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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하맨션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9년 5월
평점 :
제목인 ‘사하맨션’은 가상의 국가에 위치한 가상의 맨션이다. 한 기업이 일정 구역을 구입해 독립 국가를 세웠는데 시민들은 그곳을 ‘타운’이라 부른다. 타운 거주자는 영주권을 가진 L과 영주권을 갖지 못한 L2로 나뉜다. 고용 안정성을 비롯한 여러 차별이 이 두 계급 사이에 존재한다. 그리고 그 변두리에 L2조차 취득하지 못한 불법 체류자들이 있다. 이들은 사하라 불리고 이들이 모여 사는 맨션이 바로 사하맨션. 사하맨션 주민들의 삶을 단편으로 묘사하고 그 이야기를 모아 엮은 연작소설 형식이다.
가상의 국가이긴 하지만 주인공들은 한국 이름을 쓰고 살아가는 방식도 매우 한국적이고 이 나라가 세워진 과정도 더할 나위 없이 한국적이다. 사하에게 벌어지는 일들도 매우 한국적이다. 한 사람이 나고 자라나고 죽기까지, 현대 한국에서 약자인 이들에게 벌어질 수 있는 온갖 차별과 불평등과 폭력이 사하맨션 거주자들에게 빠짐없이 자행된다. 이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연대하며 버티지만 그 연대조차 너무... 약한 이들의 연대, 뭔지 알죠 빗자루로 조금 쑤석거리면 당장 끊어지는 가느다란 거미줄 같은 그런 연대에 불과하다. 그런 이야기다.
근데 이렇게 정리하고 끝내면 이 소설의 폭력성이 지나치게 요약되지 않을까? 마치 사회면 기사의 헤드라인처럼 아 그런 일이 있었구나 하고 끝나 버리지 않을까? 예컨대 이야기의 한 꼭지로 L2 시민권을 지닌 여성이 등장한다. 그녀는 보육사가 되는 것이 꿈이고 재능도 충분히 있는데 L2 시민권으로는 보육사가 될 수 없어. 그 시민권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이 보육원 조리사. 그래도 그나마 그녀는 L2인 덕분에 그녀의 꿈을 도울 수 있는 L 즉 보육원 원장과 아는 사이이고 원장의 도움으로 보육사로 발탁된다. 자신의 꿈이기도 했거니와 L2가 보육사가 된 것 자체가 매우 이례적인 케이스였기 때문에 그녀는 더 열심히 일하는데 타운에 전염병이 돌아 보육원 원아가 감염된다. 감염된 아이들은 보육원에 격리되는데 아이들이기 때문에 보육사가 필요해. 그래서 그녀를 비롯해 단둘뿐인 L2 보육사들이 남아 아픈 아이들을 돌보다 끝내 사망한다. 이 이야기가 유독 인상적이었던 건 최근 코로나바이러스 유행으로 벌어지는 현상들과 겹쳐서이기도 하겠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오싹한 일들. 그런 비극이 있었노라고, 단 한 줄로도 말할 수 있지만 사실은 책 한 권으로도 다 말할 수 없는 그런 일들을 이 소설은 그린다. 읽다 보면 자꾸만 ‘왜 이렇게까지? 꼭 이렇게까지?’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우리가 사는 세상은 실제로 그런 식으로 돌아가고 있고 작가는 설탕 한 숟갈 넣지 않고 그것 그대로 그리고 있을 뿐이지. 그러고 보면 <82년생 김지영>의 작가다. 김지영도 단 한 줄 때로는 단 한 단어로 묘사되는 사람, 하지만 사실은 책 한 권으로도 다 말할 수 없는 사람이었지. 사하맨션과 김지영은 소설의 형식면에서 많이 다른데, 읽다 보면 어느 순간 그런 소설을 쓴 사람이라 이런 소설도 썼구나라고 생각하게 되는 점이 있었다. 소설 결말부에서 진경이 밝혀내는 이 세계의 비밀도 흥미롭다. 사실 뒤로 갈수록 숨 막히고 답답해지기 때문에 나는 진경의 마지막 대사가 아니었으면 진짜 많이 괴로웠을 것 같아. “당신 틀렸어. 사람들은 원래 자리로 돌아가지 않았어. 그리고 나는 우미와 도경이와 끝까지 같이 살 거고.” 이것이 아마도 김지영과 사하맨션을 나누는 대사인 것 같아. 김지영이라는 한 인물(물론 통계에 기반해 만들어진 인물이라도)을 다룬 <82년생 김지영>과 여러 인물이 등장하는 <사하맨션>의 차이일 수도 있고, 그동안 작가의 생각이 변화한 것일 수도 있고, 사실은 작가의 생각이 안 바뀌었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독자로서 그리고 지금을 사는 사람으로의 나를 구한 건 역시 이 대사였던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