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통신사, 일본과 通하다 - 우정과 배신의 오백 년 역사
손승철 지음 / 동아시아 / 2006년 11월
평점 :
절판


책중에 제일 눈에 들어온 구절은 조선 태조에서 임진왜란 전까지 일본국왕사는 70여회 국왕을 알현하기 위해 한성에 왔었고,

조선통신사는 같은 기간중 19회 시도하여 14회 일본을 다녀왔다.

그리고 일본기록에 의하면 1655년 385명이 에도를 방문했는데, 하루 식량이 쌀  20섬, 닭 100마리, 계란 400줄, 농어 400마리,

무우 2000개 등이었으며, 후식으로 포도 300송이, 시루떡 100근 등 이라하니 아무리 일측 수행원 몫까지 포함하고 있지만 대단한 양임에는 틀림없다.

조선통신사의 접대에 소홀함이 없도록 쓰시마도주는 미리 조선인이 좋아하는 물목을 만들 정도 였다하고,

통신사가 머문 숙소도 동서로115미터, 남북으로 126미터, 본채가 24채, 부속건물로 동서 65칸, 남북 75칸이라하니..,

일본에서 통신사에 대한 예우가 어느 정도 였는지 가히 짐작이 된다.

 

상대적으로 일본국왕사에 대한 예우로 노역 등이 만만치 않았지만 신례(臣禮)행위를 취하는 외교적인 복속의 의미로 대하여,

공무역을 할 경우 년 1회 국왕을 알현하는 것을 의무화 했다고 한다.

 

3대 막부에서 막부 장군이 바뀔 때마다 일본국왕사가 다녀가면 통신사가 가는게 선례였지만

막부의 재정악화의 근본이유와 조선멸시관의 대두로 쓰시마에서 국서를 교환하는 행위로 교류는

제한되고 결국엔 왜관 무력찬탈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

 

왜구에 대한 통제를 마련한 것은 세종때 부터 였고 그것이 쓰시마도주에게 일본본토와 조선국왕을 농락하게 되는 국서위조로

일본국왕사와 조선통신사의  왕래라는 거래를 성사시켜 중간이익을 챙기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니...,

그렇게 둘 수 밖에 없는 시작은 고려의 몰락에 직접적인 원인제공이 왜구의 침략..,  외교문제는 중요했을 것이다.

 

지금  우리는 어떻게 일본, 미국, 중국, 러시아와 외교를 하고 있는지, 국토 뿐만아니라 문화까지

다시 돌아봐야 할 때가 지난 것은 아닌지, 역사학을 배운 사람은 아니지만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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