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 슬립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1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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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건대, 레이먼드 챈들러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으나 그의 작품은 처음 읽었다. 타임지 선정 100대 소설 중 하나, 하드보일드 탐정소설 장르의 대가 등 그와 그의 작품을 수식하는 표현들에 혹해 별생각 없이 전자책 구매를 했었다. 그런데.

 

마초 필립 말로의 눈에 투영된 작품 속 여성들의 모습은 언제나 대상화되어 있으며 어딘지 모르게 관계적 층위에서 그의 아래에 존재한다. 냉철하고 이성적인 자신을 위기에 빠뜨릴 만큼 매혹적인 팜므 파탈femme fatale 인 비비안, 정신적으로 미숙하여 냉철하고 이성적인 자신의 정신적 안내가 필요한 카멘, 누군가의 부인, 이름도 없이 블론드라는 머리색으로만 지칭되는 여성 등. 난초를 '창녀' 냄새로 표현하는 등 군데군데 역한 포인트가 더러 있었는데, 공통점은 작품 속 남성 캐릭터들은 이성을 가지고 행동하는 반면, 여성 캐릭터들은 동기와 의도를 가지고 행동한다 한들 그 양상이 마치 그리스 신화의 세이렌처럼 '중심' 인물을 위험에 빠뜨릴 행동 혹은 개인의 사리사욕을 위한 이기적인 동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

 

여하튼, 읽는 내내 불편했다. (내가 놓친 이 작품의 '위대한' 특징들이 있을지라도) 계속해서 30년대 작품임을 되새기면서 읽어야 할 만큼. 눈에 그려질 듯 생생한 묘사가 특징인 소설인데, 아이러니하게도 그 묘사에서 시대적 한계성을 띠는 미소지니misogyny 가 두드러지며, 그 묘사를 통해 인물의 전형화가 이루어진다. '탐정 이미지' 의 스테레오타입stereotype 도 이 작가의 업적이라고 하니, 뭐, 그럴 만도.

 

사실 여기까지만 생각하고 말면 시간을 버린 셈이라 빡칠 것 같아서 <이해할 수 있는 불편함이 늘어간다는 것> 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더불어 1930년대와 2023년의 간극에 대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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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전쟁 - 성스러운 폭력의 역사
카렌 암스트롱 지음, 정영목 옮김 / 교양인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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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야훼를 믿는 아브라함계 유일신교 3대장 ㅡ 유대교, 기독교(가톨릭, 개신교), 이슬람교 ㅡ 때문에 세상에 전쟁이 끊이지 않는다고들 한다. 그리고 이는 종교가 본질적으로 폭력성을 내포하고 있기에 어쩔 수 없다는 논리를 기반으로 한다.

 

세계적으로 저명한 종교학자 카렌 암스트롱의 <신의 전쟁> 은 이러한 통념에 반박하며 신의 이름으로 가해져 온 '성스러운' 폭력의 역사가 진정 종교만의 책임인지 의문을 제기하며 종교를 수단으로 사용하면서도 목적인양 전면화시키는 농경 기반 제국의 폭력(의 역사)을 고발하는 작품이다. 저자의 수십 년의 연구가 녹아 있는 작품이라 열흘간 읽으면서도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평소 지문을 읽으면서 의문스러웠던 포인트들이 있었던지라 그 부분을 해소하고자 서구 기독교 역사를 중심으로 읽었다.

 


농업은 인류를 정착시키고 문명을 만드는데 기여한 것도 사실이었으나, 책에 따르면 농업을 기반으로 한 체제는 폭력적일 수밖에 없다. 잉여 생산물의 여부 및 그 차이는 계급 사회의 기반을 형성했고, 지배자는 국가 통치 기술로써 종교를 이용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가진 자는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폭력과 약탈을 일삼았다.

 

초기 종교들은 이러한 농경 사회에서 비롯된 제국의 폭력성에 반기를 들며 시작된다고 한다. 특히 농경국가의 폭력성을 고발했던 구약은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여금 "가나안의 도시 국가들로부터 도망 나오면서 농경 사회의 체제 폭력에 정면으로 맞서는 이데올로기를 발전시킬 것" 을 이야기한다. 더불어 이스라엘인들에게 구약은 "도시 생활의 계층화된 압제를 버리고 목자 생활의 자유와 평등을 얻으라" 고 고집하는 약속과도 같았다. 예수는 당대 모순적이고도 폭력적인 지배 체제의 질서에 반기를 드는 혁명가와도 같았다. 그리고 그의 죽음 이후 이어지는 순교자들의 죽음은 신앙의 중심화인 동시에 국가 폭력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슬람교 또한 당대 농경 체제가 유발하는 계급 체제에 반기를 들며 제국에 대항한 공동체 지향적인 메시지를 전파하기 위한 것이 시작이었다.

 

순교자 숭배는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 되었다. 이들이 예수가 유일무이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교회의 한가운데에는 신성한 권능을 지닌 ‘하느님의 친구들’이 있었다. 순교자들은 ‘다른 그리스도’였으며, 그들은 죽기까지 그리스도를 모방함으로써 그리스도를 현재로 가져왔다. [...] 순교는 늘 소수의 항의가 되지만, 순교자들의 폭력적 죽음은 국가의 구조적 폭력과 잔혹성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순교는 늘 종교적일 뿐 아니라 정치적 선택이었으며, 이것은 나중에도 마찬가지다. 제국의 적으로 겨냥당하고 당국과 완전히 비대칭적인 권력 관계를 맺고 있는 이 기독교인들의 죽음은 다른 종류의 충성을 도전적으로 주장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미 로마보다 본질적으로 우월한 고귀함을 얻었으며, 순교자들은 자신의 죽음을 억압자의 문간에 갖다놓음으로써 효과적으로 억압자를 악마로 만들었다. 동시에 이 기독교인들은 원한의 역사를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고, 이것이 그들의 신앙에 새롭게 공격적인 날을 세우게 된다.

 


기독교는 제국에 반기를 들며 이어진 종교의 전통이었다. 그러나 로마 제국은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며 '기독교인 황제' 라는 모순적인 존재를 탄생시킨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타자에서 주체가 된 기독교는 제국주의의 특징인 강탈과 폭력에 오염된다. 이단은 이제 더 이상 교리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제정분리가 불가능했던 로마에서 다른 길을 가는 이단은 곧 황제에 대한 반기, 더 나아가 팍스 로마나에 대한 위협을 의미했기 때문에 국가적 차원에서 이단이 탄압되기 시작한다. 신앙인들은 제국을 기독교화하고자 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겠으나, 현실은 신앙이 제국주의화되었다.

 

모든 성공한 제국의 이데올로기에 되풀이해 나타날 세 가지 주제를 한꺼번에 볼 수 있다. 제국의 선과 그것에 반대하는 악한 자들을 대립시키는 이원론적 세계관, 통치자를 신의 대리자로 보는 선민 사상, 세상을 구한다는 사명.

 


문명은 늘 강제적으로 이루어지며, 따라서 국가 폭력은 공공질서에 당연한 것으로 내재화되어 왔을 것이다. 농경 사회에서 산업 사회로의 변이 또한 이 폭력의 과정이 수반되었고, 그 속에서 불안감을 느낀 이들은 상상의 적을 만들어 타자화시키고 폭력을 행사한다. 끊임없는 <타자에 대한 불안> 은 유대인과 무슬림을 비롯한 '이교도' 에서 '이단' 으로, 이단에서 '타민족' 으로, 주류 문화에 동화되지 못한 '소수 집단' 으로 확장되어 나간다.

 

농경 국가의 억압은 산업화의 구조적 폭력으로 대체되었다. 더 자비로운 국가 이데올로기가 발전하고 그 어느 때보다 많은 사람이 전에는 오직 귀족에게만 가능했던 안락을 누리게 되지만, 일부 정치가들의 최선을 다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건널 수 없는 간극이 늘 부자와 빈자를 갈라놓는다. [...] 산업화는 민족 국가도 낳았다. 농경 제국은 단일 문화를 강제할 기술이 없었다. 근대 이전 왕국의 경계와 영토는 느슨하게 규정할 수 있었을 뿐이며, 군주의 권위는 일련의 중첩된 충성을 통해 존중되었다. 하지만 19세기에 유럽은 중앙 정부가 통치하는 분명하게 규정된 국가로 재구성되었다. 산업 사회는 표준화된 읽고 쓰는 능력, 공통어, 인간 자원의 통일적 통제를 요구했다. 신민은 통치자와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경우에도 통합된 ‘민족’, 즉 ‘상상의 공동체’ ? 이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도 깊은 관련성을 느끼라는 권유를 받는다. ? 에 속하게 되었다.

 


책의 말미에서 저자는 <누가 세계의 고통에 책임을 져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인류사에서 종교는 늘 공동체를 향했다. 지배 계급의 논리와 합치되며 폭력과 약탈에 변질되어 오긴 했으나, 그럼에도 본질은 주류 체제에서 소외당한 이들을 끌어안기 위한 것이었다.

 

역사 속 산업혁명과 함께 수반된 제국주의적 폭력은 국외로 뻗어 나가 타자 착취를 정당화하였고, 이는 특히 라틴아메리카와 아시아대륙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십자가의 폭력으로 침략당한 라틴 아메리카가 아이러니하게도 가톨릭의 힘으로 해방을 맞이하고, 보수적인 가톨릭이면서도 사회 참여적인 해방 신학이 가장 발달한 곳이라는 점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종교로 가장한 군주의 폭력성을 격파하기 위해 종교를 개인화하는 과정이 근대의 역사였다면, 종교가 주류에서 소외된 타자들을 위해 다시 공동체를 향하는 것이 곧 탈근대의 역사라는 말이 마음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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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를 보여주마
니콜라이 프로베니우스 지음, 성귀수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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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속 에드거 앨런 포는 한평생 이해받지 못한 외로운 이였다. 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어 마음 둘 곳 하나 없던 포는 순수한 아름다움이라는 차원에서 문학에 빠져들게 된다. 그는 꿈, 사랑, 죽음, 악 등 자신이 본 세계를 그대로 문학적으로 구현해 내고자 애쓰지만 보수적인 19세기 미국 사회는 그를 오해하고 무시한다. 그중 가장 두드러진 것은 비평가이자 저널리스트인 그리스월드로 포의 작품에 매번 혹평을 제기해 포를 낙담하게 한다. 설상가상으로 포의 작품을 딴 모방 범죄까지 발생해 포의 위치는 점점 위태로워지기 시작한다.

 

그 범죄는 포의 집안에서 도망친 노예 레이놀즈가 저지른 것으로 레이놀즈는 포의 예술적 경지와 어두운 면모를 예찬하며 숭배한다. 그러나 읽을수록 아리송한 것은 새뮤얼 레이놀즈는 과연 에드거 앨런 포와 별개의 인물이 맞는가라는 것이다. 그는 에드거와 주종관계를 이루면서도 친구관계를 맺기도 하고, 동시에 당대 보수적 사회에서 그 누구도 이해해주지 못하는 깊은 내면의 어떤 것을 이해해 주는 유일한 존재이기도 하므로, 에드거의 또 다른 자아는 아닐까라는 궁금증을 자아내게 한다. 레이놀즈의 존재는 작품을 에드거 앨런 포의 일대기를 묘사하는 듯하면서도 장르소설의 경계를 넘나들게 만든다.

 

다른 이들은 어떻게 읽었을지 모르겠으나, 개인적으로는 조금 슬픈 작품이었다. 처음엔 좀 지루하긴 했으나 장이 넘어갈수록 이해받지 못하고 소통이 튕겨지는 상황, 인정욕구를 분출하는 상황 속에서 포가 고군분투하는 상황이 그려져 슬펐다. 포는 허영심이라 했으나 그 말조차 자조적으로 들려 슬펐다. 공포란 무엇인가. 어쩌면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기를 도전하는 이에 대해 경멸을 내보이는 구시대적 관습, 소외된 이에 대한 환대 없는 무관심, 한 존재를 미치지 않고는 살 수 없게 만드는 사회적 풍토일지도 모르겠다.

 

에드거 앨런 포는 공포를 유발하는 존재인 게 맞는가
혹, 그를 미치게 하는 사회가 공포인 것은 아닌가

 

발췌


[...]  문학과 현실, 어느 것이 먼저인가? 살인과 그 살인의 묘사, 어느 것이 우선인가? 공포인가, 문장인가? 탈출구가 없다.

 

[...]  머지않아 저들은 당신의 세계를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공포를 발견하면서부터 세상의 질서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될 거예요.

 

[...]  진짜 에드거 앨런 포는 계속 살아가기에는 너무 미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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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노린 음모
필립 로스 지음, 김한영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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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의 예기치 못한 모든 일이 종이 위에 필연적인 일로 기록되면 무해한 역사가 된다. 역사학은 예기치 못한 미래의 공포를 드러내지 못하고, 그러는 사이 재난은 서사시가 된다." 역사에 만약이라는 가정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만약의 가정에서 시작된 필립 로스의 <미국을 노린 음모> 는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의 3선이 실패하고 그의 라이벌이었던 찰스 린드버그가 대통령으로 당선될 경우, 한 가족의 삶에 미칠 파장에 관해 그리는 작품이다.

 

/

 

예수 그리스도,

저들이 생각하기에
세상의 모든 것이고
내가 생각하기에
세상의 모든 것을 망쳐버린 존재

 

/

 


WASP (White Anglo-Saxon Protestant, 백인 앵글로-색슨 개신교도) 로 대표되는 미국의 주류 집단은 오랜 세월 반유대주의를 근간으로 유대인들을 박해한다. 작품은 열 살이 채 되지 않은 어린아이 필립 로스의 시선으로 그려지는 작품인데, 유대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공격하는 세상의 '음모' 를 알지 못하던 어린아이가 아버지의 눈물을 비롯한 여러 사건을 거쳐 각성하는 이야기인 셈이다. 기독교도 미국인들의 '조상' 대에서부터 시작된 이러한 박해는 필립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예민> 하게 만드나 아직 어린 필립의 입장에선 부모가 느끼는 분노와 두려움에 대한 까닭을 알 길이 없다. 심지어 자기 자신을 범죄자로 여기는 반유대주의를 내면화하는 와중에도.

 

/

 

이 나라에서
애국심이 분열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자신이 미국인이면서
동시에 다른 어떤 존재라고
말하는 사람은
결코 미국인이 아닙니다

 

/

 


"미국을 지배했고 앞으로도 지배할 난공불락의 북유럽계 및 영구계 신교도들" 은, 그들에 따르면 미국의 독립을 이루었고, 국가를 건설했으며, 황무지를 정복했다. 아메리칸 원주민 진압했고, 흑인 노예 소유하고 해방시켰으며, 변경 지역을 개척하고 정착했다. 농경 생활을 이룩하면서도 도시화를 이루고, 정치와 법을 장악하며, 부의 축적하고 은행을 소유한다. 야구팀과 언어를 소유한다. 이 모든 것을 이룬 '선하고 깨끗하고 부지런한' 수백만의 기독교도의 대표들은 <국가의 이름으로> 애국심을 강요하고, 애국심을 앞세워 로스 집안과 같은 유대인들의 <정체성을 지울 것> 을 강요한다. 그러한 은밀한 폭력이 만연한 사회 속에서 "미국의 에덴동산이자 애국의 낙원" 이었던 워싱턴기념탑은,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 는 게티즈버그 연설문이 새겨진 석판은, 과연 유대인 로스 가족에게도 낙원의 희망을 가져다줄 수 있었을까.

 

/

 

미국을 노린 음모

 

/

 


반유대주의를 기반으로 한 파시즘의 음모.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파시즘이라는 거대 담론 뒤에 존재하는 히스테리, 무지, 악의, 어리석음, 증오, 두려움이 만들어 내는 음모. 로스 가족은 수많은 '히틀러들' 이 만들어 내는 음모 속에서 일상을 파괴당하고 불안과 무력함을 내재화한 이들의 표상이었다.

 

작품 속 파시즘과 싸우기 위해 직접 전쟁터에 참여한 앨빈은 전쟁으로 인해 고통받고 불구가 된다. 국가는 <네 의지> 로 참전하지 않았느냐며 은밀히 가한 이데올로기적 호명을 모른 척하며 그의 고통을 개인의 책임으로 국한시킨다. 즉 "국가는 앨빈을 버린다." 전쟁에서 살아 돌아왔지만, 이제 그는 어린 시절부터 그랬듯 울며 고통을 부르짖어도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닫는다. 그렇기에 더 이상 자신이 아닌 어느 누구의 고통도 짊어지려 하지 않고 끝없이 갈등을 빚어낸다.

 

작가는 작품의 말미에서 앨빈의 고통을 셀든의 아픔으로 확장시킨다. 참전용사 청년의 육체적 고통은 반유대주의적 폭력에 고아가 된 어린아이의 트라우마로 확장된다. 국가적 파시즘을 내재화한 일상 속 미시 파시즘이 어떻게 소수자를 타자화하고 박해하여, "존재 자체로 토막 난 다리가 되게" 만드는지를 보여준다. 그와 동시에 자신의 정체성을 둘러싼 고통을 각성한 어린 로스가 그 토막 난 다리가 된 존재 곁에서 어떻게 '트윈 베드' 를 함께 쓰고, '의족' 이 되며, 그의 아픔에 공감하는지를 보여준다.

 

너무 두꺼워서 언제 다 읽나 싶었는데 생각보다 엄청 재밌고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더 환장하겠네 싶은 작품이었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이걸 읽고 <왜 쓰는가> 를 읽을걸 하는 후회 아닌 후회를 했다. 작품 속 씁쓸한 지점은 (이모인 이블린마저 넘어갔던) 로스 가족과 같은 유대인을 향한 반유대주의적 폭력에 대한 자성이 아이러니하게도 윈첼의 죽음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작품은 "민주국가에서는 시사 문제를 따라잡는 것이 시민의 가장 중요한 의무이며 시민이라면 당대의 뉴스를 최대한 어릴 때부터 알아야 한다" 라고 이야기하는데, 이는 지금까지도 유효한 파시스트들의 음모와 중우정치를 멈추기 위해선 깨어 있는 시민들의 목소리가 필요하다고 역설하는 듯하다.

 

발췌


[...]  린드버그의 미국이 저지른 악의적인 학대로 망가져 버린 아이가 나와 트윈 베드를 나눠 쓰게 되었다. 이번에는 내가 보살펴야 할 토막 난 다리는 없었다. 그 애 자체가 토막 난 다리였고, 나는 그 애의 의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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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 오디세이아 - 광인의 복화술과 텍스트의 오르가슴
안치용 지음 / 르몽드코리아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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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다른 이들은 계속해서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데 나는 고여 있지 않은가 생각하곤 한다. 그럴 때면 우울한 기분을 떨치고자 책을 읽곤 한다. 그중 문학을 통해 이전에 알지 못했던 세상을 만나는 걸 좋아하는데, 특히 세계문학을 통해 인류 보편의 정서나 생각이 무엇인지, '그들도 나와 다르지 않구나' 를 알게 되는 것에서 많은 위안을 얻곤 한다. 

 

책 <세계문학 오디세이아> 는 인간이란 무엇이고 인간 삶에서 사랑이란 어떤 의미인지에서부터 시작하여, 신이란 무엇이고 신과 인간의 관계가 어찌 설정되는지, 신으로부터의 탈피를 감행한 계몽된 인간이 들어선 근대라는 세계는 어떤 세계인지, 그 속에서 주체와 타자 · 존재와 비존재 · 구조와 비구조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되며, 자본주의 · 식민주의 · 실존주의 등과 어떤 연관을 맺고 있는지, 그리고 궁극적으로 다시 '무엇이 인간인지' 를 세계의 다양한 문학 사례들을 통해 보여준다. 

 

사실 처음에는 각장의 소제목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의아했는데, 읽다 보니 시대 흐름에 따라 인류가 몰두했던 화두를 문학적 비유로 상징한 것이었다. 우선 각장을 면면이 살펴보면 초반부는 인류 문명 전반을 강에 비유하는 듯했다. 이 강은 두 존재를 가로지르는 강으로, 한 존재는 반대편 존재인 타자에게 닿기를 갈망하면서도 어쩌면 그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를 사랑하는 자신에게 심취한 것이기에 끝내 닿지 못한다. 그리고 그 (닿지 못한) 사랑은 문학이 되며, 문학이 어떻게 자아를, 자아와 타자의 관계를, 더 나아가 그들을 가로지르는 강물과 같은 세계를 그려내고 내보이는지를 보여준다. 

 

강에서 시작된 자아의 여정은 "혼자만 행복하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 이라 이야기하며, 그를 둘러싼 가장 작은 단위인 가족(씨족) 사회로 눈을 확장시킨다. 그리고 전근대 가부장 사회가 어떻게 유전자를 확장시킨다는 명목으로 여성을 억압하고 착취하였는지를 살핀 후, 여성의 역사에서 자기만의 방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자기만의 방' 을 가진 근대의 개인은 이제 신의 질서로 이루어진 사회의 규범에서 탈피하고자 한다. 책은 신 없는 신성을 탐색하며 고독과 구원을 탐색한 카프카의 작품을 탐색하며, 근대성이란 무엇이며 그 근대성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고통과 불안을 이야기한다. 이후 작품은 신으로부터 탈피한 개인이 어떻게 자신을 인식하고 인간 존엄에 다다를지, 그 속에서 마주한 세계의 부조리함은 무엇인지를 탐색한다. 

 

근대 세계에 던져진 개인은 결코 행복하지만은 않다. 신(아버지)의 질서로부터 벗어난 그는 이제 자신과 타인을 욕망하는 걸 넘어서 타인(이데올로기)의 욕망 자체를 욕망하는 걸 내재화한다. 자본주의로 대표되는 이데올로기는 개인을 욕망의 소용돌이로 던져버리나, 그 속에서 개인을 지워 물화시켜 버리고, 궁극적으로는 개인의 자기소외를 야기한다. 이런 와중에 국가라는 이름의 거대 괴물은 개인을 억압하고 규율화하기 시작하고, 리바이어던과 같은 국가 권력을 내재화한 계몽된 개인은 또 다른 이를 계몽시킨다는 명목으로 자신들의 소실점에 있는 질서를 타자에게 강제한다. 

 

 

광인의 복화술과 텍스트의 오르가슴,

그것은 근대성의 폭력 하에
이데올로기의 욕망을 욕망하다
찢어진 '광인狂人' 과
그를 위한 저항의 도구로서의
텍스트인 문학의 관계

 

 

이 책은 제목부터 <세계문학 오디세이아> 인 만큼 다양한 문학을 레퍼런스로 하나 읽지 않은 작품들도 있어 모르는 작품이 언급될 때마다 구글링 하여 내용을 살펴보곤 했다. 언제고 읽어봐야지라는 다짐과 함께.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질문은 "‘인간이란 무엇인가’ 대 ‘무엇이 인간인가’" 였다. 만물의 척도를 인간으로 두는 인간중심사상에서 비롯된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근대의 흐름 속에서 <무엇이 인간인가> 라는 질문으로 바뀌어가는 게 흥미로웠다. AI가 도래하여 기존의 인간다움을 결정하던 정의들이 무용해진 시대, ‘이미’ 와 ‘아직’ 사이의 실존 속에서 인류는 무엇을 채워야 하고, 그 속에서 문학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내 인생의 소실점에 무엇을 두고, 그 소실점으로 말미암아 외면해 온 것들이 있지 않은지, 이미 이루어낸 것들 속에서 아직은 요원하나 그럼에도 인간으로서의 삶 속에서 이루어야 하는 것들은 무엇인지 다시 한번 문학을 통해 되새겨볼 수 있지 않을까. 

 

르몽드코리아로부터 제공받은 도서에 대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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