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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괜찮은 눈이 온다 - 나의 살던 골목에는 ㅣ 교유서가 산문 시리즈
한지혜 지음 / 교유서가 / 2019년 10월
평점 :
<참 괜찮은 눈이 온다>를 읽는 내내 다음 꼭지로 넘어가는 여백에서
나는 종종 세계문학전집이 쌓여있는 다락방이나, 구불구불한 판자촌 골목길, 혹은 밤의 하얀 밑바닥같은 설원 위에 놓여지곤 했다. 작가는 살아온 나날에 대해 지긋지긋한 시절이라고 이야기하지만 한번씩 휘몰아치듯 그때가 그리워질 때 글로써 지나간 시간을 소환한다.
어느새 작가 옆에 앉아 그녀가 소환한 흑백사진들을 보다가 문득 문득 내 기억 속 앨범도 함께 펼쳤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사람 사는 거 다 거기서 거기였구나. 지금 생각해보면 그리 좋은 일도, 그리 나쁜 일도 아니었다는 작가의 문장은 과거를 향해 놓지 못했던 미련한 집착을 느슨하게 해주었다. 나는 무심히 흘려보낸 대학 4년 시절에 대해 큰 구덩이 같은 회한이 늘 있었기 때문이다. 기억조차 하고 싶지 않은 아프고 부끄러운 시절이다.
작가가 소환한 네 번의 골목들은 그녀 자신이 성장하며 지나온 골목들이다. 가난했던 그 시절이 그래도 아름다웠다며 미화시키지 않는다. 단칸방에 다섯 식구 모로 누워 그마저도 좁아 가족들 발바닥을 보고 잤다는 가난을 소중하고 그리웠다 감상에 젖는 데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가난보다 더 가난했을 어떤 이들을 향해 꾹꾹 눌러 쓴 활자를 뻗어나간다. 내 가난이 혹여 다른 이들의 가난을 모욕할까봐 늘 겸허한 자세로 기억을 써 내려간다.
아빠는 마지막 순간까지 가난했다. 아빠는 부자가 되지 못했다. 명예를 얻지도 못했다. 그러나 아빠는 아빠만의 방식으로 아빠의 삶을 증명했다고 믿는다. 존재를 증명하는 일, 세상에 그것보다 위대하고 어려운 일이 또 있을까. -p.113
작가는 가난했으므로 감사하다 말하지 않는다. 그때 미처 알지 못했던 아버지와 어머니의 인생과 어린 자신의 내면을 중년에 이르러서야 우연찮게 발견할 뿐. 그렇게 내뱉는 삶의 한숨같은 것들이 힘겹게 글이라는 형태로 엮여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가고 싶지는 않은 그 시절, 돌아가고 싶다고 해도 절대 그럴 수 없다는 걸 아는 작가는 과거를 지나 현재에 서 희망을 앓고 있다. 희망을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앓는다'고 표현한다. 희망을 앓는다....
잃은 기억은 없지만 꿈도 미래도 없는 주변 인물들의 삶은 아무것도 생략되지 않은 온전한 삶이라고 누가 말할 수 있을까. 삶은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 어떻게 살아야 온전한 완성일까. 어쩌면 나도 이미 많은 부분을 생략하고 생략되며 살아온 삶은 아닐까 그런 슬품이 드는 것이다. -p.101
그녀 자신의 삶을 복기하고서는 어느 후미진 곳에서 홀로 고통을 감내하며 흐느끼고 있을 어떤 이들의 이름을 끝내 부르고야 만다. 생의 방향이 자꾸 바닥을 치는 사람들, 꿈을 부르짖는 것이 사치인 아이들, 고통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라고 요구받는 어느 피해자들...
함부로 누군가에 삶에 대해 재단하거나 단정지으려 하지 않는 작가의 심지가 글이 허공에 떠돌지 않게 한다. 그녀가 쓰는 풍경은 무조건적인 행복으로 귀결되지 않기에 새벽녘 창에 낀 성에처럼 서늘하기도 하고 울고난 후 억지로 떠 먹는 밥처럼 서걱린다. 그러나 무겁다. 무거워서 가슴에 얹힌다.
언젠가 내 호출기에 번호도 없이 음악을 남겨준 이가 있었다. 많이 지쳐 있던 때였고, 너무 외로울 때였다. 길 한복판에 있는 공중전화에서 내 번호를 누르고, 비밀번호를 누르고 나니 밀물처럼 음악이 귓속으로 쏟아져들어왔다. 내가 걷고 있던, 의미 없고 정신없던 길이 음악 속에서 분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 길 위에 쏟아지는 햇살이 얼마나 밝고 아름아운지도 비로소 보였다.(중략) 그런 존재가 있는 한 조금 열심히 살아도 될 것 같았다. -p.157
한 평도 되지 않는 좁은 베란다에서 여기가 네 세상의 끝이야, 라고 아이에게 말할 때 나는 단단한 디딤돌을 상상한다. 그 안전한 터를 밟고 내 아이가 세상을 향해 힘차게 발 굴렀으면 좋겠다. -p.178
<참 괜찮은 눈이 온다>의 글들은 읽는 이에게 호출기에 녹음된 음악처럼 다가갈 수도 있고, 잠시 쉬었다 발 구르는 단단한 디딤돌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읽는 이의 마음을 툭 건드는 문장들은 시와 같고, 시의 언어는 내면에 스며들어 생의 태도를 이루니까.
작가의 시절에게 한 줄의 연서를 보내고 싶다. 동시에 나의 시절에게도.
- 그 시절을 연민하고 끝내 품었으므로, 그거면 됐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