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 개정증보판
이진경 지음 / 그린비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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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고 있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은 언제부터 비롯된 것일까. 시계에 따라 시간을 측정하고 인지하고 측정하는 것은 인간이 태초부터 해온 행위일까. 근대의 인간은 과연 자율적으로 자신의 시간과 공간을 관리 및 통제할 수 있었을까. 우리가 알고 있는 진보란 개념의 기저에 깔려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진경 교수님의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은 가깝게는 근대부터 멀게는 고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시간과 공간적 경험 및 인식에 관한 역사를 탐구하고 그에 따른 영향에 관해 이야기하는 책이다.

 

인류사 이래로 인간이 시계를 보며 공통된 시각을 인지하며 산 것은 꽤 최근에서야 가능한 일이었다. 근대 이전 농업 사회의 인간은 해가 뜨고 지는 자연의 순환에 맞춘 생체 리듬에 따라 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규율적 삶을 살아야 하는 종교적 삶에 따라, 기차 시간표로 대표되는 시장의 상업적 삶에 따라, 학교와 공장의 시간표에 맞춘 근대적 삶에 따라 인간은 점차 외부의 힘에 의해 불연속적으로 재단 가능한 인위적 시간에 맞추어 살 필요가 생겼고, 이는 자본주의의 발달과 함께 인간 정신에 내재화되게 된다.

 

투시법의 발견은 비단 회화 양식의 발전뿐만 아니라 근대인들의 생활양식 및 지각 양식에까지 영향을 끼친다. 소실점을 중심으로 수렴되는 구도의 투시법적 기법은 2차원 평면 속에 3차원을 구현해 낼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기법이었다. 더불어 그 소실점의 위치에는 화가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대상이 위치하게 마련이었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는 소실점=투시점, 곧 화가의 시선의 위치로 변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선' 은 곧 권력이 되고, 그 시선 권력은 근대 이후 기계화되어 카메라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게 된다.

 

기계란 무엇인가. 들뢰즈와 가타리에 따르면 "기계란 다른 어떤 요소와 결합하여 어떤 질료적 흐름을 절단하고 채취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모든 것을 기계" 라고 정의한다. 이에 따라, 본 책은 구체적인 공간들을 "사람들의 다양한 활동이나 실천의 흐름을 절단하고 채취하는 기계" 로 일컫는다. 이제 사람들은 각각의 공간에 들어가게 되면, '공간에 맞는' 행동을 하고 삶을 살고 사고를 하게 된다. 공장이라는 공간에서는 노동자에 걸맞은 행동을, 학교에서는 학생에 걸맞은 행동을 하게 되고, 각각의 공간의 일부로서 존재하는 인간들 (예컨대 교사) 공간의 지배를 받는 인간들, (예컨대 학생) 을 구분하게 된다. 이 책에 따르면, 전자는 '공간적 신체' 이고 후자는 '공간 내 신체' 로 일컫어진다. 이 공간-기계로 말미암은 행동과 생활의 규제는 개별 인간이 존재하기 이전부터 존재하는 선험적 기계로서 작동하게 되고 이에 따라 인간의 사고와 인지, 지각에 영향을 끼친다.

 

근대화가 이루어짐에 따라 학교 및 공장과 가정이 공간적으로 명확히 구분되게 되고, 가정은 더욱더 사적인 영역으로 정의된다. 자본주의의 원활한 작동을 위해 공장은 시간표 도입을 통해 노동자의 시간을 초 단위로까지 통제하게 되고, '임금=시간' 이라는 논리에 따라, 주어진 임금 이상의 시간적 효율을 뽑아 먹기 위해 공장이라는 공간 내에서의 대량적 분업 체계를 작동시키게 된다. 이를 위해서는 규율에 반기를 들지 않는 자본주의적 시간-공간 체제에 순응한 인간들이 필요해졌고, 학교는 이러한 인간들을 길러내는 예행연습적 공간이 된다.

 

근대과학혁명은 (자연) 과학의 수학화를 이루었고, 모든 것을 측정 가능하게 만들고자 하는 인간의 집념은 <모든 것의 통제 가능화> 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학교와 공장은 노동자를 통제 가능한 존재로 만들고자 했고, 불가해한 미지의 존재였던 자연은 정복 대상이 되어 왔다. 인류는 시간에 의해 '누적' 되어 가는 발전은 인류를 '진보' 로 이끌 거라는 신화에 매료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생각은 정복의 대상뿐 아니라 그 주체인 인간 또한 파멸시킬 것이 분명하다. 정상성 경계의 구분은 대립되는 비정상성과 경계 밖 타자를 만들어낸다. 이에 따라, 본 책은 인류가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의 수준에서의 평등 개념에서 더 나아가 호혜성의 개념을 발전시키고, 이타심을 통해 인간을 넘어선 공존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듯하다.

 

인간은 근대적 시·공간을 주체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가? 책에 따르면 인간이 시·공간을 통제하는 게 아니라, 인간이 시·공간에 통제를 당한다. 한 달 꼬박 걸려 읽어낸 책인데, 사실 4월 초에 개인적인 성과주의에 관한 현타가 있기도 했고, 읽으면서 <피로사회> 와 <심리정치> 의 내용이 겹쳐져 우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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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열정 (무선) -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아니 에르노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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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시간도 채 안 되어 완독하게 되어 당황한 미친 이야기. 어제 오전에 북클럽 택배로 받아본 작품이었는데, 격할지도 모르겠지만 읽자마자 든 생각은 그 한 마디였다.

 

나는 이 작품 제목의 번역이 <단순한 열정> 인 것이 적절한가? 라는 질문을 제기하고 싶다. 원제는 <Passion Simple> 인데 읽으면서 열정보다는 격정에 더 가깝지 않나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전반부 사랑의 열정에 관해 토로하고 묘사할 때는 열정인 채로 두어도 적합하겠다 싶긴 하지만, 이별 후 고통을 토로하는 마음까지 포괄하려면 그 지독한 양가적인 감정에 격정激情 이 더 어울리지 않나 ··· 라는 생각을 해본다. 단순하다는 수식어도 어울리지 않는다. 자신이 느끼고 느낀 passion 이란 감정의 절대성과 보편성, 혹은 은밀한 내면의 개인성을 설명하기 위해 굳이 표현하자면 <순전한 격정> 이라는 말이 더 적합하지 않았을까.

 

작품 속 화자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소식 등의 거대담론적 뉴스는 기억하고 묘사하지 못하지만, '그 사람' 의 사소한 모든 것을 기억하고, 그 사람을 생각하며 느꼈던 사소한 모든 감정을 기록한다. 물론 그 모든 것은 화자의 내면 세계에서는 결코 사소한 어떤 것이 아니지만. 사랑으로 말미암은 격정의 감정은 이별과 함께 고통의 감정으로 변하나, 흐르는 시간 속에서 그 또한 옅어지고 희미해진다. 화자는 그의 존재로 인해 자신과 타인이 구분되는 어떤 한계선에 다다를 수 있었음을 고백하며, 사회적 시선과 판단의 소용없음을 말한다. 그의 존재로 인해 욕망에 충실한 모든 것들이 자신에게로 왔고, 아이러니하게도 세상과 더 밀접해졌음을 고백한다.

 

여하튼, 앞서 언급했듯 이 소설은 미친 작품이나 (결코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다) 한편으로는 읽는 내내 스스로 당혹스러우리만치 집요하게 화자의 내밀한 자기 고백적 일기를 읽어 내려가고 있다는 생각에 당황하기도 했다. 어쩌면 내가 생애 누군가에게서 느끼고도 무심코 지나쳤을 매 순간의 감정을 화자가 짚고 묘사하고 있다는 생각에 뿌리 박히듯 페이지에서 눈을 떼지 못했던 걸 수도 있겠다.

 

발췌

 

[...]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그 사람이 전화를 걸어주거나 내 집에 와주기를 바라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약속 시간을 알려올 그 사람의 전화 외에 다른 미래란 내게 없었다.

 

[...] 나는 '언제나' 와 '어느 날' 사이에서 끊임없이 동요하면서 열정의 기호들을 모으고 있었다.

 

[...] 나는 그 사람을 내 존재를 위해 선택한 것이지 책의 등장인물로 삼기 위해 선택한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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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지 않는 기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59
이탈로 칼비노 지음, 이현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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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의식과 의지만으로 '존재' 하는 아질울포는 비인간적일 만큼 순백의 색으로 빛나는 갑옷 속 기사이다. 존재하나 실존하지 않는 그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기록들로 증명하고 확인할 수 있는" 작위와 칭호에 집착하는 자이다. 아질울포의 하인 구르둘루는 실존하나 존재에 관한 자각이 없는 자이다. 그의 이름은 구르둘루이면서 구르둘루가 아니기도 한데, 이는 "어떤 이름이든 그에게 달라붙어 있지 않고 흘러가" 버리기에 어떻게 부르든 그에게 별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존재하나 실존하지 않는 기사와 실존하나 존재하지 않는 하인 사이에, 생명 넘치게 살아 움직이는 젊은이들이 있다. 바로 랭보, 브라다만테, 소프로니아, 트라스만드이다. 특히 아버지의 명예를 울부짖으며 기사단에 뛰어든 랭보는 완벽한 기사 자질을 가진 아질울포를 동경하면서도 브라다만테의 사랑을 받는 아질울포를 질투한다. 브라다만테는 아질울포를, 랭보는 브라다만테를 사랑한다.

 

내 이름은 바로 이 여행의 끝에 있소.

 

존재하나 실존하지 않는 아질울포에게 자신을 존재하게 하는 <이름> 과 <작위> 란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하다. 트라스만드의 주장으로 한 순간에 존재의 위기를 겪게 된 아질울포는 자신의 이름과 작위를 지키기 위해 소프로니아를 찾아 나선다.

 

작품의 제목이 <존재하지 않는 기사> 라 아질울포가 주인공인 것 같으나 사실상 랭보와 브라다만테가 주인공이 아닌가 싶다. 관념으로만 이루어진 아질울포와 육체로만 이루어진 구르둘루 사이, 실존과 비실존 사이, 삶과 죽음 사이 그 어딘가에서 인생의 희로애락을 경험하며, 사랑을 위해 기꺼이 현재의 자신을 내던지는 둘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망자여,

난 당신의 평화보다는 나의 불안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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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의 시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83
이디스 워튼 지음, 송은주 옮김 / 민음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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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와 관습에 사로잡힌 뉴랜드 아처가 자신이 속한 사회의 무지와 위선, 인습을 자각하고도 '보통의 삶' 에서 벗어나지 못해 자신의 꿈을 가슴 속 깊은 곳에 묻어둔 채 회한에 사는 이야기. 설계된 무지와 위선으로 이루어진 '순수' 한 세계 속에서 자라고 교육받으며 자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인 메이 웰랜드와 연을 맺게 되어 감사하던 뉴랜드 아처. 엘렌 올렌스카의 등장은 진실은 말하지도, 생각조차 하지 않고 희미한 암시와 미묘한 뉘앙스로만 이루어진 그의 세계에 정면으로 부딪친다. 이혼 후 다시 완벽한 미국인이 되고 싶은 엘렌 올레스카는 "내가 이미 오래전에 눈뜬장님이 되었던 것들을 보도록 내 눈을 띄워 달라" 는 이야기와 함께 뉴랜드 아처가 자신이 살고 있는 뉴욕이라는 사회를 다시금 되돌아보게 만든다. 아주 오랫동안, 세세히, 마음이 불편해질 만큼. 그러는 사이 뉴랜드 아처는 자유롭고 인습에 저항하는 엘렌 올렌스카에게 이끌리게 되고, 동시에 젊은 여성을 산 채로 묻어 버리려 하는 '보통 사람들' 의 위선을 자각해 질식할 듯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그는 자신이 속한 사회가 모순투성이에 실체 없는 허구에 불과한 '순수' 로 이루어졌을 뿐이라는 걸 깨닫는다. 뉴랜드 아처는 엘렌 올레스카를 원했지만 자신이 자라온 작은 세계에서 벗어나 의무와 관습을 깰 용기는 없었고, 엘렌 올레스카는 자신의 존재가 뉴랜드 아처와 메이 웰랜드의 결혼생활에 상처로 남길 원하지 않았다. 결국 그는 뉴욕 사회가 부여한 의무의 존엄성으로 말미암아 메이 웰랜드와의 결혼을 유지한다. 사랑했지만 가질 수 없었던 엘렌 올렌스카는 그가 살면서 '일상' 을 지키기 위해 버려야만 했던 그 모든 것의 집약체인 환상으로 남게 된다.

 

 

이 작품은 중반부부터 빛을 발하는 작품으로 결말에 이르러서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울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다. 한 사람이 자신이 종속된 환경의 인습을 견디지 못해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는' 이야기인데 그는 과연 자신의 꿈이자 환상이었던 존재를 <잃었던> 것일까 <버렸던> 것일까. 분명한 것은, 뉴랜드와 엘렌이 서로를 아무리 사랑했다고 한들 헤어져 있었던 생애 절반이 넘는 긴 시간 동안 그들에겐 현실 속 각자의 삶이 있었고, 그 속에서 그들이 나누었던 사랑은 젊은 날의 추억으로 빛바래질 뿐이었다. 서로의 현실을 지키기 위해, 눈을 감아야만 볼 수 있는 존재로 남게 된 선택이 아이러니하면서도 현실적이었다.

 

발췌

 

[...] 모든 것에 꼬리표가 붙어 있을지 모르지만, 모든 사람에게는 아니죠.

 

[...] 여기에 진실이, 현실이, 그에게 속한 삶이 있다.

 

[...] 그가 성장해 온 작은 세계에서 남은 것은 무엇이며, 누구의 기준이 그를 굴복시키고 속박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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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스의 종말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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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존재, 다른 삶의 형식, 다른 세계를 부정하는 신자유주의의 소비사회 속에서 자아는 나르시시트화를 가속화한다. 부정성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상실하고 타자에게 버림받은 자아는 동일자의 지옥 속에서 긍정성에 질식하여 결국 우울증에 걸린다.

 

여태까지 읽은 한병철 교수님의 저서에서 말하는 모든 문제는 타자의 부정성이 사라져서 발생한다. 나의 지배 영역에 포섭되지 않는 타자의 비대칭성과 외재성을 전제하는 에로스. 에로스의 종말은 곧 타자의 소멸.

 

'에로스' 가 종말 한 시대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용기와 사유. "철학은 에로스를 로고스로 번역한 것" 이며 차이를 전제로 한 타자의 관점에서 <사유> 하기 위해선 용기가 필요하다. 즉 불가해한 삶을 살아온 나와 다른 존재인 타자를 환대하고 사유할 용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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