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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윈의 식탁 - 진화론의 후예들이 펼치는 생생한 지성의 만찬
장대익 지음 / 김영사 / 200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어제 이 책을 읽던 중 책을 던져 버리고 싶은 욕망을 참느라 내 모든 에너지를 써 버렸다. 내가 이런 끔찍한 욕망을 느낀 것은 이 책의 내용 때문이 아니다. 내가 생물학자도 역사학자도 철학자도 그렇다고 진화론에 관련하여 많은 책을 읽은 사람도 아니므로, 장대익만큼 과학적 지식이 박식한 것도 아니니 책의 내용을 가지고 이러쿵 저러쿵 하기에는 내 지식이 너무 짧고, 책의 내용은 깊고 심오하다. 심오하다고 해서 책이 어렵지는 않다.
내가 분노한 이유는 이 책이 사실이 아니라 허구를 기초로 했다는 측면이다. 물론 책을 구성하는 방법과 전개 방법은 저자와 출판사의 권한이다. 그리고 책을 선택하는 행위는 독자의 권한이다. 하지만 허구로 이루어진 소설이 아닌 현실과 사실을 중시해야 하는 대중 과학 서적을 픽션으로 썼다는 것에 대해서 나는 불쾌하고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 책이 허구를 기초로 해서 쓰였다는 사실을 서두에 밝혔다면 사정은 다르다. 책을 읽는 독자들은 상황보다는 그 속에 나오는 내용을 중점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사건을 설명할 때 일어나지 않은 사실을 예로 들면서 말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러지 않았다. 아무런 정보 없이 이 책을 읽는 독자는 이 책이 사실적인 상황, 즉 사실로부터 출발해서 쓰여졌다고 믿고 보기 여기에 나오는 말 한마디를 과학자들이 했다고 믿고 책을 보게 된다.
처음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내가 알지 못했던 여러 가지 진화론적인 사실, 그리고 유명한 과학자들의 말 한마디에 나는 흥분했다. 특히 세계의 내로라하는 과학자들이 원로 과학자의 장례식장에서 우연히 한자리에 모여 며칠에 걸쳐 토론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 놀라웠고, 언제가 어디에선지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여러번 들어봄 직한 장대익이라는 한국 과학자가 그 세기의 토론 자리의 내용을 정리하는 서기의 역할을 했다는 사실에 같은 한국인으로 뿌듯하기까지 했다. 특히 토론 중 나오는 한국 음악 부분에 대해서는 한국임이 자랑스러워지는 마음 한 구석에서 용솟음쳐 올라오기까지 했다. 비록 읽는 중에 토론의 과정이 전문가들의 토론이라기보다는 일반 대중을 겨냥한 토론인 듯하여 조금은 의아해하긴 했지만 적어도 이것이 상상 속의 장면이라고는 생각해보지 않았다. 더구나 얼마 전 빨간 책방에서 리뷰했던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 도킨스에 대한 내용은 어느 과학자의 부분보다 나의 관심을 끌었다.
물론 이 책의 내용이 허구이지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책에 나온 학자들이 이 책의 나온 내용을 그대로 얘기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책에서 이 책이 허구로부터 출발했다는 고백을 하는 부분인 어느 독자의 토론 원문을 받아 볼 수 있느냐는 문의는 그만큼 많은 독자가 상황 자체를 사실로 여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이 책이 허구적인 상황에서부터 출발했다고 고백을 하고 시작했다면 읽는 독자는 이를 염두해 두고, 각 과학자가 말했다는 부분들을 가감하여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그 부분을 간과했다. 어찌 보면 이 책 '다윈의 식탁'은 사실을 얘기해야 하는 과학 서적에서 가장 큰 실수를 저질렀다. 이 책은 출간 이후 많은 독자로부터 사랑을 받았고, 이미 출간된지 8년 정도가 지났다. 그리고 대중 과학 서적으로는 대단히 성공한 책이다. 하지만 본인은 이 책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다. 아마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은 가상 논쟁으로부터 출발한다는 것을 알 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아직도 이 책을 알지 못하는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처음 접할 때는 가상이 아닌 언젠가 있었던 현실 논쟁으로 착각하고 책을 보게 될 것이다. 헌책방 투어 중 낯익은 제목에 끌려 구입하고, 재미있게 읽던 책이 한순간에 나의 독서 역사에서 가장 잘못된 책으로 남을 것 같다. 그리고 저자 장대익 교수는 과학 서적보다는 소설을 쓰는 편이 훨씬 낫지 않을까 싶은 생각과 함께 이후 발간된 개정판에서는 픽션임을 서두에 밝혀 두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