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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범소설
미겔 데 우나무노 지음, 박수현 옮김 / 아르테 / 2009년 1월
평점 :
품절
백지 위에 새기는 글들은 나름의 의미를 가지고 공감을 불러 일으키기도 하며, 논란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에게 소설은 감정의 찌꺼기를 내뱉어 놓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감정의 잣대로 제단하는 것은 싸구려 선술집의 대포 한잔 마냥 시시했습니다. 허구의 인물에 가상의 설정은 감정의 동요는 커녕 조소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나 조금씩 변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좀더 이성적으로 지혜롭게 될거라 생각했던 제 예상은 우습게도 빚나갔습니다. 없어져야만 했던 감정은 포용의 대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인식 이전의 감정의 배제는 모순임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우습게 여기던 감정의 언저리에 제가 있었습니다.
스페인의 생철학자 디겔 데 우나무노의 '
모범 소설'을 읽었습니다. G. 마르케스 이후, 두번째 맞이하는 비 영미문학권 소설입니다. 더욱이 철학자의 소설이기에 집어드는 마음은 무겁기만 했습니다. 가볍게 읽어 내리는 소설과는 달리 몇 일을 곱씹었습니다. 모범의 의미, 실존주의, 소설의 구성인물, 여러 생각의 편린들이 역자의 해설로 조금씩 짜맞추어졌습니다. 혼자만의 퍼즐 맞추기론 힘들었습니다. 부끄러운 고백입니다.
이 소설은 아마 다음 물음의 해답일 것입니다.
'소설은 어떠해야 하는가? 어떤 인간상이 소설의 대상이 되어야 하며, 어떻게 현실성을 획득 할 수 있는가?'
이 물음의 답이 세편의 소설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습니다. 창작물을 존재하게 하는 근원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길 원하는 사람입니다. 살아지는 인간이 아닌 살아가는 인간상이 소설의 근원이 될 수 있습니다. 살아가는 의지 속에 고뇌가 피어나고 내면의 고뇌에 빛을 비추어 언어화 하는 것이 소설가의 몫입니다. 능동적, 열정적, 의지적 행동이 고뇌를 불러일으키며, 여기에 소설의 사실성, 현실성이 부여됩니다.
여기에서 의지는 원하기, 갈망, 소망, 필요성등으로 대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꿈과 소망이 믿음을 낳고 믿음이 소설적 사실성의 근원입니다.
끝없는 애욕의 극단에 훌리아와 라켈, 나 그리고 우리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소설의 존재 가치가 있습니다.
더불어 반 이성적인 생철학의 면모 또한 소설의 한 축을 차지합니다. 논리 즉 이성은 살아 있음을 동일하게 만들고, 같은 모양새를 만든다고 합니다. 인간의 감정에 살아 있음의 다채로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성의 양면성에 대해 나름의 충격을 받은 부분입니다. 이성, 획일화의 모습으로 스스로를 가두고 있지는 않은지 저를 돌아봤습니다. 삶을 삶답게 만드는 감정을 경시한 제 모습에서 애당초 나를 찾는 다는 것이 허황됨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책을 덮고 나름의 정리를 하고 있는 와중에도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습니다. 서문조차 또 하나의 소설이라 한 저자의 의도가 무엇인지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여전히 이 소설은 제게 질문만을 남깁니다. 생과 소설과 감정과 의지 그리고 믿음 실체없이 뿌연 안개 속을 헤매이는 듯합니다. 저의 몫으로 남은 질문이 여전히 제 가슴을 누릅니다.
'삶이란 때로 어처구니 없는 부조리와 수치스러운 과오로 얼룩질 수 있지만, 이 얼룩은 어쩌면 삶을 삶답게 하는 요인이 된다.' p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