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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평점 :
지난 십여 년간 나를 사로잡고 있었던 낱말은 ‘갈망渴望’이었다. 「촐라체」와 「고산자」, 그리고 이 소설 「은교」를, 나는 혼잣말로 ‘갈망의 삼부작三部作’이라 부른다. 「촐라체」에서는 히말라야를 배경으로 인간 의지의 수직적 한계를, 「고산자」에서는 역사적 시간을 통한 꿈의 수평적인 정한情恨을, 그리고 「은교」에 이르러, 비로소 실존의 현실로 돌아와 존재의 내밀한 욕망과 그 근원을 감히 탐험하고 기록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밤에만’ 쓴 소설이니, 독자들도 ‘밤에만’ 읽기를 바라고 있다.
: 은교, 작가의 말(406쪽), 박범신, 문학동네, 2010. 4.
글쓴이는 '밤에만' 읽기를 바랐다. 그의 바람대로 나는 어제 밤 끄트머리에서 ‘은교’와 헤어졌다. 그녀는 ‘열대엿 살이나 됐을까. 명털이 뽀시시한 소녀였다. 턱 언저리부터 허리께까지, 하오의 햇빛을 받고 있는 상반신은 하얬다. 쇠별꽃처럼(22쪽)’.
갈망渴望... 욕망慾望... 실토實吐...
그렇다. 예순 다섯의 박범신. 그는 열일곱의 소녀, 은교를 범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시간으로 이성보단 감성이 지배하는 밤을 택했던 것이다.
갈망渴望... 아니, 욕망慾望... 어쩌면, 욕정欲情...
그걸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이 과연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사람이기에, 어떤 이는 이를 억누르고, 어떤 이는 이를 터뜨리며, 어떤 이는 이를 덧씌운다. 우리는 그 있고 없음이 아닌, 그 보여지는 방식에 따라 그 사람의 성품, 사람됨을 짚어보곤 했던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는 자신의 존재 속에 숨겨진 욕망을 찾겠다고 한다.
미켈란젤로는 조각상이 처음부터 돌 속에 있었다고 했다. 단지 그는 깨뜨려 나갈 뿐이었다고. 그러나 나는 그 말에 동의할 수 없다. 미켈란젤로의 욕망은 돌 속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돌을 깨뜨리는 한 순간 한 순간이 아니었을까. 박범신, 그는 ‘내밀한 욕망과 그 근원을 감히 탐험하고’라고 썼다. 나는 또한 그 말에 동의할 수 없다. 욕망은 그의 마음 속에 숨어 있었던 것이 아니고, 그것을 기록해내는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글 속에 묻어나는 욕망의 파편들.. 그는 이제 솔직하게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대한민국문학상(1987), 원광문학상(1998), 김동리문학상(2001), 만해문학상(2003)에 빛나는 소설가 박범신. 그는 이제 솔직하게 적고 싶었는지 모른다. 고결한 시인과 멍청한 소설가, 가녀린 여고생은 그래서 필요했을는지 모른다. 겉으론 존재 속 숨겨진 욕망을 찾겠다 했으나, 어쩌면 자신의 지난 세월을 되짚어 억눌렀던 욕정을 숨김없이 소설 속에 낱낱이 그대로 기록해 낸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결국 변명이 필요했다. 정신적 사랑만으로 만족하며 스스로를 죽이는 칠순의 시인과 육체적 사랑과 정신적 사랑 사이에서 고뇌하다 스스로를 죽이는 사십에 가까운 소설가는 변명이 아니고 그 무엇이었던가?
박범신. 그는 사실 솔직했다.
그러나 변명이 뒤따라야 하는 솔직함이었다...
그가 진정 욕정欲情을 실토實吐하고 싶어 포르노그래피를 택했어도...
나는 당당히 '낮에' 눈물 흘렸을 것이다...
※ 저보다 훨씬 균형잡힌 시각을 가지고 계신 들꽃 님, 개츠비 님, 키스 님의 「은교」에 대한 서평을 권해드립니다.
▶ 가면을 벗는 방법을 보여준 소설, 은교 - 들꽃 님 블로그
▶ 익숙한 욕망에 면죄부를 주는 소설, 은교 - 개츠비 님 블로그
▶ 인간의 누추함을 솔직히 펼쳐놓은 소설, 은교 - 키스 님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