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소설가에게 보내는 편지 (1)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촌충의 비유
그대는 그대의 내부에서 이른바 의향을 느꼈고, 의지를 표명했으며, 문학에 전념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대의 운명이라고 부를 수 있을 문학에 대한 이 취미를 그대는 일종의 종속처럼, 하나의 노예살이처럼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비유를 사용하여 말하자면, 그대의 결정은 그대로 하여금, 자기의 뚱뚱해진 몸매를 확인하고 크게 놀라 날씬함을 되찾고자 촌충(寸蟲)을 삼키는 19세기의 여인들과 가까워지도록 할 것입니다. 뱃속에 이 끔찍한 기생충을 지닌 누군가를 본 적이 있습니까? 나는 있습니다. 고로 이 여인들은 가히 영웅적일 뿐 아니라 미의 순교자들이라고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직접 관찰한 사람은 60년대 초 파리에 살던 호세 마리아라는 멋진 스페인 친구로 그는 화가이자 영화감독이었습니다. 그는 어찌어찌하여 촌충을 지니게 되었고, 그의 몸속에 자리 잡은 촌충은 그와 한 몸이 되어버렸습니다. 그것은 그에게 붙어 양분을 취하면서 장성했고, 그는 그만큼 쇠약해졌습니다. 촌충이 이용하고 식민지화하는 호세 마리아의 몸으로부터 촌충을 몰아내기란 매우 어려웠습니다. 호세 마리아는 점점 야위어갔습니다. 자기 창자 안에 자리 잡은 벌레의 식욕을 잠재우기 위해 지속적으로 먹고 마셨지만 (특히 우유를) 말입니다.
문제는 그가 먹고 마시는 것이 그의 취미와 쾌락을 위한 것이 아니라 촌충의 취미와 쾌락을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어느 날 우리가 몽파르나스의 한 술집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그가 다음과 같은 놀라운 고백을 해왔습니다.
"우리는 아주 많은 것을 함께 한다네. 극장과 전시회에 가고, 서점에 들르며, 여러 시간 동안 정치, 책, 영화, 친구에 대해 토론하지. 그러나 내가 이 일들을 나의 즐거움을 위하여 한다고 생각하면 오산일세. 나는 오로지 그를 위하여, 다시 말해서 나의 촌충을 위하여 그 일들을 한다네. 그렇게 느껴져. 이제 나는 나를 위해 사는 게 아니라 내 속에 있으며 내 주인 행세를 하는 촌충을 위해 사는 셈이네."
이날 이후로 나는 작가의 상황을 뱃속에 촌충을 지닌 내 친구 호세 마리아의 상황과 즐겨 비교하곤 합니다. 문학적 소명은 심심풀이나 스포츠나 자유시간을 이용한 세련된 유희가 아닙니다. 그것은 특별하고 배타적인 활동이고 절대적인 특권이며 자청해서 받아들인 예속인 바, (행복한) 희생자를 노예로 만들어버립니다. 내 파리 친구의 촌충처럼 문학은 항구적인 활동이 될 뿐 아니라, 글쓰기에 투자하는 시간을 넘어서 다른 모든 활동에까지 전염되는 하나의 실존적 행위가 됩니다. 숙주로 삼는 육체에 기생하는 긴 촌충과 마찬가지로 문학적 소명은 작가의 삶을 먹고삽니다. 플로베르가 말했듯, 글을 쓰는 것은 삶의 한 방식입니다. 말을 바꾸자면, 이 아름답고 흡입력 강한 소명을 자기 것으로 삼는 사람은 살기 위해 쓰지 않고 쓰기 위해 삽니다.
작가의 소명을 촌충에 비유하는 것은 나만의 독창적인 생각이 아닙니다. 나는 최근에 토마스 울프를 읽다가 그것을 발견했는데 그는 자신의 작가적 소명을 자기의 존재 안에 자리 잡은 벌레로 그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하여 잠은 영원히 죽었다. 경건하고 어둡고 부드러운 잠, 이제는 잊혀진 어린 시절의 잠 말이다. 벌레가 나의 마음속에 들어와 웅크린 채 나의 뇌와 정신과 기억으로 배를 불리고 있었다. 나는 내 스스로 지핀 불에 결국 내가 데었다는 것, 나 자신의 화염에 내가 소진되었다는 것, 그리고 여러 해 동안 내 삶을 흡입한 맹렬하고 만족 모르는 욕망의 송곳니에 내 존재가 갈갈이 찢겼다는 것을 알았다.'
확신하건대, 자기의 시간과 정력과 노력을 문학적 소명에 전적으로 바치겠다는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마치 종교에 입문하듯 문학에 들어가는 사람만이 정말로 작가가 될 수 있고 자신을 넘어서는 작품을 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재능이라고 천재성이라고 부르는 저 신비로운 그 무엇인가는 때 이르고 돌연한 방식으로 ―이는 적어도 소설가들에게 있어서는 불가능하고, 시인이나 음악가들에게 있어서는 이따금 가능한데―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여러 해 동안의 훈련과 인내로 이루어진 긴 준비과정 끝에 얻어지는 것입니다. 조숙한 소설가란 없습니다. 위대하고 경탄할 만한 소설가들조차 처음에는 일종의 수습서기와도 같았고, 그 재능은 꾸준함과 신념 속에서 주조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