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라 슈만 평전
낸시 B. 라이히 지음, 강자연.하인혜 옮김 / 경북대학교출판부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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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에 대해서는 일자무식하지만 슈만-클라라-브람스의 삼각관계는 들어 본 적 있다. 그중에서도 삼각관계의 여주인공인 클라라 슈만에 대해서는 소위 팜므파탈일 것 같다는 선입견이 있었다. 이번에 평전을 읽어 보니 예상과는 정반대였다.


공적으로 클라라 슈만은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고 당대에 높은 대중적 인기를 누린 피아니스트였다. 작곡도 했고, 슈만 사후엔 슈만 저서의 편집을 도맡았다. 인기 있는 피아노 교사였으며 나중에는 대학 교수로도 일했다고 한다. 반면 사적인 삶은 부모의 이혼, 아버지의 억압, 신동 피아니스트로 데뷔한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 평생 이어진 생계 책임, 부친과의 소송까지 감행한 결혼, 잇단 출산, 남편의 정신병원행과 이른 사별, 자녀들의 잇단 죽음... 등으로 점철되었다.


저자에 따르면 그녀의 공적인 삶이 이토록 바빴던 건 생계 책임 때문이기도 하고, 예술적 욕구 때문이기도 했던 것 같다. 특히 그녀가 삶의 비극적 순간들을 이겨낼 수 있었던 건 여사제라 불릴 만큼 엄격하고 성실한 특유의 태도로 일에 몰두함으로써 고통을 잊은 덕분이라고 한다. 유산한 다음날도, 아들의 사망 소식을 들은 뒤에도 무대에 올라 연주했다고 하니, 그 자제심이 놀랍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다.

 

그렇지만 언제나처럼 클라라 슈만은 성실하게 연주하고 많이 작곡하고, 요약하자면 어떻게든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려서이 문제로부터 스스로를 지켰다. 수년간 클라라 슈만은 루드비히에 대한 염려에 시달렸지만, 로잘리 레서에게 1871916일에 쓴 것처럼 단호하게 그 환영들을 몰아냈다.”(296)

 

다른 한편으로는, 감정을 있는 그대로 토로하지 않는 성격이지만 음악을 통해서만큼은 그것이 가능했기 때문에, 많은 난관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커리어를 지속해 나가기를 고집했던 것 같고, 여러 가지 여건상 그것이 허락되었다는 점이 다행이라고도 생각된다.

 

음악을 만드는 일은 언제나 클라라 슈만에게 위안처가 되었다. 음악이 없었더라면 그녀는 일생 동안 꾸준히 함께한 질병, 죽음, 그리고 비극을 견딜 힘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클라라 슈만은 고통을 경감시키는 전문 연주자로서의 활동에 감사하며, 율리의 죽음 이후 지휘자이자 함부르크의 오랜 친구인 아베 랄르망에게 편지를 써 이렇게 말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만 피아노를 연주할 때면 중압감에 눌린 내 영혼이 안도하는 것 같다. 마치 내가 제대로 울었던 것처럼.”(271)

 

특히 이 대목에 공감했던 건 개인적인 경험이 생각나서다. 이사하는 과정에서 새 집에 들어갈 일정이 늦어지자 한 달 정도 단칸방을 빌려 온가족이 거기서 잔 적이 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독방을 쓰다 갑자기 가족들과 함께 자야 하는 상황이 솔직히 엄청 힘들었지만, 가족 모두 힘들 게 분명하니 내가 힘들다는 걸 털어놓을 수 없었고, 표현하지 못해 더 힘들었는데... 그때만큼은 직장이 있어 다행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만약 직장이 없었더라면 온종일 단칸방에 혼자 있어야 했을 테니까. 그 외에도, 집안일이나 또 다른 곳에서 생겨난 고민거리를 열심히 일하느라 어느 정도 망각하는 일이 꽤 많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 어떤 고민거리들은 자연히 소멸하거나 처음에 비해 아주 작아지기도 한다. 이런 일들은 직장인들이 누구나 크고 작게 겪어 보았으리라 생각하는데, 그런 점에서도 클라라 슈만의 직업활동이 공감이 되었다.


특유의 엄격한 성격도 부러웠는데, 이건 천성적인 면도 있겠지만, 아버지의 교육에 힘입은 것이기도 하다는 걸 생각하면 오묘한 기분이 된다. 사실 이 평전에서 묘사되는 클라라 슈만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비크는 좀 끔찍한 인물이다. 특히 아버지가 어린 클라라의 일기장을 같이 쓰고, 심지어 그녀의 일기장에 자기가 글을 쓰면서 마치 클라라가 직접 쓴 것처럼 라고 지칭하는 건 좀... 많이... 기괴하게 느껴진다.(후에 클라라가 남편과 결혼 일기를 썼다는 걸로 봐서는 19세기에는 흔치는 않아도 더러 있었던 일인 것 같다.) 예를 들면 클라라가 아버지와 만난 날의 일기를 아버지 쪽에서 직접 작성하면서 나는 기쁜 마음으로 아버지를 호텔에 모시고 갔다뭐 이런 식으로 썼다는 것이다. 프리드리히 비크는 이런 식으로 딸의 의식, 무의식을 통제했던 것 같다. 클라라의 연주회와 관련해 직접 작성한 온갖 사무 문안(연주자에게 책정된 비용이 너무 적다 등등)들도 딸에게 베껴 쓰게 했다고 하는데, 매우 직설적이고 조야해 베껴 쓰는 것만으로도 무척 고통스러웠으리라 추측한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저자는 후일 클라라가 스스로 연주회를 기획하고 컨트롤할 때 이 경험이 많은 도움이 되었으리라 추측하며, 또한 아버지의 교육하에 형성된 극도로 자제심 높은 생활태도가 그녀의 삶의 난관들을 이겨내는 게 중요하게 작용했다는 걸 생각하면, 순간순간의 행불행을 단지 그 순간의 느낌으로만 단정할 수는 없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 그리고 슈만과의 관계에서 결혼 초기 클라라의 연주수입이 슈만의 작곡수입보다 많았고, 당대 사람들 사이의 인지도도 클라라 쪽이 훨씬 높았다는 언급도 새로웠다. 슈만이 재능 있는 아내를 지지하는 한편으로 열등감을 느끼는 양가적 반응을 보이는 대목이 재미있다. 그와의 관계에서 아쉬운 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특히 클라라가 슈만을 의식해 작곡을 거의 하지 않았고, 슈만 사후에는 아예 작곡을 그만뒀다는 점이 그렇다. 너무 존경하는 작곡가와 결혼하는 바람에 정작 자신의 작곡 능력을 발전시키는 건 스스로 포기해 버린 느낌이랄까. 뛰어난 연주자였다지만 현재는 녹음본도 남아 않으니, 작곡과 연주 중 우열을 가릴 필요는 없을지언정 연주에 비해 작곡 쪽이 수명이 긴 것은 분명하다. ... 근데 클라라 슈만이 작곡한 곡을 들어볼 기회는 있었는데, 좀 우울하고 듣기 편한 느낌은 아니긴 했다.^^;


, 브람스와의 관계에도 한 챕터가 할애되어 있다. 클라라가 브람스보다 14살 연상이고, 슈만보다 9살 연하니까 브람스에게는 슈만이 대선배이자 스승 정도 위치인 것 같다. 브람스는 슈만 생전에 부부를 알게 되어 매우 친밀하게 지냈는데 슈만 사후에는 아예 슈만 가에 1년 정도 머물며 클라라를 도왔다고 한다. 슈만이 생전에 작성하던 가계부를 대신 쓸 정도로 생활 전반을 살뜰히 챙겼고 잠깐이지만 슈만 자녀들 피아노 레슨까지 해 주었다고. 저자는 클라라와 브람스 사이에 결혼 이야기도 오간 것으로 추측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끝까지 우정 관계를 유지했는데, 예술 면에서뿐 아니라 생활 면에서도 두 사람이 정말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던 것 같다. 예술 면에서는 클라라가 브람스가 작곡한 곡을 1순위로 보는 사람이었다고 하며, 생활 면에서는 브람스가 돈 관리를 잘 못해 작곡으로 번 돈을 초반에는 클라라에게 모두 맡겼다는 이야기도 있고, 클라라가 브람스에게 신문 쿠폰 보관 및 사용법을 가르쳐 주는 편지도 인용된다. 브람스 쪽에서도 클라라를 살뜰히 돌보았지만 클라라가 자녀 교육에 대해 의견을 묻는 것에만큼은 아무 조언이 없었다고 하는데... 정확히는 열심히 들어주고 돈만 보냈다고 한다... 이 부분에서 뭔가 웃음이 터졌다. 브람스는 자식이 없으니까요.ㅋㅋㅋ 이거 엄청 이상적인 친구의 태도 아닌지. 아무튼 하도 의견을 많이 주고받다 보니 클라라가 브람스가 작곡한 곡을 무의식중에 차용하는 이야기도 나오는데 이 부분도 감미로웠다.

 

1891, 클라라가 자신이 쓴 카덴차들을 모아 출판을 준비할 때, 그녀는 모차르트의 D단조 피아노 협주곡에 붙인 카덴차가 상당 부분 브람스의 멜로디를 차용하거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죄책감을 느끼며, 그녀는 자신의 카덴차에 브람스의 이름을 넣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그의 의사를 물었다. 브람스는 그런 식이라면 자신이 쓴 모든 아름다운 멜로디에 그녀의 이름을 넣어야 할 것이라며, “당신이 나의 선율을 몇 구절 쓴 것보다 몇 갑절로 나는 당신에게 많은 음악적 빚을 지고 살았습니다.”라고 답했다.(356-357)

 

여러모로 정말 재미있었다. 상당히 두꺼운 책이지만 매 장마다 그간의 선입견이 깨지는 흥미진진한 이야기라 순식간에 읽어치웠다. 평전을 평소 잘 읽지 않는데 얼마 전에 브론테 자매 평전을 읽고 이번에 클라라 슈만 평전을 읽어 보니 평전 읽는 즐거움은 역시 멀리서 볼 때는 화려하기만 한 누군가의 삶이 가까이서 보면 여러 가지 고난으로 점철돼 있고 그들이 고통 속에서도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는 점 아닐까 싶다. 특히 옛 시대의 생활사(하루에 몇 시간씩 편지 쓰기 등)를 가장 생생하게 볼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평전 읽기인 것 같다. 아무래도 구체적인 등장인물을 통해서 기술되니까. 클라라 슈만의 기쁨과 슬픔, 꿈과 현실을 알 수 있어서 기뻤다.

 

그렇지만 예술을 할 수 있다는 건 아름다운 재능이에요. 인간의 감정을 소리로 감싸 안을 수 있는 것보다 더 아름다운 일이 있을까요. 슬플 때 이보다 더 큰 위로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행복한 시간을 선사할 수 있다는 건 근사하고 굉장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예술을 위해 자신의 일생을 바치는 것, 음악을 순수하게 추구하는 일은 실로 고양되는 일이지요.”(클라라가 슈만에게 보낸 편지, 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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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nderrosa 2021-04-10 1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서관에서 이 책을 빌려 거의 다 읽은 상태에서 소장하고싶어서 구매하려고 왔다가 리뷰를 읽었습니다. 저도 많이 공감이 되네요 좋은 라뷰를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