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스토럴리아
조지 손더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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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은 '외딴 지역' 에 위치한 어느 동굴에서 동료와 함께 '동굴인간' 을 재현하며 생계를 유지한다. 이 원시 인간의 재현은 365일 24시간 내내 이루어진다. 그곳의 사람들은 영어를 쓰지 못하며 동굴 밖 현실 세계의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팩스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들의 동굴에는 <아무도 머리를 들이밀지 않는다>. 이따금 동굴사람들을 상대로 한 자신의 우월적 위치를 확실히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나 관리자들만 들를 뿐이다. 그들의 의식주는 전적으로 관리자들에게 달려 있다. 테마파크의 소유인 동굴 속에 살며 동굴사람처럼 옷을 입어야 하며 동굴사람처럼 행동했을 때 음식을 하사받는다. 그들의 음식은 갓 잡은 죽은 염소이며 진짜 원시 인간처럼 직접 손질해서 먹어야 한다. 이 또한 동굴사람들의 업무 중 하나이다.

 

동굴 밖 사람들에게 그런 동굴사람들이 재현하는 '동굴인간' 의 삶은 자기 삶의 온전함을 확인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그들은 동굴사람이 재현물이 아닌 현실인간으로서 존재를 드러내면 분노하며 길길이 날뛴다. 자신들의 유희거리를 위해 동굴사람들이 무엇을 희생했는지, 그들의 상황과 여건을 알아보기 위해 <머리를 들이미는> 이는 어디에도 없다.

 

물론, 동굴사람들에게도 현실의 삶이 있다. 그들은 대개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하층민이다. 동굴 밖 누군가의 '볼거리' 를 위한 동굴인간을 재현한 값으로 쥐꼬리만 한 월급을 받는다. 돈을 계속 벌기 위해서는 늘 '긍정적' 으로 생각하고 말해야 한다. '할 수 있는 것' 을 해야 한다. 할 수 있는 것을 하려면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자신의 공간에 들어가 '자기 일' 에 관해 고민하지 말아야 한다. 개인적 우울을 내비치지 말아야 한다. 늘 '정상적인' 동굴인간을 재현해 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생계를 감당할 수 없다. 죽어가는 엄마와 자식을 위한 병원비를 벌 수 없다. 감옥에 갇힌 자식을 구해낼 수 없다. 생계를 위해 일을 해야 하지만, 일을 하기 위해선 가족을 돌봐 줄 간병인을 두어야 한다. 그리고 다시 그 간병인에게 생계를 위해 번 돈을 주어야 한다. 가난의 굴레가 지속된다.

 

동굴사람들은 자신들이 본 생리적인 변에 대해서도 회사에 비용을 부담시켰다는 이유로 값을 치러야 한다. 인간 '폐기물' 봉투는 사실 스스로를 '인간 폐기물' 로 낙인찍는 약속이나 다름없다.

 

한정된 자리를 두고 살아남기 위해 내 옆의 누군가를 고발해야만 살아남는 현실 속 시뮬레이션. 그 속에서 개인은 파트너 평가라는 명목으로 수평 감시를 종용당한다. (1) 파트너의 태도는 어떠한가 (2) 파트너를 평가하라 (3) 파트너에게 '명상' 이 필요한가. 관리자들은 이야기한다. "'최고' 의 모습을 보일 수 있도록 '일관되게' 일하면서 '진실' 을 말하라. 동료와 너는 별개의 존재이니 '평균 이하' 의 동료를 내팽개치는 것에 대해 죄책감이 아닌 자부심을 느껴라. 이 모든 것은 네가 사인한 <고용 약정서> 에 기재된 내용이다."

 

동굴인간들은 현실 모어인 영어로 이야기할 수 없다. 언어를 빼앗긴 자는 24/7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을 거세당한 것과 다름없다. 작품 내내 굶주려야만 하던 동굴인간은 '평균 이하' 의 동료를 '진실' 에 기반하여 평가한 후에야 보상을 얻는다. 동료에게 해고는 곧 살인과 다름없으나, 그 해고를 통해 갓 신선하게 잡은 염소를 하사받는다. 지속적인 (그러나 분명 일시적인) 고용을 보장받는다. 이 모든 부당함에도 그들에겐 자력구제할 능력이 없으며, 그 누구도 그들의 삶에 <머리를 들이밀지 않는다>.

 

누군가를 위한 유희의 재현 세계,

그것은 당신 옆 어느 삶을 희생한 대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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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쇼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26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지음, 서은혜 옮김 / 민음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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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적이 될 바에야 굶어 죽겠다는 다짐을 하던 인간은 또 다른 인간의 비도덕적 행위를 목도한 이후 자기 안에 도사리고 있던 악을 마주하게 된다. 그 어떤 이의 배경도 순수 악에서 비롯된 건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이 상대적이기에 서로는 서로에게 "그 정도 일쯤 당해도 싸다" 라며 비난을 퍼붓고 악을 행한다. 자신의 악행을 정당화하며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부여한다. 거듭되는 자연재해로 인한 도시의 쇠락 속 나라님에게조차 외면당하는 가장 낮은 곳의 존재들은 각자의 칼 끝을 서로를 향해 수평으로 겨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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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제14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이미상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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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젊작 중에서 좋았던 두 편

 

 

방임된 세 사람의 유사가족적 연대와 모험 ㅣ 단편 <모래 고모와 목경과 무경의 모험>, 이미상 저

 

카페에 세 여자가 있다. 그중 둘은 소설 쓰기의 어려움에 관해 이야기한다. 한 여자가 자신의 소설에는 한방, 즉 에피파니epiphany 가 없다고 하나 실은 그 한방의 부재가 자신의 <선택> 으로 말미암은 거라 주장한다. 이에 듣고 있던 다른 여자는 그건 선택이 아닌 <능력> 부재의 결과라 반박한다. 두 사람이 선택의 문제냐, 능력의 유무냐의 문제에 관해 논할 때 세 번째 여자가 플라스틱 용기와 비닐봉지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자신의 <실천> 을 보여준다. 비록 의지에 비해 몸이 따라주지 않는 세 번째 여자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선택에 따라 할 수 있는 바를 실천' 한다. 이런 세 사람의 이야기를 주인공 목경이 엿듣고 있다. 사실 엿듣기 위해 듣고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고모의 상중喪中 인 목경은 세 사람의 이야기를 듣다 고모와의 기억을 떠올린다.

 

가족으로부터 소외된 집안의 막내딸 고모와 양육의 책임을 던져버린 부모로 인해 방임된 목경과 무경. 세 사람의 관계는 고모가 집안에서 가출하여 목경과 무경의 집으로 오면서 시작된다. 어린 목경과 언니 무경은 꽤 다른 자매였다. 무경은 늘 책을 읽으며 ㅡ 어쩌면 현실도피와도 비슷한 모습을 보이며 ㅡ 지금은 경험할 수 없는 무수히 많은 이름과 세계 속에 매몰된다. 어린 목경은 부모 대신 자신과 함께 해주는 고모에 매몰되고 고모에 대해 언니 무경과도 공유하고 싶지 않은 독점적이고도 배타적인 소유욕을 느끼나, 세 사람의 모험 끝에서 고모의 선택은 무경이 된다.

 

액자식 구성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별개의 무관한 두 이야기가 병렬된 것으로 보이나 사실 선택과 능력의 문제라는 측면에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하고 싶다 한들 할 수 없는 일

어린 목경은 발랄하나 경험의 부족으로 언니 무경의 세계와 고모를 둘러싼 상황을 온전히 이해하기 힘들다. 고모를 독점하기 위해 고모의 관심을 끌기 위한 무엇이든 하려 하나, 애초에 고모의 내면을 알아차릴 경험 및 통찰이 부재했기에 고모의 선택을 받을 수 없었다.

 

할 수 있지만 하기 싫은 일

집안의 원치 않는 막내딸의 위치였던 고모는 어쩌면 살아오면서 하기 싫지만 해야 하는 (그러나 할 수는 있는) 일들을 해오는 것에 체념하며 살아온 걸지도 모른다. 자신과 비슷한 처지인 어린 조카들을 데리고 사냥을 떠나며 은밀한 내면을 보여주고자 하나 자신의 욕망이자 병기인 '츄츄' 를 잃어버리며 보이는 모습은 다시금 할 수는 있으나 하고 싶지 않은 일에 짓눌려 살았던 모습을 보이는 듯하다. 이런 지점에서 고모가 하기 싫은 일을 무경이 정확히 짚어내어 대신해내며 작품 속에서, 고모의 시선 속에서 '융기' 한다. 이는 어쩌면 조카와의 관계 속에서 고모가 찾아낸 (목경은 몰랐을) 한방이자 에피파니가 아니었을까.

 

단편 <모래 고모와 목경과 무경의 모험> 속 세 사람 고모와 목경과 무경은 가족의 보살핌으로부터 버려진 사람들이다. 작품은 이들이 유사가족을 이루며 시작되는 이야기이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가능과 선택의 문제라는 갈래 속에서 다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실천하는 액자 밖 이야기의 세 번째 여성의 모습이 인상 깊었다.

 

 

빈 괄호의 삶 ㅣ 단편 <제 꿈 꾸세요>, 김멜라 저

 

화자는 자살과 사고사의 중간쯤에서 애매하게 죽은 상태로 남겨질 시신과 공과금 고지서 등의 처리 문제로 생애 관계있던 사람들의 꿈속에 나타나고자 한다. 죽음의 원인에 관한 오해를 풀기 위해 사랑했던 이들의 꿈속에 나타나고자 한다. 친구, 연인, 엄마의 꿈속으로. 작품 속 망자는 길손이라는 이름으로, 길손의 길을 안내하는 자는 가이드라는 이름으로 지칭된다. 길손은 생애 걸어온 길을 너머 먼 길을 떠나는 나그네란 뜻으로 지어진 걸까. (그렇다면 꽤나 낭만적이다) 친구의 꿈속으로 갈까, 헤어진 연인의 꿈속으로 갈까, 엄마의 꿈속으로 갈까 고민하던 길손은 더 이상 자신의 삶을 설명하고 완결하기보다는 미완결의 빈 괄호의 상태로 두기로 결심한다. 자신을 위해 그들의 꿈속으로 찾아가기보다는, 그들을 위한 꿈을 만들어 주고자 한다.

 

내가 읽은 김멜라 작가님의 <제 꿈 꾸세요> 는 홀로 외롭게 죽어간 이가 사랑하는 이들의 꿈속에서 그들의 환대와 마중, 웃으며 떠나는 이별을 바라는 이야기였다. 죽은 자의 이야기가 이토록 서정적이고 말랑할 수 있을까. 삶을 빈 괄호의 상태로 남겨두겠노라 말하는 화자의 다짐이 인상적인데, 어쩌면 '빈 괄호' 란 어떤 선결된 판단도 유보하고 주어진 삶이라는 가능성의 바다를 마음껏 유영해 보라는 작가님의 메시지가 응축된 표현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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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쓰는가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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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문호의 왜 쓰는가에 관한 답이 궁금해 읽기 시작한 책. 자신을 이루는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에 관한 탐구로부터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미국 사회, 그리고 그 사회를 재현하는 방식에 관한 치열하고도 부단한 고뇌와 성찰이 인상적인 책이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인물의 행동을 위한 조건 및 환경적 요인에 관해 근원의 근원을 파헤치듯 철저하게 분석해 갈까. 본인 스스로가 유대인인 그와 다른 유대인 독자들 간의 관계는 흡사 리처드 도킨스와 진화론을 부정하는 이들의 관계 같기도 하고, 자신의 정체성에 관해 이토록 거리를 두고 객관적으로 성찰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하다. 독파 팀에서 마련해 주신 정영수 작가님과의 줌 토크 영상도 보고 <미국을 노린 음모> 를 비롯하여 그의 저서 몇 권을 읽은 후, 다시 읽어봐야겠단 생각이 든다.

 

한 시대를 풍미한 대문호의 '왜 읽는가, 왜 쓰는가, 왜 사는가, 어떻게 살 것인가' 에 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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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트릭스
로런 그로프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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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사생아로 태어나 수녀원에 버려지다시피 한 주인공 마리 드 프랑스는 수녀원장이 되면서 세상에서 소외되고 버려진 여성들만을 위한 유토피아를 만들고자 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의 아픔에 함께 울고, 그들을 위해 무기를 들며, 그들을 위해 환경을 개혁해 나가는 마리. 수녀들에게 그런 마리는 왕이자 교황이나 다름없는, 존재 자체로 혁명인 사람이었다. 마리는 수녀들의 현실적 고통에 직면하여 감당할 수 없는 괴로움에 휩싸일 때는 성서의 모든 문구를 여성형으로 바꾸곤 한다. 자신들이 이루어 낸 지상의 유토피아는 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수녀들을 위해서임을 되새긴다. 한 사람의 일대기를 다룬 이야기라 마리의 죽음으로 끝을 맺은 이야기였으나, 오히려 마리의 죽음을 반드시 보여주어야 했던 이야기이기도 했다고 생각한다. 마리가 죽은 후에도 생애 내내 바랐던 유토피아적 이상이 수녀들의 삶 속에 구현되었다는 걸 볼 수 있었기에. 이브로부터 이어지는 유구한 여성의 역사 속에서 지금 나와 함께 현존하는 자매들을 위한 길을 개척해 나가는 자에 관한 이야기.

 

발췌

 

[...]  해를 거듭하면서 마리는 수녀원의 고해신부가 될 것이다. 고해를 들으면서, 그녀의 분노는 그들의 편에서 더욱 뜨겁게 타오를 것이다.

 

[...]  마리는 고해신부가 됨으로써 신과 더 가까워지지는 않았다. 그녀는 그 때문에 실망한다. 이렇게 하면서 소명의 근원을 발견할 수 있기를 바랐기에. 하지만 위로가 되는 게 있다면, 각자의 비밀이 공유될 때마다 수녀원장에 대한 수녀들의 사랑이 점점 커가는 것이 느껴진다는 것이다.

 

[...]  그들의 슬픔이 마리를 너무 무겁게 내리눌러 잠을 이룰 수 없을 때, 마리는 종종 필사실로 내려가 라틴어로 된 미사전서와 시편을 여성형 단어들로 바꾼다. 여자들만 듣고 말할 글인데 안 될 게 뭐 있는가? 그녀는 그렇게 바꾸면서 혼자 웃는다. 남성형 단어에 줄을 그어버리고 여성형으로 대체하는 것은 사악하게 느껴진다. 재미있다.

 

[...]  이 공동체는 소중하고, 여기엔 심지어 가장 많이 미친 사람, 버려진 사람, 까다로운 사람을 위한 장소도 존재하고, 이 울타리 안에는 가장 사랑받지 못한 여인들에게 줄 수 있는 사랑도 충분하다. 기타의 삶은 얼마나 짧고 외로웠는가. 잔인한 세속의 세상에서 길을 잃고 고립되어 살았던 사람. 여기 자신을 사랑해준 자매들 없이 살아야 했다면, 그녀가 이 결함 많고 힘든 삶에 가져온 아름다움은 아주 적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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