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스본행 야간열차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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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담을 쌓은 채 문두스Mundus 라는 별명 하에 고전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낙으로 살던 그레고리우스. 어느 날 그는 눈앞에서 이루어지는 한 여자의 자살 시도, 구해내었으나 눈앞에서 홀연히 사라진 여성의 자취를 쫓아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으로 향한다. 그리고 우연히 아마데우라는 한 포르투갈 귀족 의사의 일기에 매료되어 그의 삶의 흔적을 쫓아가기 시작한다.

 

내 인생을 투자하여 나와 완전히 다른 삶을 산 이의 궤적을 따라간다는 것은 일견 시간 낭비처럼 보이나, 어쩌면 그 삶을 거울삼아 내 인생을 돌이켜 볼 수 있는 기회나 마찬가지다. 사실 그는 고전 속 라틴어 문장들이 "침묵을 품고 있으며 대답하라고 강요하지 않기 때문에" 고전을 사랑했다. 그러나 이는 어쩌면 고전 속 인물들의 <자기 삶을 사는 것> 에 대한 동경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는 이제 동시대의 그러한 인물, 어쩌면 자신의 이상적 자아와 다름없는 어느 포르투갈 귀족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면서 아이러니하게도 그 영웅의 부서질 듯 여린 내면과 자기 삶을 반추하게 된다.

 

리스본에 도착 후 망가진 안경을 고치는 과정에서 그레고리우스는 새로운 삶이 확장되는 경험을 한다. 중립국 스위스에서 현실과 동떨어진 고전을 연구하는 학자로 살았던 그레고리우스. 누군가에겐 삶을 내걸어야 하는 혁명의 <현실> 이 그에게는 책 속 삶처럼 현실과 유리된 파편화된 <장면> 에 불과하지 않았을까? 중립국인 베른을 떠나 리스본으로 온다는 것, 그리고 안경을 고친다는 것은 곧 자신이 알아온 낯익은 "문법" 세계에서의 탈피, 새로운 그러나 현존하는 "말하면서 배워야 하는" 세계로의 진입이나 마찬가지였다.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
독재, 폭력, 침묵, 그리고 여행


그레고리우스가 '읽고' 아마데우가 '살았던' 리스본은 2차 대전 이후 독재에 맞섰던 정치적 혁명이 일었던 한 서구 유럽 도시의 상징이었다. 아마데우는 비록 의사로서였지만 "리스본의 인간백정을 살렸다" 는 이유로 공동체의 비판에 직면하면서 저항운동에 가담하겠다고 각성하게 된다. "독재가 하나의 현실이라면 혁명은 하나의 의무다." 인간 백정을 구한 죄, 독재 정권 하에 활동했던 판사의 아들이라는 그의 신분은 어쩌면 반드시 저항운동에 참여해 자신을 정당화해야 할 필연적 이유였을지 모른다.

 

타인은 너의 법정이다

-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기를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예레미야 23:24)

 

그런데 타인의 시선이 왜 그로 하여금 생을 걸 위험한 저항운동에 뛰어들 근거가 되는가? 귀족이어도 현실 정치와 유리될 수 없음을 깨달아서인가? 어쩌면 이는 그의 성장 배경에서부터 짚어봐야 할 점인지도 모른다. 사실 그가 겪어 온 현실 속 독재는 외부 세계의 독재만이 아니었다. 이미 그는 성장하는 내내 집안 내 미시적 독재에 억눌리고 있었다. 신뢰와 인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옥죄는 사랑을 전하는 어머니, 평생 숨이 막힐 만큼 일방적으로 고마움을 표하는 동생, 그리고 독재 정권 하의 판사였던 아버지의 침묵. 아마데우는 아버지가 말한 "타인은 너의 법정이다" 라는 말에 진저리 치면서도, 이를 영혼에 각인시킨다. 그는 단 한 번도 집안에서 자신의 속내를 속시원히 털어놓을 수 없었기에 언제나 침묵을 지켰지만, 침묵에 싸인 사람들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한쪽의 침묵이 다른 쪽의 침묵을 불러온다는 사실 또한 깨닫지 못했다.

 

불안정하고 민감한 그에게 에스테파니아의 존재는 그녀가 지각하던 대로 "법정 바깥으로, 자유롭고 활기찬 인생의 장소로 나갈 수 있는 기회, 오로지 그의 의지와 열정대로 살 기회" 나 마찬가지였다. 아마데우는 그녀와 함께 리스본을 떠나면서, 자신을 억누르던 그 모든 압제와 요구와 금기를 벗어나고자 한다. 그러나 에스테파니아는 이것은 오로지 아마데우 혼자만의 여행일 뿐, 에스테파니아 자신과 '함께' 하는 여행은 될 수 없음을, 자신은 아마데우가 이루고자 하는 삶의 해방을 위한 도구가 될 수 없음을, 더불어 아마데우가 자신의 모든 것을 알려고 하는 것 또한 일종의 관계적 폭력임을 인지시키며 각자의 길을 걷게 된다.

 

우리는 과연 서로에 대해

무엇을 아는가

우리는 많은 경험 가운데

기껏해야 하나만 이야기하며,

침묵하고 있는 경험 가운데,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삶에

형태와 색채, 멜로디를 주는 경험은

숨어 있어 눈에 띄지 않는다

 

사실 이는 나조차 나라는 존재의

일부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살면서 나라는 존재의

일부만을 알 수 있다면,

나머지 '내 삶' 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작품에서 계속적으로 은유되는 열차는 내릴 수도 없고, 궤도와 방향도 목적지도 알 수 없는 삶 그 자체로서의 공간이다. 사람들의 만남이란 한밤중에 아무런 생각 없이 달려가는 두 기차가 서로 스쳐 지나가는 것. 그 속에서 서로를 알아볼 시간도 없는 사람들은 그저 덧없는 시선을 주고받을 뿐이다. 그러나 기차 '속' 사람들은 자신의 기차를 꾸려나가면서도 이따금 자신의 칸에 들어오는 낯선 이들의 존재에 환기되기도 한다.

 

문득 문두스(Mundus, 세계·우주·하늘)라 불리던 그로 나타나고서야 내면의 고통에 침잠했던 아마데우의 아픔이 이해 받을 수 있었던 건 아닌지, 생각해본다. 아드리아나의 말대로 그레고리우스는 그를(사실 그의 죽음을) 영원의 시간 속에 봉인한 것과 동시에, 그가 곧 살아 돌아온 아마데우 그 자체였으니까.

 

아마데우에게 리스본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속박과 금기를 상징하면서도 자신의 현실이자, 떠나면 향수병을 일으키는 곳이었고, 그레고리우스에게 리스본은 새로운 삶의 시작이나 마찬가지인 곳이었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실망시키는 것들을 추적하고 수집하여, 진짜 삶을 따라가야 한다.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 솔직한 삶을 위해서는 <아마데우의 리스본> 을 떠나면서 <그레고리우스의 리스본> 으로 향할 용기와 강인함이 필요하다.

 

목적지 없이 끝없이 달리는 밤의 여정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마주하고, 마주해야 하는가. 목적과 방향을 정할 수 없는 열차는 불확실한 삶과 같지만, 터널을 뚫고 맞이한 밤의 끝자락에는 빛과 내일이 존재하리라 생각한다.

 

침묵으로 가득 찬 고전 문법서가 아닌 말하기 위해 말을 배워야 한다는 걸 깨달은 자의 이야기.

저항의 물결로 가득찬 외부 세계와의 조우 속에서 아이러니하게도 내면 속 침묵이라는 억압을 깨고 해방을 맞이했던 자의 이야기.

그리고,

어두운 현실 속에서도 저항의 목소리를 높여 밤의 침묵을 깨고자 했던 이들의 이야기.

 

어두운 시대 속 부모의 권위에, 시대의 독재에, 자신의 내면에 짓눌려 침묵하던 이들이 언어를 찾고자 하는 투쟁. 그것이 고전이라는 자기만의 성에 갇혀 있던 이방인의 시각과 맞물려 서술되어 그 이방인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어주는 이야기.

 

리스본행 야간열차.

 

발췌


[...]  다른 사람들을 향한 우리의 시선은 스치며 지나가는 밤의 만남처럼 언제나 서로에게서 벗어나고, 추측과 생각의 단상과 날조된 특성들만 우리에게 남겨두는 건 아닌지. 만나는 게 사실은 사람들이 아니라, 상상이 던지는 그림자들은 아닌지.

 

[...]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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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과 연인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0
D.H. 로렌스 지음, 정상준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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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속 사랑하는 이들은 끊임없이 서로를 사랑함과 동시에 증오한다. 상대가 자신에게 온전히 소유되기를 거부하면 증오하고, 그로 인해 생기는 불안감 때문에 증오한다.

 

2부의 폴 모렐이 가진 그런 불안감은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엄마와 아들의 관계는 서로에게 빈틈없이 속한 관계였을 테니. 그러나 그런 관계를 아무리 연인이라 해도 타인에게서 찾고자 하면 갈등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다.

 

늘 자신의 미래 속에 어머니 모렐 부인의 존재를 그려 넣던 폴이 어머니의 임종 앞에서 어머니가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동생 애니와 이야기하는 장면이 충격적이면서도 작품을 읽는 내내 겪어온 바 어떤 마음인지 알 것 같아 숙연해졌다. 그러나 모렐 부인에게는 미안하지만, 죽음의 순간에서 폴 모렐이 해방을 맞이한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두 번의 연애를 실패했지만 그럼에도 폴 모렐의 삶이 끝난 건 아니다. 자신의 삶을 지탱해 준 엄마의 상실로 인한 슬픔을 가슴에 묻고, 남은 인생을 향해 앞으로 걸어간다는 면에서. 어쩌면 폴에게는 축복이기까지 하다. 삶의 모든 것을 통제하려 드는 구속을 떨치고 진짜 자신의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이니까.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에게 삶을 선물한 어머니.
그러나 진짜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그 사랑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걸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발췌

 

[...]  어머니는 이 모든 것들 가운데 그 자신을 지탱해 준 유일한 존재였다. 그리고 그녀는 가버렸고 이 어둠 속에 뒤섞여 버렸다. 그는 그녀가 자기를 만져주고 그녀 옆에 자신을 두기를 바랐다. 그러나 아냐, 그는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갑자기 몸을 돌리면서 도시의 황금빛 인광을 향해 걸어갔다. 그는 주먹을 꼭 쥐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는 어머니를 따라서 그 방향으로 어둠을 향해 나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는 희미하게 소음이 들리고 불빛이 타오르는 도시를 향하여 재빨리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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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멀 피플
샐리 루니 지음, 김희용 옮김 / arte(아르테)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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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작품을 성장물로 생각하기 때문에, 답답이들의 연애담으로만 치부되는 것이 안타깝다. 사실 둘은 겉으로는 늘 '보통 사람' 인 척하고 싶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이를 위해 세간의 중심에 있었으나 가족에게조차 방임과 학대를 당해 정서적으로는 세상의 변두리에서 겉돌기만 했던 메리앤은 자기 내면의 중심을 자아가 아닌 타자로만 채우려 했고, 이는 코넬 외 다른 연인과의 자기파괴적 관계를 지속하던 지점에서 절정에 달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반면, 코넬은 견고한 자신만의 성을 쌓고 그 속에서 스스로 옥죄며 살고 있는 자신을 타자가 들여다볼까 노심초사했던 것으로 보이고, 이는 자존심 때문에 메리앤에게조차 자신의 재정적 어려움을 이야기하지 못했던 점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말하자면 메리앤은 자아의 부재가, 코넬은 자의식 과잉이 문제였던 건데, 이런 둘에게 서로는 서로에게 다른 종류의 용기를 주었다. 코넬은 메리앤에게 세상 속으로 스며들 용기를, 메리앤은 코넬에게 세상 밖으로 나아갈 용기를 주어, 둘은 비로소 보통 사람(Normal People)처럼 살 수 있게 되고 그래서 결말이 정말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처음에 마지막 장면을 맞닥뜨렸을 때는 두 사람이 함께하며 행복하길 바랐던지라 이별 장면이 슬퍼서 하염없이 울기만 했었다. 하지만 곱씹어 생각할수록 이 작품은 마지막 장면을 위해 달려온 거나 마찬가지란 생각이 들었다. 연리지처럼 서로를 옭아매면서도 함께 성장해 온 두 사람이 서로의 미래와 안녕을 위해 이별하게 된 셈이었으니.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병이 들지도 몰라" 라고 이야기하는 코넬에게 그럴지도 모르겠으나 그건 곧 순간일 뿐이고 일 년 뒤 서로가 어디에 있을지, 무슨 일을 경험하고 있을지 '장담하지 말라' 라는 말을 전하는 메리앤. 그러면서도 코넬의 "네가 없었으면 난 여기에 없었을 거야" 라는 말은 부정하지 않는다. 실제로 메리앤이 불안하고 힘들 때마다 코넬이 메리앤에게 언제든 돌아와 쉴 수 있는 안식처가 되어주었던 만큼, 메리앤 또한 코넬이 자신의 알을 깨고 나와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서로의 존재로 인해 내면의 안팎을 단단하게 다진 둘은 인생의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게 된 셈이었으니까.

 

개인적으로 이 작품에서 가장 명대사스러운 대사를 꼽자면 "We have done so much good for one another." 이나, 둘의 삶을 관통하면서도 앞으로의 희망을 보여주는 대사는 "(코넬) I will go. (메리앤) And I will stay. And we will be okay." 라고 생각한다.

 

세상을 방황하던 두 사람이 서로를 만나 삶을 마주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고, 그러면서도 상대로부터 독립하여, 서로와 다시는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어긋난 길을 걸을지라도, 각자가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서로의 행복과 안녕을 빌어주는 모습이 참 인상 깊었던 작품. 원작도 드라마도 다 너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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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토럴리아
조지 손더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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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은 '외딴 지역' 에 위치한 어느 동굴에서 동료와 함께 '동굴인간' 을 재현하며 생계를 유지한다. 이 원시 인간의 재현은 365일 24시간 내내 이루어진다. 그곳의 사람들은 영어를 쓰지 못하며 동굴 밖 현실 세계의 사람들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팩스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들의 동굴에는 <아무도 머리를 들이밀지 않는다>. 이따금 동굴사람들을 상대로 한 자신의 우월적 위치를 확실히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나 관리자들만 들를 뿐이다. 그들의 의식주는 전적으로 관리자들에게 달려 있다. 테마파크의 소유인 동굴 속에 살며 동굴사람처럼 옷을 입어야 하며 동굴사람처럼 행동했을 때 음식을 하사받는다. 그들의 음식은 갓 잡은 죽은 염소이며 진짜 원시 인간처럼 직접 손질해서 먹어야 한다. 이 또한 동굴사람들의 업무 중 하나이다.

 

동굴 밖 사람들에게 그런 동굴사람들이 재현하는 '동굴인간' 의 삶은 자기 삶의 온전함을 확인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그들은 동굴사람이 재현물이 아닌 현실인간으로서 존재를 드러내면 분노하며 길길이 날뛴다. 자신들의 유희거리를 위해 동굴사람들이 무엇을 희생했는지, 그들의 상황과 여건을 알아보기 위해 <머리를 들이미는> 이는 어디에도 없다.

 

물론, 동굴사람들에게도 현실의 삶이 있다. 그들은 대개 가난하고 교육받지 못한 하층민이다. 동굴 밖 누군가의 '볼거리' 를 위한 동굴인간을 재현한 값으로 쥐꼬리만 한 월급을 받는다. 돈을 계속 벌기 위해서는 늘 '긍정적' 으로 생각하고 말해야 한다. '할 수 있는 것' 을 해야 한다. 할 수 있는 것을 하려면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자신의 공간에 들어가 '자기 일' 에 관해 고민하지 말아야 한다. 개인적 우울을 내비치지 말아야 한다. 늘 '정상적인' 동굴인간을 재현해 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생계를 감당할 수 없다. 죽어가는 엄마와 자식을 위한 병원비를 벌 수 없다. 감옥에 갇힌 자식을 구해낼 수 없다. 생계를 위해 일을 해야 하지만, 일을 하기 위해선 가족을 돌봐 줄 간병인을 두어야 한다. 그리고 다시 그 간병인에게 생계를 위해 번 돈을 주어야 한다. 가난의 굴레가 지속된다.

 

동굴사람들은 자신들이 본 생리적인 변에 대해서도 회사에 비용을 부담시켰다는 이유로 값을 치러야 한다. 인간 '폐기물' 봉투는 사실 스스로를 '인간 폐기물' 로 낙인찍는 약속이나 다름없다.

 

한정된 자리를 두고 살아남기 위해 내 옆의 누군가를 고발해야만 살아남는 현실 속 시뮬레이션. 그 속에서 개인은 파트너 평가라는 명목으로 수평 감시를 종용당한다. (1) 파트너의 태도는 어떠한가 (2) 파트너를 평가하라 (3) 파트너에게 '명상' 이 필요한가. 관리자들은 이야기한다. "'최고' 의 모습을 보일 수 있도록 '일관되게' 일하면서 '진실' 을 말하라. 동료와 너는 별개의 존재이니 '평균 이하' 의 동료를 내팽개치는 것에 대해 죄책감이 아닌 자부심을 느껴라. 이 모든 것은 네가 사인한 <고용 약정서> 에 기재된 내용이다."

 

동굴인간들은 현실 모어인 영어로 이야기할 수 없다. 언어를 빼앗긴 자는 24/7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수단을 거세당한 것과 다름없다. 작품 내내 굶주려야만 하던 동굴인간은 '평균 이하' 의 동료를 '진실' 에 기반하여 평가한 후에야 보상을 얻는다. 동료에게 해고는 곧 살인과 다름없으나, 그 해고를 통해 갓 신선하게 잡은 염소를 하사받는다. 지속적인 (그러나 분명 일시적인) 고용을 보장받는다. 이 모든 부당함에도 그들에겐 자력구제할 능력이 없으며, 그 누구도 그들의 삶에 <머리를 들이밀지 않는다>.

 

누군가를 위한 유희의 재현 세계,

그것은 당신 옆 어느 삶을 희생한 대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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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쇼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26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지음, 서은혜 옮김 / 민음사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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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적이 될 바에야 굶어 죽겠다는 다짐을 하던 인간은 또 다른 인간의 비도덕적 행위를 목도한 이후 자기 안에 도사리고 있던 악을 마주하게 된다. 그 어떤 이의 배경도 순수 악에서 비롯된 건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이 상대적이기에 서로는 서로에게 "그 정도 일쯤 당해도 싸다" 라며 비난을 퍼붓고 악을 행한다. 자신의 악행을 정당화하며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부여한다. 거듭되는 자연재해로 인한 도시의 쇠락 속 나라님에게조차 외면당하는 가장 낮은 곳의 존재들은 각자의 칼 끝을 서로를 향해 수평으로 겨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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