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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Q84 2 - 7月-9月 ㅣ 1Q8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양윤옥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9월
평점 :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실증 가능한 진실 따위는 원하지 않아. 진실이란 대개의 경우, 자네가 말했듯이 강한 아픔이 따르는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인간은 아픔이 따르는 진실 따윈 원치 않지.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건 자신의 존재를 조금이라도 의미있게 느끼게 해주는 아름답고 기분 좋은 이야기야. 그러니 종교가 성립되는 거지.”
남자는 몇 차례 목을 돌려본 뒤에 이야기를 계속했다.
“A라는 설이 그 남자 그 여자의 존재를 좀 더 의미 있는 것으로 보이게 해준다면 A는 그들에게 진실인 거고, B라는 설이 그 남자 그 여자의 존재를 힘없고 왜소한 것으로 보여주는 것이라면 그건 가짜가 돼. 아주 확실하지. 만일 B라는 설이 진실이라고 주장하는 자가 있다면, 사람들은 아마도 그 인물을 증오하고 묵살하고 어떤 경우에는 공격까지 할 게야. 논리가 정연하다든가 실증 가능하다든가, 그런 건 그들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어. 많은 사람들은 자신이 힘없고 왜소한 존재라는 이미지를 부정하고 배제함으로써 가까스로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지.” (2권, 276쪽)
진실이 대개 강한 아픔이 따른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하는 말일까요? 수많은 사람들이 이제껏 쉼없이 이야기해 온 사랑과 희망은 도대체 무엇인가요? 저는 인간의 존재를 조금이라도 의미있게 느끼게 해주는 아름답고 기분 좋은 이야기가 바로 진실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인간의 존재를 힘없고 왜소한 것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예 필요하지 않다는 건 아닙니다. 그것으로부터 비로소 굳건한 사랑과 희망이 싹 트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결국 인간이 선을 지향하고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온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글쓴이인 무라카미 하루키 역시 이를 모르고 있진 않습니다. 「다양한 예술, 다양한 희구, 그리고 또한 다양한 행동과 탐색은 선을 지향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일이 지향하는 바를 통해 선이라는 것을 올바르게 규정할 수 있다. (1권, 367쪽)」라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을 빌어 말하기도 하거든요.
다시 돌아가, 많은 사람들이 자신이 힘없고 왜소한 존재라는 이미지를 부정하고 배제함으로써 가까스로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일부러 인간이 힘없고 왜소한 존재라는 이미지를 강조함으로써 인간과 세상에 대한 보다 폭넓은 이해와 발전을 촉구합니다.
세상에는 선과 악이 있듯이 진실과 가짜도 있습니다. 하지만 선과 악의 판단이, 진실과 가짜의 구별이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이리저리 움직이는 선과 악에 대해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지. 어느 한쪽으로 지나치게 기울면 현실적인 모럴을 유지하기가 어렵게 돼. 그래, 균형 그 자체가 선인 게야. (2권, 289쪽)”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치우치지 않은 선과 악의 균형이며, 인간에 대한 믿음입니다. 인간은 역사를 통해 증명해왔듯, 선과 악의 폭을 쉼없이 넓혀 왔지만, 결국은 선과 악의 균형, 즉 선을 지향해 온 것입니다.
지금까지 둘러본 진실과 가짜, 선과 악 이외에도 무라카미 하루키가 『1Q84』에서 보여주고 싶어 하는 것은 많고도 많습니다. 1984년이 아닌 1q84년에서 평행을 달리는 덴고와 아오마메의 사랑이 그렇고, 영혼을 둘로 나눈 아름다운 후카에리의 성장이 그렇습니다. 달이 두 개인 세상에서 리틀 피플이 만들어 낸 공기번데기의 숨은 뜻이 그렇고, 등장인물들 간에 서로 맺고 이어진 끊임없는 인연도 그렇겠지요.
하지만 지나쳐 온 수많은 풍경에 비해, 독자를 위한 친절한 설명은 좀 부족하지 않았나 생각이 드네요. 3권을 기다려봐야 할까요? 만약 책 속에 여러 번 등장했던 「설명을 안 해주면 그걸 모른다는 건, 말하자면 아무리 설명해줘도 모른다는 거야」라는 글귀처럼 끝내 설명해 주지 않을 거라면 큰일입니다. 한껏 속도를 내서 그저 따라가는데도 온 정신을 쏟게 만들어 놓고, 그동안 많은 걸 봤지 않느냐 해버리면 무척 당황스럽거든요.
앞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할 거라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최신작『1Q84』. 돌이켜보면 1200쪽이 넘어가는 덩치에도 불구하고 엄청났던 빠르기와 스쳐 간 풍경의 다채로움에 다시 한 번 대단함을 느낍니다. 하지만, 어디로 가는지조차 잊어버리고 멍하게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던 제 모습에 문득 정신 차립니다. 『상실의 시대』로 유명한 일본작가 무라카미 하루키. 그가 우리에게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이었을까요? 혹시 그 역시도 다양한 예술, 다양한 희구, 그리고 또한 다양한 행동과 탐색을 우리에게 보여줌으로써 보다 크고, 넓고, 깊은 선과 악의 균형을 남기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