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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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의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은 이번달 초 내내 출퇴근하며 '읽은' 책이다. 사실 나는 출퇴근을 자가로 운전하며 오가는 날엔 오디오북을 듣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날엔 종이책/전자책을 읽는 편이다. 이 책은 전자의 방식으로 접한 책이고 눈으로 읽기 보단 귀로 들었으니 읽었다고 하는 게 맞을까 싶긴 하지만, 삼십여 분 남짓의 시간 동안 고요한 차 안에서 오디오북의 나긋한 음성이 깔리면 귀로, 입으로 그 목소리를 따라가며 어떤 생각에 잠기곤 했다. 이 책을 읽고 김혜순 시인과 허수경 시인의 시집을 잔뜩 담았다.


이 책은 재밌다. 그리고 책을 읽으면서 그간 드라마 보면서 남겼던 감상을 다시 정돈된 글로 정리를 해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어떤 특정 시기에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기록으로 남겨두는 게 의미가 꽤 큰 것 같아서. 더불어 더 많은 작품들을 접한 뒤에 저자의 (아마 다른) 산문을 다시 접해보는 게 좋으리란 생각도. 여담인데 요르고스 란티모스 굉장히 싫어하는 것 같아서 너무 웃겼다. 정갈한 언어로 사정없이 패는데 읽으면서 납득이 가서 더 웃겼어.



발췌


[...]  ‘예술은 현실의 재현’이라는 유서 깊은 논의에서 ‘재현’이란 현상의 복사가 아니라 본질의 장악이다. 남길 것과 지울 것을 선택하는 지성이 필요한 일이다. 또 독자에게 고통을 전이시켜야 한다. 세상이 고통스럽다고, 고통스럽게 말해야 한다. 그것 없이는 인지의 충격이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본질의 장악’의 부산물이자 ‘인지의 충격’의 유발자로서의 고통, 그것은 옳다. 대상의 속성이 ‘선택인가 조건인가’의 문제도 중요하다. [...] 그 존재가 스스로 선택한 바 없는 자신의 ‘조건’은 웃음거리가 될 수 없다.


[...]  ‘성명’은 출생과 동시에 ‘나’를 얽어매는 그 많은 이데올로기적 요구를, ‘병명’은 그 요구를 거절한 주체들을 분류하고 통제하는 폭력적 기준을 상징할 것이다. [...] 질병에 ‘나’를 꽂겠다는 것은 사회가 부여한 성명/병명을 반납하고 주체적인 성명/병명을 쟁취하겠다는 것이다.


[...]  흔히 인문학은 생각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라고들 하는데, 윌리스에 따르면 그것은 곧 '어떻게' 생각하는가와 '무엇을' 생각하는가에 대해 '선택'하는 방법을 배운다는 것이다. 생각하는 방법이란 곧 선택하는 방법이라는 것. 어떤 현실과 맞닥뜨렸을 때 이를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다른 생각을 의식적으로 선택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늘 같은 방식으로만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상 생각을 하지 않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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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톤 매트리스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양미래 옮김 / 황금가지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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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거릿 애트우드 작품이라고 해서 기대함과 동시에 단편집들이라 하여 조금 수월하게 읽을 수 있겠거니 했는데 생각보다 조금 얼얼하다. 개별 단편이라 생각했던 작품들은 한 편의 거대한 연작처럼 이어져 어떤 경계들에 관해 곱씹게 만들고, 오랜만에 페미니즘적 상상력에 푹 잠기는 계기가 됨과 동시에 아직 겪어 보지 못한 노년의 삶을 상상하는 계기가 된 작품이었다.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이는 얼마나 될까. 인간은 언제나 현재를 살면서도 끊임없이 과거를 반추하며 지금 여기와의 관계를 되짚고, 그 경계를 문지른다. 기억은 향수나 후회를 불러오고, 때론 기억하는 주체를 고독 속에 잠기게도 만든다. 주체는 그 고독 속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고 가상의 연인을 만들기도 한다. 과거와 현실, 현실과 픽션. 존재를 위치시킬 수 있는 곳이라면 시공간적으로 그 어떤 곳이라도 좋을 테다.


한 존재의 존재 좌표가 설정되면 존재를 둘러싼 관계가 뒤따른다. 작품 속 주체들은 대개 가부장 사회 속 사회적 노년을 살아내고 있는 여성들이다. '사회적' 노년이라고 굳이 붙인 이유는 "나이 든 여성" 이라고 꼬리표를 붙이려 드는 남성 캐릭터들에게 반기를 드는 그녀들의 저항에 동조하기 위함이다. 등장인물들은 남성 반동인물antagonist 들의 타자화 속에서도 끊임없이 저항하며 사회적 규범에 반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자기 회복을 도모하려 한다. 그 과정은 어쩌면 살아남기 위한 생존을 위한 것일 수도, 죄인을 향한 복수를 위한 것일 수도, 어쩌면 도덕적 가치판단을 선뜻 내리기 힘든 다른 어떤 사고의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가장 기억에 남았던 작품은 <루수스 나투라(Lusus Natura)>, 즉 괴물. 작품 속에는 어떤 질병에 걸려 사회 내에서 괴물로 취급되는 여성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녀는 정말 괴물인가? 그렇다면 누가 그녀를 괴물로 규정했는가? 괴물과 질병의 정의는 무엇인가? 그 정의는 어떤 기준에 따른 것인가? 작품의 말미가 그리 통쾌하진 않았지만, 어쩌면 끝내 전시물로 전락하고 말지도 모른다며 두려워하는 주인공을 보며 기분이 몹시도 뒤숭숭했다.


여러 작품 중에 제목이 된 작품은 <스톤 매트리스(Stone Mattress)> 인데 왜 이 작품이 표제가 되었을까 의아했으나 차례대로 읽다 보니 장편으로 치면 서사적 정점인 클라이맥스가 찍히는 거나 마찬가지인 작품이라 그런 거 아닐까라는 추측을 해본다. 주인공 버나는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옥죄며 자기 존재마저 의심하게 만든 강간범을 돌로 찍어 죽인다. 작품은 주인공의 복수와 함께 지켜보는 이에게 임파워링을 부여하지만, 한편으론 강간 피해자임에도 사회 전체를 뒷배로 둔 가해자에게 사적 복수를 행하기까지 지난한 과정이 있었음을 서늘하게 제시한다. 수천 년에 걸쳐 형성된 스톤 매트리스는 지층에 의해 형성된 화석 조각. 수백, 수천 년에 걸쳐 수많은 '버나들' 에게 가부장들이 가한 폭압의 결정체가 되려 그들 머리에 꽂히니 어찌 통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황금가지로부터 제공받은 도서에 대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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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딜과 신자유주의 - 새로운 정치 질서는 어떻게 탄생하는가 Philos 시리즈 28
게리 거스틀 지음, 홍기빈 옮김 / arte(아르테)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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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리 거스틀의 <뉴딜과 신자유주의> 는 1920년대 이후 미국의 뉴딜New Deal정책을 야기한 사회변화상과 더불어 뉴딜정책이 일으킨 변화와 정치질서, 스태그플래이션stagflation 이후 뉴딜정책의 침체와 신자유주의의 부상, 더불어 추락했으나 그럼에도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신자유주의의 흔적에 관한 이야기다. 학교 다닐 때 주워들은 것도 있고 여러 언론과 매체에서 신자유주의에 관해 이야기할 때마다 한 꼭지씩 읽어온 게 있기에 마냥 생소한 건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이렇게 시대 흐름에 따라 역사 맥락에 맞춰 총체적으로 정리해 준 걸 읽는 경험은 처음인지라 꽤 흥미롭게 읽었다. 1920년대 초반의 뉴딜정책부터 다루긴 하지만 저자는 20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의 핵심 인물, 정책 및 사건 등을 다루며 신자유주의라는 하나의 질서를 다면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책이다.

예전에 연설 수업을 들은 적이 있었다. 21세기 현시점에서 영미권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지는 연설문에 관해 이야기하는 시간이었는데, 그중 하나가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이 장벽을 허무시오(Tear Down This Wall)' 연설이었다. 배우 출신의 레이건 대통령은 딕션도 어찌나 훌륭하시던지 어학 공부 소재로 제격이었다는 기억. 어쨌든, 당시 레이건 대통령은 당대 러시아 대통령이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를 향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리는 변화와 포용을 환영한다. [...] 당신이 평화를 바란다면, 소련과 동유럽권의 번영과 자유화를 바란다면, 이곳에 와서 문을 여시오! 장벽을 허무시오! (Open this gate! Tear down this wall!)"

이 책을 읽음과 함께 지금 와서 다시 생각을 해보면, 누구를 위한 변화와 포용인가, 누구를 위한 번영과 자유화인가를 되묻게 된다. 물론 지난 미 대선 당시 민주당 경선 대회에서 "I knew Ronald Regan. I worked for Ronald Regan. You're no Ronald Regan! (난 로널드 레이건을 알고 그를 위해 일했어요. (트럼프) 당신은 로널드 레이건이 아닙니다!)" 라는 말과 함께 트럼프를 저격하고 레이건과 선을 그으며, 레이건 시절을 낭만화하던 공화당원도 보긴 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이건 시절로부터 비롯되어 트럼프 시절에서 변주되어 재현되는 자유와 탈규제의 흐름이 결코 국내적 차원에서는 사회적 소수자들을, 국제적 차원에서는 개발도상국을 비롯한 빈국을 위한 것은 아니었음을 주지할 필요는 있을 것이다.

세계화의 흐름과 함께 가속화된 신자유주의 질서는 전 세계를 탈규제, 사유화, 자유시장 원칙의 유행에 편승하게 했다. 이에 따라 각 사회는 재정적 불안정을 비롯한 사회적 불평등에 고통 겪음은 물론이고, 사회 안전망의 해체로 사회적 약자들을 죽음의 문턱까지 몰아붙임을 당연시하게 된다. 2008년 리먼 브러더스 사태로 정점을 찍고 해체되는가 싶던 이러한 질서는, 트럼프의 부상과 함께 다시 한번 그 존재를 사회 속에 자리매김한다. 트럼프의 시대마저 끝난 오늘날의 세계는 뉴딜 질서나 신자유주의 질서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서로가 서로를 묻힌 채 복잡다단하게 엉켜 새로운 정체성을 지닌 질서로 나타나지 않겠는가.

좀 더 읽고 자신만의 생각을 정리해 보고 싶은 분들이라면, 혹은 영미권의 역사, 세계 경제사, 혹은 국제정치학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한 번쯤 일독해 보셔도 좋을 법한 책이다.

아르테로부터 제공받은 도서에 대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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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반대편에 들판이 있다면 - 문보영 아이오와 일기
문보영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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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보영 시인의 신간을 읽었다. 작가가 미국 아이오와 대학교 국제창작프로그램(IWP) 에 참여하며 기록한 단상들을 엮은 일기 형식의 산문집이다. 사실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의 SNS를 읽는 기분으로 읽기 시작했는데 이런 삶도 있구나, 싶어서 흥미롭게 읽어 내려갔다.


책에서 다루어지는 화두는 엑소포닉exophonic, 즉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글을 쓰는 이들. 엑소포닉들이 모인 프로그램에서 한국어라는 단일 언어만을 구사하는 작가가 새로운 세상에 마음을 열고 자신 또한 엑소포닉으로의 길을 한 걸음 내딛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작가의 일기 속에는 다양한 엑소포닉들이 나온다. 그들은 자의로 혹은 타의로 모국을 떠나 타국에서 작품 활동을 하는 경우도 있고, 한국에서 주류 한국인으로 한국어만을 구사하는 작가와 같은 경우도 있다. 다양한 색깔을 가진 이들이 모여 조화를 이루기도 불협화음을 이루기도 하지만, 작품은 분명한 건 서로에 대한 마음을 여는 순간부터 상대에 대한 이해가 시작된다는 걸 짚는다.


사실 책만 읽고서 작가가 아이오와에서 겪은 경험과 그때의 감정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처음 아이오와에 발 디딜 때와 달리 점점 아이오와에 매료되어 "돌아가기 싫어" 를 이야기하는 작가의 변화를 통해 IWP 프로그램이 얼마나 매력적인 프로그램인지 가늠이 된다. 통통 튀는 문체로 일상을 다른 각도로 보는 글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유쾌하게 읽으시리라 생각된다.


하니포터, 한겨레출판으로부터 제공받은 도서에 대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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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 빛과 물질의 탐구가 마침내 도달한 세계
그레고리 J. 그버 지음, 김희봉 옮김 / 을유문화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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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고리 J. 그버의 <보이지 않는> 은 우리에게 '보이지 않음' 에 관한 매력적인 여정을 안내한다.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인가에 관한 개념 설명뿐 아니라 역사적으로 보이지 않음을 구현해내고자 하는 과학자들의 노력, 그에 따른 연구의 발전, 더불어 이것이 사회 전반에 끼치는 영향에 관해 소개한다.

'보이지 않음' 에 대한 인간 호기심의 근원은 어디서부터 비롯되었는가? 저자는 플라톤의 <국가> 를 통해 그 열망이 고대로부터 이어져 오고 있음을 이야기한다. 그버는 '보이지 않음' 이라는 현상을 이룩하기 위한 초기 과학괴 광학의 발전 과정 또한 소개해준다. 더불어 이것이 의학에 영향을 미쳐 엑스선과 같은 보이지 않는 전자기파들이 어떻게 인간 신체 구조를 드러내 이전보다 더 정확한 의료 행위를 가능하게 해 주었는가를 이야기해 준다.

수많은 과학자들이 이루어내기 위해 몰두한 '보이지 않음' 은 과학 분야에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었다. 이는 SF 작가들의 상상력을 자극시키고, 과학과 문학은 상보적 영향을 주고받으며 인간 상상력을 증폭시킬 무한한 가능성의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감시, 사생활과 개인의 자율성 문제 등 보이지 않음이 유발할 수 있는 윤리적 문제가 발생할 수 있음을 짚으며 이에 대한 인류 공동의 책임감 있는 혁신과 윤리적 가이드라인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고대 미신에서부터 최신 과학에 이르기까지 보이지 않음을 이루어내기 위한 인류의 궤적을 추적하는 과정을 함께 하며 해리포터 시리즈에 나왔던 투명망토의 존재가 허무맹랑한 소리만은 아니겠다는 생각을 했다. 동시에 보이지 않는 존재가 된다면 무엇을 할까라는 질문에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도 했다. 다만 더 많은 실험과 상상의 끝이 누군가의 피해를 담보로 하는 미래가 아니길 바라본다.

을유문화사로부터 제공받은 도서에 대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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