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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나
김성우 지음 / 쇤하이트 / 2018년 4월
평점 :
품절
※인문학 카페 한주한책 서평단의 홍석천입니다. |
기록과 성찰이란...
기록과 성찰의 경험 속에서 소중한 깨달음 또한 얻었으니,
일상을 나누는 이들에게는 특권과 책무가 동시에 주어진다는 것이다.
서로의 생을 목격할 수 있는 특권, 그리고 그렇게 한 삶이
차곡차곡 쌓여 자신의 일부가 되었음을 망각하지 않을 책무,
부모라서 또 자식이라서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고 또 죽어 가는 모든 이들에게 주어진 공존의 선물이자 의무 말이다.
기록학이라는 학문에 임하면서부터 '기록', '記錄', 'Record'의 가치를 매순간 자각하며 지내왔지만... 정작 실천으로 옮기질 못했다.
'왜 써야하지?', '내가 지금(현재)를 기록함으로써 내게 주어지는 게 뭐지?'
하는 생각이 아직도 내 머릿속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던 걸까...
그러다가 이 책을 펼치자마자 마주한 이 글을 보고 선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듯 했다.
기록이 곧 성찰의 경험이 되고, 일상을 공유하는 이들에 대해 '특권'과 '책무'가 주어진다는 것...
정말 지금의 내 사고로는 전혀 생각하지 못할 신선한 생각이었다.
그리고 더불어서 어머니와 함께한 나날에 대해 기록했다는 것 또한 신선하게 느껴졌다.
어머니의 인생 수업... 내 어머니에게선...?!
"그래서 어떤 부모가 아이를 잘 키우는 거예요?"
어머니는 주저 없이 담담하고도 단호히 말씀하셨다.
"자기가 아이한테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지."
'무엇'은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상대와의 관계 속에서 그 의미를 드러낼 뿐.
'무엇' 하나만 가지고 좋은 일이라고 착각하지 말아야겠다.
별을 따려 하는 손보다 별빛 담은 눈이 아름답다.
움켜진 두 손이 아니라 수십 억의 반짝이는 눈을 기억하리.
소유하지 않고 그대로 두기. 오래오래 배워야 할 일이다.
뭔가 배울 때는 마음을 깨끗이 비우고 싶은데 쉽지가 않다.
좀 안다는 마음에 이것저것 토를 달기도 한다.
정작 배워야 할 것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었던 것에 집중하는 우를 범한다.
오늘 읽어낼 책에서, 만날 이들에게서,
쉼 없이 흘러갈 하늘과 시간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배움에 있어서만큼은 '어리숙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예전에 무엇을 했건, 어떤 명성과 부를 쌓았건
오늘 나의 삶을 가꾸고 돌보는 일이 소중하다.
과거의 나로 지금의 나를 규정하지 않기.
'잘나갔던 나'를 소환하지 않고, '비참했던 나'를 멸시하지 않으며,
순간순간 오롯이 세계와 대면하는 일. 그것이 공의일지 모른다.
그렇다. '정체(正體, identity)'는 '정체(停滯, stagnation)'와 전혀 다르다.
벽을 넘을 수 있을지는 모른다.
절망이 생명을 밀어내지 못하도록 붙잡은 손 놓지 않을 뿐.
그렇게 수많은 손들이 세상을 덮을 때 벽은 담이 아니라 대로일 터이니.
내가 남에게 '무엇'을 하는지에 대해 정확하게 아는 것, 너무 많은 걸 가지려 하지 않고 때로는 그대로 두며 절제할 줄 아는 것, 끝없는 배움 앞에서 어리숙함을 유지하는 것, '어제'에 집착말고, '오늘'과 '내일'에 충실하는 것, 상대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배려'할 줄 아는 것...
하나같이 다 내 어머니가 내게 전하는 진심어린 충고로 들리는 신기함....
유사이래 '어머니'로 살아오신 분들의 마음이란 다 이와 같을까...?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어머니와 나, 나와 어머니는...?!
"쌍놈은 나이가 감투야."
기억은 언제나 사람들 사이에, 물건과 장소와 시간 곳곳에 분산되어 있고,
나만의 기억에 더 특별한 지위를 부여할 이유도 없다.
그런 의미에서 함께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멤버들이 다시 모이는 것(re-member)이자 기억의 조각들을 다시 모으는 것(re-collect)이다.
사소한 다툼에 마음이 어두워지는 건 우리 마음 속 전등이 나갔기 때문이겠지.
함께한 날들을, 서로의 삶을 목격해 왔다는 사실은 그대로잖아.
그러니 주저 말고 등을 달자. 다시 마음을 밝히자. 서로의 얼굴을 잊기 전에.
너무 늦어 버리기 전에. 가끔은 나 자신도 이렇게 토악여 줘야겠다.
"그동안 너한테 너무 가혹했다. 미안하다. 좀 더 잘할게."
많은 걸 잊고 산다. 시냇물 건너지 않아도, 문지방 넘지 않아도,
냉장고 문 닫는 소리에도 기억이 우수수 떨어질 때가 있지 않은가.
환히 웃었던 순간들을 특히 잘 잊히는 듯하다.
힘들게 했던 사람들은 똑똑히 기억하면서 말이다.
소위 머피의 법칙은 선별적 기억의 산물일지도 모르겠다.
새로운 한 주, 아팠던 날들을 불러내기보다는 날 웃게 해 준 이들을 떠올리기를,
나도 누군가에게 웃음을 줄 수 있기를 빈다.
우린 모두 서로의 일상을 통해 세상을 읽는 법을 배우고 있다.
진리를 놓은 채 하루하루가 헛되고 헛되다는 탄식만 쌓아 가고 있지는 않은가.
'헛되고 헛되니 헛되고 헛되도다'에서 '헛되다'의 개수를 줄이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오늘 내게 주어진 묵직한 숙제다.
마음을 깊게 가져야 깊은 사랑을 받을 수 있다.
'어머니와 나', '나와 어머니'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무엇을 함께 하며 살아왔는가.
내 어머니는 어떤 분이신가. 내 어머니는 나에게 어떤 가르침을 주셨는가.
나는 내 어머니의 가르침을 잘 따랐는가.
또 다시 찾아온 자문자답의 순간...
누군가에게 웃음이 아닌 울음을 주며, 어둠 속에서 얕은 마음으로 살아온
'쌍놈' 아닌 '쌍놈' 같은 나로 살아온건 아닌가...?
어제오늘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작디 작은 '나'
인간이 작디 작다는 사실을 망각한 이들은 자신을 크다 여긴다.
작은 것들을 멸시한다. 한껏 치켜든 턱, 너희들은 왜 더 커지지 못하느냐며 깔본다.
자꾸만 더 많은 것들을 먹어 치운다. 하지만 그들도 무작정 커질 수는 없다.
때로는 거대한 산이 되려는 야망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자기 안으로 내려앉기도 한다.
각자가 작은 존재임을 인정할 때 삶은 커진다. 서로 크다 우기는 사회에서 삶은 초라하고 비루하다.
우리는 그다지 대단할 것 없는, 본디 작은 존재일 뿐이다.
그래도 괜찮고, 그래서 괜찮다.
지나온 시간, 우리는 누구와 어떤 방식의 삶을 살아왔는가?
우리 앞에 남은 시간, 어떤 이들과 함께 인생길을 걸어갈 것인가?
모든 걸 다 말할 수는 없다. 할 말만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는 말을 고르는 일이요, 둘째는 말을 버리는 일이다.
이 둘은 사실 동전의 양면이다.
특정한 말을 고른다 함은 다른 말을 버린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역설이 있다. 텍스트는 쓰여진 증거임과 동시에 지워진 흔적이라는 것.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 사이에는 태어났다 이내 사라진 수많은 말들이 존재한다.
사람도 그렇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인간은 지나온 삶의 증거이자 살 수 없었던 생의 흔적이다.
세상 모든 글의 배후에는 보이지 않는 인연들이 있다. 온전히 개인적인 글은 존재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힘이 빠지진 않는다.
나의 생각이 복잡다단한 관계들과 얽혀 있다는 사실은
'내 것 하나 없는 존재의 왜소함'이 아니라
'거대한 물줄기로 같이 흘러가는 숭엄함'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함께 흘러갈 수 있음에 감사한다.
광대한 시공간을 점하는 수많은 일과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일.
인생이란 이 둘 사이의 관계 맺기에 다름 아닐지도 모른다.
기다린다는 건 가던 길을 멈추는 것. 오던 길을 되돌아가는 것.
결국 기다림은 함께하는 것. 문득 기다리지 못했던 날들, 달아나던 날들이 스쳐갔다.
비록 한 글자이지만 '~와'는 모든 것을 연결한다.
나와 일, 나와 글, 나와 삶 그리고 나와 너. '~와'가 있음으로 세계와 세계가 만난다.
하나의 건물 내부가 아닌 건물들 사이의 틈으로 더 넓은 세상이 펼쳐지듯
당신 혹은 내가 아니라 우리 사이에서 또 다른 우주가 생성된다.
정말 이제는...
점과 점이 만나고, 선과 선으로 이어지는 세상에서 서로 함께 흘러갈 수 있음에 감사하며,
각자 지나온 생의 흔적을 존중하고, 때로는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와' 함께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더 확장해 나가는 삶...
그런 삶을 사는 '작디작은 나' 가 되는 것이
바로 나 자신에게 있어서나 이 세상을 위해서나
바람직한 길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 같다.
아니, '결.코..!!' 잊지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