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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 진화하는 페미니즘
권김현영 지음 / 휴머니스트 / 2019년 10월
평점 :
도란스 기획 총서로 권김현영님 글을 몇 편 접했는데 단독 저서는 이번에 처음 내셨다고 한다. 칼럼을 비롯해 그간 발표한 글들을 묶은 책이다. 뒤에 목록을 보니 미발표 원고는 1건 있다. 사실 이런 짧은 글들을 엮은 책은 평소 잘 읽지 않았는데 이슈를 폭넓게 다루긴 하지만 논의가 깊이 전개되지는 않는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은 반성하고 있다. 이런 책을 읽지 않는다고 그 시간에 깊은 내용을 다룬 책을 읽는 것도 아니란 걸 알게 되었으므로...
페미니즘 관련 이슈가 생길 때마다 대응하는 차원에서 쓴 글이 많다. 내가 기억하는 일도 있고 아예 모르는 일도 있는데, 내가 아는 일에 대해서는 저자 특유의 통찰력을 느꼈고, 몰랐던 사건에 대해서는 새롭게 아는 계기가 되었다. 어느 쪽이든 관점이나 접근 방식이 섬세하면서도 묵직하다고 느꼈다.
특히 이 책을 읽으며 록산 게이 생각을 많이 했다. 음... 특유의 날카로운 문제제기가 비슷하다고 느낀 것도 있고, 소재상으로 영화 리뷰가 많아 <나쁜 페미니스트>를 연상한 것 같기도 하다. 아, 중간에 '대리 외상'이란 개념이 나오는데(타인이 겪은 고통을 자기 일처럼 느끼는 증상이라고 한다) 내가 읽은 페미니즘 책 중 가장 괴로운 경험담이 나오는 책이 <헝거>라서 무의식적으로 비슷하다고 느꼈는지 모르겠다.
책 보자마자 제목이 정말 멋있다고 생각했는데, 서문에서 저자는 '어떤 이야기는 흑역사이고 어떤 건 특정한 상황에서만 의미 있는 기록이다. 이런 흔적들을 남겨둔 것은 진화하고 싶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개인적으로는 이 취지에 깊이 공감했다. 조금 다른 얘기일지 모르지만 내게도 뭐랄까... 완벽한 모습으로 보이고 싶은 심리가 있어서, 내가 생각하기에 완벽하지 않은 지점은 자꾸 남에게 보여주지 않고 감추려 한다. 무언가에 대해 이야기할 때 특히 그렇다. 책잡히지 않으려고 모든 경우의 수를 따져 가며 말한다(혹은 쓴다). 하지만 어떤 사람도 어떤 것도 처음부터 완전하지 않다. 여러 가지 시행착오와.. 어찌됐든 깨끗하지 못하고 뭔가 덕지덕지한 구간이라도, 그 구간을 걸어가야만 다음 목적지로 갈 수 있는데, 그 과정이 숨긴다고 숨겨지는 것도 아니거니와 숨기는 게 좋은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이 문장을 보고서 들었다. 저자가 그 과정을 묻어버리려 하지 않고 기록으로 남겼기 때문에 '다시는 그전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선언이 가능한 것 같다. 그래서 나도 과정을 기록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