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을 끝내고 나니 마음의 여유가 다소 생겨서 그동안 밀려있던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슬라보예 지젝의 <팬데믹>은 어제 부터 읽기 시작, 진행 중. 아즈마 히로키의 <철학의 태도>는 짧은 대담집이라 어제 밤, 잠들기 전 뒤척거리다 다 읽었다. 

포스트모던 사회의 문화 현상은 작품이 아니라 ‘작품 소비자의 행위’를 시야에 넣을 때 핵심에 다가갈 수 있다.


소비자의 행위와 상호작용을 함께 연구할 것, 컨텐츠가 아닌 메커니즘이나 맥락(context)을 연구하라는 주문. 

무엇보다, 쓸모없는 잡담, 정보를 통한 우연한 마주침(저자는 이를 ‘관광적 태도’라 부른다)을 강조하며, 그를 통한 창조와 사유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권한다. 

철학은 쓸모 없어 보이는 곳에 존재한다.

논문을 쓰기 위해 철저히 정보, 지식에 집중한 텍스트 읽기에 지쳐가고 있는 지금, 나에게 시의적절한 지적이다. 



아침에는 일찍 잠에서 깨는 바람에 새로 책 한 권을 더 읽기 시작. 미치코 가쿠타니(Michiko Kakutani)의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The Death of Truth). 퓰리처상을 수상한 문학비평가이자 NY Times 서평가 답게 ‘글빨’이 좋다. 원문이 궁금해져 영어 원서로도 주문해 놓았다. 

저자는 트럼프 집권 시대, post-truth 시대에 대한 직설적 비판을 서슴지 않는다. 에두르지 않고 정곡을 찌르는 표현이 힘차고 좋다. 저자는 이 시대를 이렇게 표현한다.

사실에 대한 무관심, 이성을 대신한 감성, 좀먹은 언어

그러나 트럼프라는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현상으로 본질을 가리지 말것을 당부한다. 

트럼프라는 인물의 어릿광대 같은 면 때문에, 그가 진실과 법 원칙을 공격하고 우리 제도 및 디지털 방식의 소통이 가진 취약성을 노출시킬 때 생겨날 대단히 심각한 결과를 보지 못하고 놓쳐서는 안된다. 만약 일부 대중이 진실에 무관심하지 않았더라면, 사람들이 정보를 얻는 방식, 그리고 점점 더 당파적인 관점에서 생각하게 되는 방식과 관련한 시스템의 문제가 없었더라면, 거짓말을 하고 기만적인 사업행위를 한 이력이 선거운동 기간에 이미 폭로된 후보가 이렇듯 대중의 지지를 얻었을 것 같지는 않다.

즉, 트럼프는 이미 전조가 보이는 문제적인 대중의 정보 추구/소비 성향과 맞물린 진실불감증에 촉매제가 되었을 지언정, 그 원인은 아니라는 얘기. 

저코비는 <미국의 비이성 시대>에서 이런 쇠퇴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꼽았다. “정보 오락 프로그램 중독”, 종교 근본주의의 지속적인 영향, “지성주의를 전통적인 미국인의 가치관과 불화하는 진보주의와 동일시 하는 대중의 시각”, “기본 능력 뿐 아니라 그 능력의 기초를 이루는 논리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는 교육제도 등이 쇠퇴를 불러왔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COVID19 바이러스를 퇴치하기 위해 청소용소독제를 먹으면 어떻겠냐고 대국민 브리핑에서 말하는 대통령이나, 그 보도 후 실제로 전국에서 소독제를 먹고 죽거나 병원으로 실려온 환자가 스무명 남짓이나 되었다는 웃픈 상황이 벌어지겠는가. (그리고는 ‘농담’이었다고 일소하는, 제 말에도 책임지지 못하는 대통령이다. 나도 할 수 있다. "트럼프가 사실은 입원이 시급한 일급 정신병자인데, 누가 풀어놨니? — 아님 말고.” 가상의 비유를 해보려 했는데… 논리상 오류일지도.)

저자는 트럼프의 정치를 ‘공포와 분열’의 정치라 한다. 상대 선거 후보인 바이든을 가리켜 ‘좌파’라 공공연히 비난하는 트럼프의 언행은 과연 분열과 공포를 먹고 자라는 괴물을 방불케 한다. 저자는 미국의 건국자들이 만든 헌법 구성이 견제와 균형이라는 합리적 체계에 기초한 사실을 들어 트럼프의 괴물성을 묘사한다. 

알렉산더 해밀턴의 말을 빌리자면, 이는 어느날 “사생활에 절조가 없”고 “성격이 대담한” 사람이 나타나 “인기의 목마에 올라타서” “당대 광신자들의 온갖 터무니 없는 소리에 동조하며 아부해 “정부를 곤란하게 만들고 “상황을 혼란에 빠뜨려 그 폭풍에 편승해 회오리 바람을 이끌’”지도 모를 가능성을 막기 위함이었다.”

저자는 이어 킹 박사와 오바마 전 대통령을 인용하며 말한다. 

진보는 자동적이지도 불가피하지도 않”아서 지속적인 헌신과 투장이 필요하다”


아직 1장 밖에 읽지 못했지만 벌써 마음이 침울해진다. 개인의 영달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간에 대한 예의가 없는" 정치가. 그로인해 점점 더 되돌릴 수 없을 만큼 분열되어 서로를 불신하고, 무시하거나 증오하는 사람들. 그런 비극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과거의 참담한 역사를 빌어서 더 염려스럽게 다가오는 미래에 대한 암울한 예측. 불안과 두려움을 안고 살아야 하는 비극. 작금에 내가, 우리가 할수있는 일은 무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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