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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은입니다 - 안희정 성폭력 고발 554일간의 기록
김지은 지음 / 봄알람 / 2020년 3월
평점 :
안희정 성폭력 사건에 대해 처음 듣는 순간부터 가해자에게 분노하고 피해자에게 공감했던 심리는 지금 생각해 보면 ‘여성’으로서의 자아 이전에 ‘직장인’으로서의 자아가 튀어나온 결과였던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문장도 ‘위력의 존재와 행사는 동시에 이루어진다’는 문장이다.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은 특별하지 않다. 우리의 일상 속에 사람을 가리지 않고 수시로 일어나는 폭력의 또 다른 형태일 뿐이다. 지금도 수많은 노동자, 수직 관계의 약자들이 느끼고 있는 일상적 위력은 눈에 보이는 폭행과 협박뿐만이 아니다. 침묵과 눈빛만으로 상대를 제압하는 것, 직장에서 술을 강요당하고, 달갑지 않은 농담을 참고 들어야 하는 것, 회식 자리에서 술 수발을 들어야 하는 것 모두가 일반적인 노동자 다수가 겪는 위력의 문제다.’ 관계 안에 이미 폭력이 있고, 다만 그것이 성폭력이었던 게 달랐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의 밑에서 일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라 생각한다.
사건 당시에는 보다 자극적인 쪽의 이야기가 많이 알려졌기 때문에 안희정 측 주장을 더 많이 들었다. 나중에 <미투의 정치학>을 읽으면서 김지은이 쓴 글은 따로 책으로 나올 예정이라고 알게 되었고 김지은 측 주장도 그때 읽을 수 있겠구나,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읽기 전에 내가 예상했던, 예컨대 이토 시오리의 <블랙박스>처럼, 폭행 사건이 어떤 식으로 전개됐다든지, 안희정 측 주장은 이런 점에서 오류라든지, 그런 내용을 타임라인에 맞추어 설명하고 반박하는 내용은 전혀 없다. 자신이 겪은 사건을 구체적으로 설명하지도 않고, 안희정 측 주장도 일일이 이런 루머가 있는데 이건 잘못이라고 논박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저자 자신이 어떤 환경에서 자랐고, 어떤 직업을 거쳐 안희정 밑에서 일하게 됐고, 업무의 성격이 어땠고, 상사의 인격이 어땠고, 일터 분위기는 어땠는지 띄엄띄엄 이야기한다. 그 맥락을 따라가다 보면 아 일이 그렇게 됐겠네, 그건 사실이 아니었겠네 짐작할 수 있다.
그런 형식이기 때문에 이 책은 과거를 해명하기 위한 책이 아니라 미래로 가기 위한 책이라고 느꼈다. 비슷한 문제로 고통받는 이가 있다면 그들에게 힘을 싣기 위한, 무엇보다 저자 자신이 이 문제를 정리하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만든 책이라고 느꼈다. 하지만 출간 결정하기는 정말 힘들었을 것 같다. 특히 중간에 색지로 삽입된 저자의 일기 발췌는 읽기 미안할 만큼 슬프다. 이런 고통 속에서 책을 낼 결심을 한 저자에게 새삼 존경심을 느낀다. 한편으로는 책은 다 읽었어도 에필로그는 아직 읽지 못한 느낌이다. 저자가 다시 직업전선에 복귀하고, 어떤 분야에서든 열심히 일하며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면, 그제서야 이 책을 다 읽었다는 느낌이 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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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중간 <뉴스룸> 인터뷰 전문, 수행비서로 일하던 때의 업무 매뉴얼, 사람들이 법정에 제출한 탄원서나 소명 내용 등이 실려 있다. 그중에서도 수행비서 업무 매뉴얼이 인상적이다. 업무량이 많고 의사결정이 다방면에 영향을 미치는 고위 공직자에게 업무상 비서가 필요하다는 것까지는 이해되는데, 일상생활 24시간까지 전부 돌보는 비서가 정말로 필요한가? 양복 핏이 안 산다고 주머니에 담배도 안 넣는 상사 보좌하느라 핸드백에 담배를 넣어 다니고, 자다가도 일어나 사모 대리운전하러 가고, 상사 개인전화를 착신전환해 24시간 전화를 받고, 심지어 상사가 전화할 일이 있을 땐 비서가 발신 버튼을 눌러 전화가 연결되면 상사 귀에 대 주는... 너무 과하지 않은가? 책에는 동종업계 종사자가 제출한 탄원서도 실려 있는데, 비서 업무는 상사의 ‘심기’를 편하게 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말한다. 가능한 일인가? 업무 목표가 타인의 기분을 편하게 하는 것이고, 업무 시간이 24시간인 상태에서, 그걸 성공적으로 할 수 있는지 또 그 과정에서 본인 멘탈까지 건강하게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있긴 한지 모르겠다. 번아웃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환경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