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수용소에서 (양장) - 빅터 프랭클의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 청아출판사 / 2005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너는 네 자신의 삶에 적극적이냐, 아니면 소극적이냐?”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기 전, 누군가로부터 이런 질문을 받았다면, 나는 어떻게 대답했을까? 아마도 잠시 뜸을 들인 후, “적극적으로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라는 대답을 했을 것이다.

적극적인 삶. ‘긍정적이고 능동적인 태도의 삶’을 떠올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현재의 삶에 ‘이만하면 됐지’라며 하루하루를 의미 없이 흘려보내고 있을지라도, 나는 내 삶을 통해 무언가를 이루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말을 들려주고 싶었을 테니까.

그런데 2차 세계대전 당시 유태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아우슈비츠, 다카우 등 네 곳의 강제수용소에 옮겨 가며 갇혀 지내야 했던 정신과 전문의 빅터 프랭클이라면 어떤 대답을 했을까? 본인의 의지는 아닐지라도 어쩔 수 없이 소극적인, 말 그대로 스스로 그 무엇도 이룰 수 없는 비활동적인 그리고 피동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답했을까?

적극적인 삶은 인간에게 창조적인 일을 통해 가치를 실현할 기회를 주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반면에 즐거움을 추구하는 소극적인 삶은 인간에게 아름다움과 예술, 혹은 자연을 체험함으로써 충족감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러나 창조와 즐거움 두 가지가 거의 메말라 있는 삶에도, 외부적인 힘에 의해 오로지 존재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 있는 지고의 도덕성을 요구하는 삶에도 목적은 있다. 물론 그에게는 창조적인 삶과 향락적인 삶도 모두 금지되어 있다. 그러나 창조와 즐거움만이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곳에 삶의 의미가 있다면, 그것은 시련이 주는 의미일 것이다. 시련은 운명과 죽음처럼 우리 삶의 빼놓을 수 없는 한 부분이다. 시련과 죽음 없이 인간의 삶은 완성될 수 없다.

: 죽음의 수용소에서, 122쪽, 빅터 프랭클, 청아출판사, 2007. 12. 30. (초판3쇄)   

죽음조차 무덤덤해져버리는 비정상적인 상황, 이에 따른 심리적 반응으로 1단계 충격, 2단계 무감각, 3단계 자유를 거치는 극한의 환경 속에서도 아름다움과 예술, 유머와 행복을 찾아내며, 삶의 가능한 의미를 찾아 버텨 가는 그의 3년.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읽은 나는, 이제 삶에 대한 태도가 적극적인지 소극적인지를 묻는다는 것은 삶의 진정한 핵심에서 벗어난 질문임을 깨닫는다. 글쓴이의 말처럼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라는 사실 (138쪽)’을 배웠기 때문이다.

삶이 우리에게 언젠가는 무언가를 건네줄 것이라는 기대로 긍정적인 하루를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그 무언가가 무엇인지를 스스로 고민하고 찾는 태도에 있다. 다시 말하자면, 삶의 핵심은 자신만의 삶의 목적을 스스로 찾는데 있는 것이다.

이제 삶에 대해서라면 누군가 나에게, 아니 내가 내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봐야 할 것이다.  

“너는 네 삶의 의미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내가 살다 간 덕분에 단 한 사람의 삶이라도 더 풍요로워 질 수 있는 삶을 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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