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 속의 덴마크 - 오해와 과장으로 뒤섞인 ‘행복 사회’의 진짜 모습
에밀 라우센.이세아 지음 / 틈새책방 / 2018년 6월
평점 :
절판


인문학 카페 한주한책 서평단의 홍석천입니다.

 

지난해(2017)...

즐겨봤던 한 드라마에서의 주인공이 '덴마크'로의 이민을 꿈꾸며 '덴.마.크'를 연신 외쳐대는 것부터 시작해 뉴스에서도 '덴마크'가 화제가 되었던 순간을 기억하며 펼쳐든 '상상 속의 덴마크'

 

"오해와 과장으로 뒤섞인 '행복 사회'의 진짜 모습"을 한국이라는 이방국에서 10년을 넘게 살아온 덴마크인이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소개해준다는 소개에 언뜻 작년의 기억을 떠올리며 무척이나 관심있게 읽었다. 읽는 내내 내가 27년을 살면서 느낀 한국 사회와의 비교가 자연스럽게 되면서...

 

덴마크에서는...

 

"덴마크에서는 (이처럼) 다 함께 노래를 부르는 문화가 있다. 특별한 날 가족들이 모였을 때, 친구들이 모였을 때 미리 준비한 가사를 보며 함께 노래를 한다. 어린아이부터 어르신까지 세대를 불문하고 함께 알고 있는 노래가 많다. 이 노래들은 대개 덴마크의 구전 노래, 찬송가, 혹은 포크송이다."

 

"우리가 노래를 처음 배우는 곳은 가정이다. 아주 어릴 적, 발음이 정확하지 않을 때부터 가족들이 부르는 노래를 따라 부른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노래를 부른다. 생일 파티, 결혼기념일 파티, 장례식 등 가족이 모이는 공식 자리뿐만 아니라 식사 후나 쉬는 시간에도 함께 노래를 부른다."

 

"다 함께 부르는 노래는 개인 간의 간격을 좁히고 세대 간의 차이를 뛰어넘는다. 가족들은 다 함께 노래를 부르며 하나됨을 느낀다."

 

"휘게(hygge)는 그저 여유로운 일상, 안락한 환경에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게 아니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휘게를 '선택'하는 것이다. (…) 할 일은 많지만 복잡한 생각은 잠시 접어두고 나, 그리고 가족에 집중하는 시간을 보낸다. '지금'이라는 시간을 나와 가족을 위해 선택하는 것이다."

 

"휘게는 선택이지만, 어려운 선택이다. 할 일과 역할들이 뒤엉켜 있더라도 잠시 휘게를 선택한다."

 

"휘게란 기쁠 때는 기뻐하지만, 슬플 때는 슬퍼한다. 내 감정을 늘 염두에 두면서 솔직해져야 비로소 휘게할 수 있다. 스스로에게 '나 지금 괜찮지 않아. 힘들어'라고 솔직히 말할 수 있다면, 그리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누군가가 곁에 있다면 휘게할 수 있다."

 

"덴마크 사람들은 '사랑'이라는 단어가 매우 '크고 무거운' 단어라고 생각한다. 너무 쉽게 이 말을 입 밖으로 꺼내면 진짜 사랑하는 마음이 잘 전달되지 않을까봐 걱정한다. 그 대신 행동으로 표현한다. 가족과 함께 보내는 휘게 시간을 소중히 하고 서로를 존중하는 가운데, 마음에서 마음으로 사랑이 전해지도록 노력한다. 이제껏 나는 우리 부모님의 사랑을 충분히 느껴왔지만 한번도 말로 표현하지 않았다.아니 말로 드러낼 필요를 못 느꼈다고나 할까."

 

"덴마크 사람들은 일을 할 때 공동체를 생각하기도 한다. 여기서 공동체란 자신이 일하고 있는, 또는 살고 있는 동네이며, 크게 보면 덴마크 사회 전체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우리 동네를 더 좋게 만들고 있으며, 나아가 덴마크를 더 좋은 사회로 만들고 있다는 확신을 가진다. 그리고 그 생각이 덴마크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든다. 주변 한국인들에게 이 이야기를 전하면 믿지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이지만, 실제로 그렇다."

 

"내가 있는 자리에서 더 많은 사람들을 존중해야 해. 내 직업 때문에 다른 대접을 받는 것은 옳지 않아. 원하지 않은 대우를 받는다면 굉장히 불편할 거야."

 

"덴마크 사람들은 (이처럼) 여가 시간이 많은 편디지만 남는 시간을 무료하게 보내지 않고 지역 사회와 자기 자신의 행복을 위해 열심히 활동한다. 그것이 봉사 활동이든 클럽 활동이든."

 

이외에도 덴마크인, 덴마크 사회·문화에 대해 많은 이야깃거리들로 소개를 해주고 있어서 비록 책으로 읽는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적잖은 충격과 놀라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서문에서부터 저자가 밝힌대로 "덴마크는 '지상 낙원'이 아니고, 그렇다고 배울 점이 '전혀 없는' 나라도 아님을 간접적으로나마 실감할 수 있었다.

정리하자면, 덴마크든, 타 유럽국가든 간에 세계 이방(異邦)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곧 '오해와 과장'이라는 가면을 벗어던지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는 너무나도 당연하고도 뻔한 진리를 항상 삶의 순간순간마다 새기고 실천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이해하고 나서의 행동원칙은 바로 내 삶속에서 작게나마 적용해볼 수 있는 좋은 것들이 있으면 거리낌 없이 수용해야겠다는 사실...!!!

 

이러한 다짐 아래 지금 이 순간부터 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해 이것부터 실천해보려 한다.

 

 '휘게, 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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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안끝났다 2018-07-05 1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스로에게 ‘나 지금 괜찮지 않아. 힘들어‘라고 솔직히 말하기‘

음... 인상 깊습니다.

요즈음 자기 위로형 에세이 혹은 인문학 도서가 꽤 많이 나오고 많이들 팔리던데 그런 데서는 대체로 ‘나, 지금 이대로 괜찮아‘라는 식으로 말을 하더군요. 그런점에서 오히려 거꾸로 ‘괜찮지 않다‘고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데서 ‘휘게‘할 수 있다는 생각이 인상적입니다.
 
어머니와 나
김성우 지음 / 쇤하이트 / 2018년 4월
평점 :
품절


※인문학 카페 한주한책 서평단의 홍석천입니다.


기록과 성찰이란...
기록과 성찰의 경험 속에서 소중한 깨달음 또한 얻었으니, 
일상을 나누는 이들에게는 특권과 책무가 동시에 주어진다는 것이다.
서로의 생을 목격할 수 있는 특권, 그리고 그렇게 한 삶이 
차곡차곡 쌓여 자신의 일부가 되었음을 망각하지 않을 책무,
부모라서 또 자식이라서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고 또 죽어 가는 모든 이들에게 주어진 공존의 선물이자 의무 말이다.

기록학이라는 학문에 임하면서부터 '기록', '錄', 'Record'의 가치를 매순간 자각하며 지내왔지만... 정작 실천으로 옮기질 못했다. 

'왜 써야하지?', '내가 지금(현재)를 기록함으로써 내게 주어지는 게 뭐지?'

하는 생각이 아직도 내 머릿속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던 걸까...

그러다가 이 책을 펼치자마자 마주한 이 글을 보고 선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듯 했다.

기록이 곧 성찰의 경험이 되고, 일상을 공유하는 이들에 대해 '특권'과 '책무'가 주어진다는 것...

정말 지금의 내 사고로는 전혀 생각하지 못할 신선한 생각이었다.

그리고 더불어서 어머니와 함께한 나날에 대해 기록했다는 것 또한 신선하게 느껴졌다. 


어머니의 인생 수업... 내 어머니에게선...?!

"그래서 어떤 부모가 아이를 잘 키우는 거예요?" 
어머니는 주저 없이 담담하고도 단호히 말씀하셨다. 
"자기가 아이한테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지."
'무엇'은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상대와의 관계 속에서 그 의미를 드러낼 뿐.
'무엇' 하나만 가지고 좋은 일이라고 착각하지 말아야겠다.

별을 따려 하는 손보다 별빛 담은 눈이 아름답다. 
움켜진 두 손이 아니라 수십 억의 반짝이는 눈을 기억하리. 
소유하지 않고 그대로 두기. 오래오래 배워야 할 일이다.

뭔가 배울 때는 마음을 깨끗이 비우고 싶은데 쉽지가 않다. 

좀 안다는 마음에 이것저것 토를 달기도 한다.

정작 배워야 할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었던 것에 집중하는 우를 범한다.

오늘 읽어낼 책에서, 만날 이들에게서, 
쉼 없이 흘러갈 하늘과 시간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배움에 있어서만큼은 '어리숙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전에 무엇을 했건, 어떤 명성과 부를 쌓았건 
오늘 나의 삶을 가꾸고 돌보는 일이 소중하다.
과거의 나로 지금의 나를 규정하지 않기. 
'잘나갔던 나'를 소환하지 않고, '비참했던 나'를 멸시하지 않으며, 
순간순간 오롯이 세계와 대면하는 일. 그것이 공의일지 모른다.

​그렇다. '정체(正體, identity)'는 '정체(停滯, stagnation)'와 전혀 다르다. 

벽을 넘을 수 있을지는 모른다. 
절망이 생명을 밀어내지 못하도록 붙잡은 손 놓지 않을 뿐. 
그렇게 수많은 손들이 세상을 덮을 때 벽은 담이 아니라 대로일 터이니.

내가 남에게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 정확하게 아는 것, 너무 많은 걸 가지려 하지 않고 때로는 그대로 두며 절제할 줄 아는 것, 끝없는 배움 앞에서 어리숙함을 유지하는 것, '어제'에 집착말고, '오늘'과 '내일'에 충실하는 것, 상대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배려'할 줄 아는 것...

하나같이 다 내 어머니가 내게 전하는 진심어린 충고로 들리는 신기함....

유사이래 '어머니'로 살아오신 분들의 마음이란 다 이와 같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어머니와 나, 나와 어머니는...?! 

"쌍놈은 나이가 감투야."

기억은 언제나 사람들 사이에, 물건과 장소와 시간 곳곳에 분산되어 있고, 

나만의 기억에 더 특별한 지위를 부여할 이유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함께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멤버들이 다시 모이는 것(re-member)이자 기억의 조각들을 다시 모으는 것(re-collect)이다.

사소한 다툼에 마음이 어두워지는 건 우리 마음 속 전등이 나갔기 때문이겠지. 
함께한 날들을, 서로의 삶을 목격해 왔다는 사실은 그대로잖아. 
그러니 주저 말고 등을 달자. 다시 마음을 밝히자. 서로의 얼굴을 잊기 전에. 
너무 늦어 버리기 전에. 가끔은 나 자신도 이렇게 토악여 줘야겠다.
"그동안 너한테 너무 가혹했다. 미안하다. 좀 더 잘할게."

많은 걸 잊고 산다. 시냇물 건너지 않아도, 문지방 넘지 않아도, 
냉장고 문 닫는 소리에도 기억이 우수수 떨어질 때가 있지 않은가.
환히 웃었던 순간들을 특히 잘 잊히는 듯하다. 
힘들게 했던 사람들은 똑똑히 기억하면서 말이다. 
소위 머피의 법칙은 선별적 기억의 산물일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한 주, 아팠던 날들을 불러내기보다는 날 웃게 해 준 이들을 떠올리기를, 
나도 누군가에게 웃음을 줄 수 있기를 빈다.

우린 모두 서로의 일상을 통해 세상을 읽는 법을 배우고 있다.

진리를 놓은 채 하루하루가 헛되고 헛되다는 탄식만 쌓아 가고 있지는 않은가. 
'헛되고 헛되니 헛되고 헛되도다'에서 '헛되다'의 개수를 줄이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오늘 내게 주어진 묵직한 숙제다.

마음을 깊게 가져야 깊은 사랑을 받을 수 있다.

'어머니와 나', '나와 어머니'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무엇을 함께 하며 살아왔는가.

내 어머니는 어떤 분이신가. 내 어머니는 나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셨는가.

나는 내 어머니의 가르침을 잘 따랐는가.

또 다시 찾아온 자문자답의 순간...

누군가에게 웃음이 아닌 울음을 주며, 어둠 속에서 얕은 마음으로 살아온 

'쌍놈' 아닌 '쌍놈' 같은 나로 살아온건 아닌가...?

어제오늘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작디 작은 '나'

인간이 작디 작다는 사실을 망각한 이들은 자신을 크다 여긴다.
작은 것들을 멸시한다. 한껏 치켜든 턱, 너희들은 왜 더 커지지 못하느냐며 깔본다.
자꾸만 더 많은 것들을 먹어 치운다. 하지만 그들도 무작정 커질 수는 없다. 
때로는 거대한 산이 되려는 야망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자기 안으로 내려앉기도 한다.
각자가 작은 존재임을 인정할 때 삶은 커진다. 서로 크다 우기는 사회에서 삶은 초라하고 비루하다.
우리는 그다지 대단할 것 없는, 본디 작은 존재일 뿐이다.
그래도 괜찮고, 그래서 괜찮다.

지나온 시간, 우리는 누구와 어떤 방식의 삶을 살아왔는가? 

우리 앞에 남은 시간, 어떤 이들과 함께 인생길을 걸어갈 것인가?

 모든 걸 다 말할 수는 없다. 할 말만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는 말을 고르는 일이요, 둘째는 말을 버리는 일이다. 
이 둘은 사실 동전의 양면이다. 
특정한 말을 고른다 함은 다른 말을 버린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역설이 있다. 텍스트는 쓰여진 증거임과 동시에 지워진 흔적이라는 것.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 사이에는 태어났다 이내 사라진 수많은 말들이 존재한다.
사람도 그렇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인간은 지나온 삶의 증거이자 살 수 없었던 생의 흔적이다.

세상 모든 글의 배후에는 보이지 않는 인연들이 있다. 

온전히 개인적인 글은 존재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힘이 빠지진 않는다. 

나의 생각이 복잡다단한 관계들과 얽혀 있다는 사실은 

'내 것 하나 없는 존재의 왜소함'이 아니라 

'거대한 물줄기로 같이 흘러가는 숭엄함'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함께 흘러갈 수 있음에 감사한다.

광대한 시공간을 점하는 수많은 일과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일. 

인생이란 이 둘 사이의 관계 맺기에 다름 아닐지도 모른다.

기다린다는 건 가던 길을 멈추는 것. 오던 길을 되돌아가는 것. 
결국 기다림은 함께하는 것. 문득 기다리지 못했던 날들, 달아나던 날들이 스쳐갔다.

비록 한 글자이지만 '~와'는 모든 것을 연결한다.
나와 일, 나와 글, 나와 삶 그리고 나와 너. '~와'가 있음으로 세계와 세계가 만난다.
하나의 건물 내부가 아닌 건물들 사이의 틈으로 더 넓은 세상이 펼쳐지듯 
당신 혹은 내가 아니라 우리 사이에서 또 다른 우주가 생성된다.
정말 이제는...
점과 점이 만나고, 선과 선으로 이어지는 세상에서 서로 함께 흘러갈 수 있음에 감사하며,
각자 지나온 생의 흔적을 존중하고, 때로는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와' 함께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더 확장해 나가는 삶... 
그런 삶을 사는 '작디작은 나' 가 되는 것이 
바로 나 자신에게 있어서나 이 세상을 위해서나 
바람직한 길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 같다.
아니, '결.코..!!' 잊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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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주지 않는 대화 - 갈등을 해결하고 관계를 회복하는 비폭력대화의 기술
마셜 B. 로젠버그 & 가브리엘레 자일스 지음, 강영옥 옮김 / 파우제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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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감정을...

감정이 아름다운 이유는 감정에는 거짓이 없고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내 안에 무엇이 살아 있는가?

무엇이 내 삶을 충만하게 하는가?

 

어릴때부터 지금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내가 스스로 생각하기에 지나칠 정도로 감정적인 사람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속깊은 감정에서 우러난 게 아니었다. 그냥 단순히 순간순간마다 머릿속을 스치는 일시적이고 얕은 감정분출에 지나지 않았던 것 같다.

바로 이 두 가지 질문을 마주하고 나서부터....

27년을 살아오면서 나는 내게 이러한 질문을 단 한 순간도 한 적이 없었기에.....

 

그래서 감정도, 그 안에 담긴 욕구와 진심도 아무 것도 몰랐다.

 

자신이 느끼는 분노 뒤에 숨겨진 욕구를 찾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한층 더 강렬한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분노가 아니라 자기 자신 안의 원초적인 감정을 만나게 되는 겁니다. 감정의 본래 기능은 생존을 위한 것이고 욕구를 충족할 수 있도록 보듬어 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슬픔, 절망, 무기력, 상처 혹은 두려움과 같은 감정들을 그대로 내뱉는 행위가 실제로 도움이 됩니다. 그저 자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자신이 느끼는 감정 그대로 소리를 질러보십시오. 이러한 감정들은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지만 파괴적이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감정들은 고통스럽지만 마음에 훨력을 불어넣어 주는 영양가 있는 고통이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분노의 감정은 우리에게 채워지지 않는 욕구의 표현입니다.

 

하지만 이 책을 통해서 감정과 욕구에 대해, 그리고 과정의 언어와 정적인 언어에 대해 알게 되는 순간 반성부터 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리의 삶은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 속에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마음 속에 무엇이 살아 있는지, 혹은 과거의 특정한 순간 무엇이 살아 있었는지를 말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과정의 언어는 이렇게 모든 순간이 끊임없는 변화의 과정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며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과 다른 사람에 대한 평가는 항상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정적인 언어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사고는 옳은 것과 그른 것, 정상적인 것과 비정상적인 것으로만 이루어집니다. 이러한 사고의 저변에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고 있다는 권위주의가 짙게 깔려 있습니다. 이러한 언어문화에서는 사람들의 권위주의적 체제에 살아가도록 아주 어린 시절부터 뇌 구조를 적응시켜 놓습니다.

 

사람들이 사고하는 방식과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 사이에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고방식을 통해 나온 언어가 결국 그 언어의 감정을 낳기 때문입니다.

 

우리 스스로가 누군가를 규정하고 판단하는 정적인 언어를 쓰고 있지는 않은지, 또 이 언어에 너무 익숙해져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나 스스로가 '누군가를 규정하고 판단하는 정적인 언어'를 쓰고 있지는 않은지에 대해 지난 삶을 되돌아보고 반성하지 않는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욕구'란...

제가 이해하는 욕구란 '삶을 털어놓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욕구를 아름답고 소중한 것으로 인식하는 관점을 배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욕구와 부탁은 확실하게 분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자신의 욕구가 어느 정도 충족되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본인이 어떤 욕구를 가지고 있는지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볼 때 이 욕구와 특정한 전략을 연결시키지 않아야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이 열립니다. 우리가 욕구와 부탁을 애매하게 섞어 놓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욕구는 특정한 사람이나 특정한 방식으로만 충족되어야 합니다. 이는 스스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범위를 제한하는 것이며 그 범위는 점점 줄어들게 됩니다.

 

욕구를 선물이라고 여기며 서로에 대한 기대 없이 만나야 더 많은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는 내가 상대의 욕구를 채워 줄 수 없다고 해도 그 자체를 선물로 받아들이고 존중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스스로 먼저 욕구를 선물로 받아들일 때 주변 사람을 기쁘게 해 줄 수 있습니다. 또한 욕구를 표현하는 태도가 표현 자체보다 훨씬 더 중요합니다. 인생의 행복은 절대 다른 사람이 내 욕구를 충족시켜 주느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또한 지금에 와서 보니 나의 치명적인 약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앞서도 말했듯이 감정 내면에 살아있는 욕구에 대해 너무나 무지했다는 것이었다. '내면의 재판관의 생각에 공감하고, 내면에 채워지지 않은 욕구가 무엇인지 그 소리를 들어야' 하는 것도 몰랐고, '내면의 결정자가 어떤 욕구를 충족시키고 싶은지 말할 때 그의 말에 공감하며 귀 기울여야' 하는 것도 몰랐다. 그러니 매번 말에서부터 시작해 관계가 원만하지 못한 채 위태위태하며 혼자 힘들고 아파했었던 것 같았다.

이제는, 정말 이제는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살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공감'은... '사랑'은... 

공감은 현재에서만 일어납니다. 과거의 이야기나 생각과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살아 있는 것들과 소통해야 합니다. 이러한 공감의 시간만큼은 늘 조용합니다. 말이 필요 없는 것이 공감이기 때문입니다.

 

공감이란 내 감정이 아니라 타인의 감정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삶을 충만하게 하고 싶다는 소망을 품을 때, 그 동기가 보상을 받거나 사랑을 억디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로지 이런 소망 자체가 동기가 되어야 합니다.

 

나의 욕구는 어디에 있는가, 나에게 정말 의미있는 것은 무엇인가를 스스로에게 묻고 이것을 상대방에게 정확히 전달해 보세요. 이를 통해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의미 추구에 대한 욕구가 채워질 수 있습니다.

 

공감에서 중요한 것은 현재와 느림이며. 상대방의 생각이 아닌 감정과 욕구에 집중하면 됩니다.

 

'나의 욕구는 어디에 있는가', '나에게 정말 의미있는 것은 무엇인가' 에 대해 자문자답하는 것이 모든 관계의 시작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나 자신과 다른 영역에 있는 사람들을 특정하게 규정하고 정의하여 선을 긋는 것으로 나의 욕구를 해소할 수 있다' 고 생각하는 것을 절대 지양하고, 단지 '우리'를 강조하며 똘똘 뭉쳐 배타적이지 않도록 스스로 경계해야 되겠다는 것을 백번, 천번 되새겨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럼으로써 ...

선과 악을 논하는 것이 과연 의미 있는 일인지 생각해 봅니다. 저는 이보다 사람들이 전적인 언어가 아니라 삶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보다 더 중요하고 진실성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슬퍼하려면 진심으로 삶을 사랑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행동이 삶에 도움을 줄 수 없을 때 깊은 슬픔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내면에는 아름다운 소리와 추한 소리를 낼 수 있는 현이 같은 개수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내면 가운데 선과 악이 공존하지만 매 순간 자기 자신과 인간미를 드러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러한 시각이 우리에게 희망찬 미래를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과 일상 영역의 범위에서 생각했을 때 매일 사용하는 언어와 사고에 깃들어 있는 폭력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우리의 첫 번째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인간을 조건화하고 삶에서부터 물리쳐야 하는 불행을 양산하는 권력 구조를 변화시키는 것이 두 번째 과제입니다.

 

공감하는 태도를 키우기 위해서는 감사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감사함은 사람들이 서로서로 다른 사람의 삶을 풍성하게 해 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게 합니다. 우리가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면 우리 내면에 흐르는 에너지가 다른 사람을 공감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결국 감사함은 삶을 즐기는 것입니다.

 

오직 내 감정에 충실하고, 그 내면을 깊이 들여다봄으로써 삶의 언어로, 감사함으로 나아가는, '인간미' 넘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 또 노력, 더욱더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이 책 <상처주지 않는 대화> 또한 나에게 있어 정말로 값진 의미를 선물해준 마음의 양식으로 기억될 것 같다.

 

 

※인문학 카페 한주한책 서평단의 홍석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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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로하는 글쓰기 - 몸과 마음을 치유하고 자기를 발견하는 글쓰기의 힘
셰퍼드 코미나스 지음, 임옥희 옮김 / 홍익 / 2018년 1월
평점 :
절판


#.1
지난 2016년 연말 즈음에 '욜로 북(YOLOBOOK)'이라는 것을 구매했다.
"평생 단 한 권의 기록"
"느리게 완성되는 나의 이야기"
홍보 문구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나만의 기록'을 평생 채워나가는 '일기책(Diary book)' 이었다.

#.2
그로부터 1년 후인 지난해 10월 말에는 'Design My History'라는 것을 구매했다.
"10년 다이어리 전문 브랜드"
"Design My History는 내가 쓰고, 생각하고, 즐기고, 다짐했던 많은 이야기들과 10번을 다시 마주하게 됩니다. 그 기록의 여행을 통해 나는 내 인생을 다시 디자인하고 또 기억하며 새롭게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 또한 '나만의 기록'을 10년 동안 써 내려가는 '일기책' 이었다.

그러나 2018년이 밝아왔어도 나는...
아직도 이 두 권의 '일기책' 모두에 글자 한 자 조차도 남기지 못했다.
'기록(記錄, Record)'을 공부한다면서 정작 나는....
지난 1년 동안 '나'를 기록하지 않고 '자기 기만(自己欺瞞)'을 해왔던 것이다.


기억할 수 있는 추억은 아주 적다

'자신에게 일어났으면 하는 바람직한 변화를 글로 마음껏 표출하세요.'

현재 어디서 무엇을 하든, 미래에 반드시 자신이 원하는 삶이 기다리고 있다고 믿으면서 그것을 노트에 자세하게 적는 것이다. 내가 그렇게 권하는 이유는, 사람은 누구나 자기 삶이 제공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마음속에 공간을 만들어놔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공간의 존재는 현재의 삶을 지탱하는 든든한 버팀목이 된다.


그렇게 '자기 기만'을 지속해오면서도 나의 머릿속에서는 '글을 잘 쓰고 싶다', '글쟁이로 살아가고 싶다', '나의 아카이브(Archive)를 만들고 싶다'라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그런 와중에 만난 이 책 <나를 위로하는 글쓰기>는 한 줄기 작은 햇살이 비치는 듯 느껴졌다. '평생을 이어가는 글쓰기'에 대한 ABC가 이 책 하나에 담겨 있었다.


글쓰기는 자신을 검열하거나 억제하려는 일이 아니다

당신이 하는 글쓰기는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 경험에 대해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짐으로써 치유와 화해의 길로 접어들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남들이 당신의 글에 관해 뭐라고 숙덕거릴지 두렵다면 진솔한 글은 결코 나오지 않는다.


'나'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것, 이것이 바로 '나' 자신만의 이야기를 쓰는 데 있어 첫걸음이자 마음가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 나는 그간 '자기 기만'을 지속해왔던 것에 대해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지지 않았으면서, 나 스스로부터가 마음속에서부터 자기검열과 감정 억제를 해왔으면서 무슨 글쓰기를 하겠다고 나서려고 했는가.


완벽주의는, 타성(惰性)은

완벽주의는 글을 쓰면서 반드시 물리쳐야 할 장벽이다.

타성은 글쓰기를 가로막는 가장 막강한 장애물이다. 타성의 문을 열고, 장벽을 무너뜨리고, 나만의 공간 속에 들어가 이제껏 한 번도 시도해본 적 없는 아스라한 기억의 영토를 되살리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이다.

타성에 굴복하면 절대 앞을 향해 나아갈 수 없다. 타성에서 벗어나려면 일상적인 습관에 저항하는 타격을 가해야 한다.

타성에 젖어있는 한 스스로의 삶에 한계를 부여함으로써 아무것도 하지 못하게 된다. 타성이 당신의 진전을 가로막는 족쇄가 되도록 그냥 놔두고 살 것인가? 아니면 당장 제거해버리고 앞으로 나아가며 살아갈 것인가?

어쩌면 지난 27년 동안 살아오면서 나는 나도 모르게 '완벽주의'라는 그물에 사로잡히고, '타성'이라는 괴물 앞에 굴복한 채 살아왔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는 곧 '스스로의 삶에, 능력에 한계를 부여함으로써 아무것도 하지 못한 홍석천'이라는 오명을 스스로 입게 만들었다. 그러면서 '어제보다 더 나은 내일'을 꿈꾸었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語不成說)' 이었다.


글쓰기로부터

글쓰기를 통해 추구해야 할 진정한 목표는 바로 이것이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긍정적인 변화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바꿔 놓음으로써 살아오면서 받아온 고통의 짐을 내려놓는 것 말이다.

진정한 치유는 과거와 현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서 비롯된다.

더 나은 삶은 자기비판을 멈추고 자기 배려를 시작하는 데 있다.

지금 당장 내게 필요한 것은 나의 에너지를 이 순간을 위해 쏟아붓는 것이다. 지금의 나를 소중히 여김으로써 나를 성장시킬 수 있고, 나 스스로에게 부여한 한계를 뛰어넘어 성장할 수 있다



이제 더 이상 '자기 기만'인 채로 '자기비판' 하면서 '어불성설'인 말만 늘어놓는 삶을 살아서는 내일이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는 것처럼 '치유의 글쓰기'를 하나부터 열까지 차근차근 시도해봐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해졌다. '밑져야 본전'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책에서 저자는 나를 위로하는(치유하는) 데 있어 다양한 소재와 방식의 글쓰기가 있다는 것을 자신이 겪은 사례와 함께 곁들여 조곤조곤하게 설명하고 있었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무작정 써라'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최소한의 근거로서 작용하는 내용들과 함께 '이러이러한 방법으로 효과를 본 사람이 있으니 당신도 한번 시도해보라'라고 권한다.


내용이 무엇이든, 당신이 누구이든

내용이 무엇이든 펜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것들이 당신의 삶 자체이며 표현할 필요가 있는 귀중한 글감이다. 따라서 일기장에 적어두기에 무엇이 중요하고, 무엇이 중요하지 않은가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고려할 문제는 오늘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일이 몇 개월 후에는 대단히 중요해질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라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오늘 적어놓는 모든 것들이 현재의 당신에게 더없이 중요한 사건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당신의 소소한 감정까지 포함하여 뭐든지 일단 기록하라. 일상적인 약속을 간략하게 메모하는 것처럼 건성으로 적지 말고 감정을 동반해서 낱낱이 써라.

당신이 하는 것, 당신이 가진 것, 당신이 느낀 것, 당신이 살아오면서 겪은 모든 것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남들이 당신을 과소평가한다며 모욕을 느끼는 것은 얼마나 큰 모순인가?

지금 당장 써보라. 현재의 삶을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던 것들을 바라보고, 그것을 쓰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긍정이다. 긍정이 문제를 사라지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문제에 더 잘 대처할 수 있으리라는 느낌을 갖는 데 큰 도움을 줄 것이다.


결국 그동안의 문제는 이것이었다. 완벽주의와 타성의 끊임없는 압박 하에 '나' 란 존재에 대한 의심과 써야 할, 아니 쓸 내용에 대한 자기검열... 이는 곧 내 안의 새싹과도 같은 의지도 꺾고, 내 머릿속 생각 회로는 새싹이 자라나지 못한 황량한 황무지인 채로 살아온 것이었다. '살아오면서 겪은 모든 것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자'는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나 자신이었다.


당신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라는가

가치관이 인생의 방향을 결정하고, 그렇게 걸어간 길 위에 남겨놓은 것들이 당신의 유산이 된다. 자랑스러운 일도 있고 부끄러운 일도 있지만 결국 그 모든 것들이 당신의 삶을 구축하는 재료들이다. 그러니 당신이 지금 중요하다고 여기는 가치를 솔직하게 마주하는 일은 당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당신이 적어놓는 것들에 관해 어떤 비판도 가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실현 가능성을 따지며 비판하지 마라. 마음속의 풍향계가 어떤 방향으로 돌아가든 그것이 바로 오늘의 당신 모습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라.

자기 삶을 진지한 눈으로 바라보며 시간의 길 위에 남겨놓은 자신의 발자국을 긍정하는 것이 치유의 지름길임을 잊지 마라.

살아남은 자로서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치유다.



이와 같은 내 안의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은 단 하나, 하루하루를 사는 순간순간마다 끊임없이 '자문자답(自問自答)' 하며 기록하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 홍석천은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라는가' 그리고 '나. 홍석천은 이 풍진(風塵) 세상사 속에서 어떤 사람으로 기록되기를 바라는가' 이 물음에는 영원히 '정답(正答)'이 없을 것이다. 또한 사람마다 각각 다를 것이다. 그냥 단지 내가 스스로 묻고, 생각하고, 생각한 것을 그대로 가감 없이 기록하고, 되새기며, 그것들이 곧 나 자신이 되고, 나의 삶이 된다는 사실을 매 순간 잊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홍석천'이라는 한 인간의 존재를 고유하게 만드는 단 '하나'의 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이 책을 완독하는 순간 절실해졌다.


세상을 그 자체로 보지 말고 당신만의 방식으로 보라

많은 것들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무엇보다도 당신 안에 있는 축복이 당신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당신의 일기가 거기에 이르도록 도와줄 것이다. 글을 쓰면, 당신은 그것을 발견할 수 있는 문을 열게 된다.


"글쓰기로부터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은 '나란 존재에 대한 긍정과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기르는 것과 그리고 나의 역사(History)를 쓰는 것'이다."
"이에 오늘부터 나는 '내 평생의 글쓰기'를 시작한다. 아니 '나의 역사를 써 내려갈 것이다. 그리고 나의 모든 노력에 박수를 보낸다."

이러한 결심과 함께 2018년부터는 '나' 홍석천에 대한 진본성 있는, 신뢰성 있는 무결성 있는 온전한 기록을 남길 것을 스스로에게 약속했다. 그리고 다짐했다.
"나 자신에게 진실을 말하겠다고 맹세했으므로..." - 에밀 졸라

그런 의미에서 이 책 <나를 위로하는 글쓰기>는 적어도 나에게는 충분히 의미 있는 마음의 양식으로 기억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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