 타인들만큼 꼭 그만치 무수한 상처다. 내 존재의 위치를 탐지하러 떠나는 도정은 기필코 너와의 소통을 조건으로 한다. 하지만, 너와의 섞임이 기껏 타인을 거울삼아 제 상처를 거듭 확인하는 자폐적 동선은 아니다. 굴뚝 청소부가 동료의 검댕이 얼굴을 보고 제 얼굴을 부지런히 닦는 것과 같은 짓. 달리 말해, 타인의 이해는 겸허한 무지의 자기고백만으론 되지 않는다. 오히려, ‘벌거벗은 임금님'의 발기된 자지가 쪼그라드는 순간, 바로 그때서야 풍경 속의 상처는 모습을 드러낸다. 그렇게 세상의 풍경과 만나 자신이 온전히 부서질 때 겨우 삶은 새로운 긍정의 물꼬를 틔울 수 있다. 김훈의 문장이 정직한 이유는 너의 상처를 대면하는 나의 힘겨움을 숨기지 않아서다. 그 보다 더 나은 진실은 끝끝내 여기 세상이 그의 문장만큼 아름다울 수는 없을 거라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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