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스름 나라에서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지음, 마리트 퇴른크비스트 그림, 김라합 옮김 / 창비 / 202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모든 어린이가 최소한 한 명의 어른과 바람직한 정서적 유대를 가져야만 안전함을 느낄 수 있고, 그렇지 못하면 삶을 견디기 어려울 거라고 나는 믿습니다."

- <우리가 이토록 작고 외롭지 않다면>,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그래서였을까. 다리가 불편한 예란의 옆에 백합줄기 아저씨가 있었던 것은. 

<어스름 나라에서>는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생각이 그대로 묻어난 그림책이다. 

원래는 그의 단편동화였던 작품이 마리트 퇴른크비스트의 그림을 얹어 그림책으로 출간되었고 어스름한 저녁에 <어스름 나라에서>를 읽고 있다.


표지에 그려진 예란과 백합줄기 아저씨가 클라라 교회 첨탑을 날아가고 있는 장면은 어스름한 색감과 잘 어우러져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들은 어디로 날아가는 것일까. 표정이 즐거워 보이는 것을 보니 그곳이 어디든 따라가고 싶어진다. 


표지만 한참을 바라봐도 좋을 수가 있다니. 리사 아이사토의 <삶의 모든 색>을 처음 봤을 때도 표지만 한참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말이다. 책 내용을 살펴보기 전에 표지만 보고 나름대로 이야기를 그려보는 것도 그림책을 보는 나만의 즐거운 방법이다. 


예란과 백합줄기 아저씨가 날아가는 모습에서 마르크 샤갈의 대표작 <도시 위에서>가 떠오른다. 샤갈이 결혼 직후에 그린 그림으로 알려져 있는 <도시 위에서>는 자신과 아내 벨라를 공중에 떠나니는 모습으로 표현해 행복한 그의 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들의 아래 보여지는 마을은 샤갈의 고향인 비테프스크다. 


샤갈이 그의 고향인 비테프스크를 떠올리며 마음의 안정을 얻었듯이, 예란은 어스름 나라를 다녀오며 자신의 삶을 살아갈 힘을 얻는다. 중요한 것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이 말했듯 정서적 유대감을 형성하는 한 명의 사람이 곁에 있었다는 점이다.

예란에게는 백합줄기 아저씨가, 샤갈에게는 그의 아내 벨라가 있었듯이.


그림책에 나오는 클라라 교회와 크로노베리 공원이 궁금해 찾아봤는데 물리적인 거리는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는 걸로 나온다. 하늘을 날아서 갔으니 그 정도 거리가 무엇이 문제이랴. 


표지를 넘기면 나오는 첫 장면은 침대에 앉아있는 예란의 모습이다. 예란은 침대에 앉아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다리를 다치기 전의 모습을 그려보고 있을까. 신나게 뛰어놀고 싶지만 그러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실망하고 있을까. 


"아무래도 예란은 다시는 못 걷게 될 것 같아요."라고 아빠에게 말하는 엄마의 말을 들었을 때의 기분이 첫 장면 그림에서 보여지는 것 같다. 희망이 보이지 않고 절망스러울 때, 땅거미가 지는 어스름한 순간 백합줄기 아저씨가 나타난다.


어스름은 조금 어둑한 상태, 또는 그런 때를 나타내는 단어다. 프랑스에서 말하는 '개와 늑대의 시간' 말이다. 해질 무렵이면 저 너머에서 다가오는 그림자가 개인지 늑대인지 구분이 안되는 시간, 하지만 예란에게는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존 버닝햄의 그림책 <알도>에서처럼, 견디기 힘들 때 우리는 상상 친구를 불러낸다. 그렇지 않으면 현실을 견딜 수가 없기에. 모리스 샌닥의 <괴물들이 사는 나라>에서는 아이가 만들어낸 상상의 공간인 '괴물들이 사는 나라'에 다녀오며 조금씩 성장하는 모습을 보인다.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공간과 그런 자신을 지지해주고 그저 말을 들어주는 친구의 존재가 <어스름 나라에서>에 잘 그려져 있다. 


백합줄기 아저씨는 예란이 못할 것 같다고 말을 하면 항상 이렇게 말해준다.

"괜찮아. 어스름 나라에서 그런 건 문제가 되지 않아."


'괜찮아'라는 말이 예란에게는 얼마나 큰 힘이 되었을까. 어떤 상황에서도 '괜찮다'고 해 줄 수 있는 어른이 되어야겠다는 다짐도 해본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어린이들을 만나면서 나는 백합줄기같은 존재였는지 되돌아본다. 아마 많은 경우에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어스름 나라에서>를 만나서 다행이다. 


첫 장면의 그림과는 다르게 마지막 장면에서는 침대에 앉아있는 예란의 얼굴 위로 환한 빛이 내려앉는다. 그 모습에 나도 기분이 좋아진다. 


오늘 밤 나도 어스름 나라에 가볼 수 있을까. 기회가 된다면 나도 예란과 백합줄기 아저씨의 손을 잡고 어스름 나라에 다녀오고 싶다. 그럴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