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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움보다 비움이 아름답다


바다와 하늘을 향해 열려 있는 ‘비움의 마당’은 시시각각 다른 표정을 짓는다. 왼편의 실험동과 오른편의 연구동 사이에 침묵으로 펼쳐진‘비움의 마당’은 투명한 하늘 벽으로 우주를 열기도 하고(上), 석양으로 붉게 불타며 장엄한 절대 공간을 열어젖히기도 한다.

1974년 3월 17일, 미국 뉴욕 기차역에서 한 노인이 심장마비로 죽은 채로 발견됐다. 행려병자로 간주된 이 노인의 주검은 인근 시체안치소에서 사흘 동안 머문 후에야 그가 20세기 최고의 사색적 건축가로 불린 루이스 칸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는 인도의 아메다바드에 짓고 있던 인도경영학대학 공사 현장을 방문하고 귀국해 필라델피아 집으로 가는 길이었던 것이다.

루이스 칸, 20세기 건축가 중 가장 메시지가 강한 건축가인 그는 1901년 에스토니아에서 유대인으로 태어나 어릴 적 미국 필라델피아에 이주한 후 예술가인 부모님의 영향 아래 일찍이 건축에 입문했지만 그가 건축계에 이름을 알린 때는 나이 50이 넘어서였다. 그러나 20세기 모더니즘의 한계를 극복한 그의 건축과 이론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영성과 시심에 가득 차 있었으며, 그는 자연의 법칙 속에서 건축의 질서를 발견하고 정제된 빛으로 만든 침묵의 공간을 통해 우리의 근원을 되묻게 한 구도적 건축가였다. 방글라데시의 수도 다카에 솟은 국회의사당은 칸의 빛과 침묵이라는 주제어가 화려하게 만발한 걸작 중의 걸작이다. 세계 최빈국의 수도 다카였지만 그곳은 칸의 건축을 갖게 됨으로써 현대 건축의 성지 자격을 얻을 정도였다. 그 건축 속에 서서 신비에 가득 찬 그의 건축 언어들을 음유하다 보면 어느덧 우리는 시인이 되고 성자가 된다.

그러나 더욱 나를 감동시킨 그의 건축이 있으니 캘리포니아 남부 라호야라는 마을에 있는 '소크 생물학연구소'이다. 나의 근본을 묻게 한 그 건축은 부동의 교과서로 나에게 남아 있다. 


 1959년, 폴리오왁신을 개발한 조나스 소크 박사는 샌디에이고의 라호야 지역에 생물학 연구소 설계를 칸에게 의뢰하면서 과학과 인간이 결합하는 건축과 장소로 만들어 줄 것을 당부했다. 칸은 소크 박사가 가진 건축에 대한 혜안에 감명을 받고 대단한 작가 의지를 불태웠다고 한다.

이 설계작업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칸은 부지 규모의 결정에서부터 관여하기 시작해 수없이 많은 스케치를 해야 했고, 소크 박사와 토론을 통해 몇 번이고 수정하곤 했다. 소크 박사가 아시시의 성프란체스코 수도원에서의 감동을 얘기하면 그는 다시 그 곳을 방문해 경험을 설계에 반영하기도 했고, 티볼리의 아드리아누스 궁전에서 몇 부분을 인용하기도 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은 후 62년에 비로소 최종안이 만들어졌다. 태평양에 면한 절벽 위가 부지인 이 연구소의 본관은 가운데 포플러나무가 가득 차 있는 마당을 두고 연구동과 실험동, 두 개의 건물로 분리돼 설계됐고, 인근에 숙소와 집회시설까지 계획되었다.

그럼에도 이 건축을 가장 특징적으로 결정지은 사건은 공사 중인 65년에 일어났다. 본관 골조가 완성돼 가고 있던 그 즈음에도 칸은 두 건물 사이에 놓인 마당의 디자인을 결정하지 못하다 그해 뉴욕의 현대미술관에서 열린 루이스 바라간의 건축전시회를 보고, 조경에 특별한 재능을 가진 듯 보인 그에게 이 마당의 디자인에 관해 자문해줄 것을 요청했다.

바라간은 멕시코의 건축가였다. 찬란한 마야와 아스테카 문명을 가졌지만 제국주의에 의해 멸망당하고 방황의 역사를 전전하던 멕시코는 20세기에 이르러 사회혁명을 통해 정체성을 회복하려 안간힘을 쓰는, 결코 간단치 않은 역사를 가진 나라다. 이 나라에서 수도자적 삶을 살며 멕시코의 슬픈 영혼을 담는 건축에 몰두하던 바라간에게 건축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프리츠커상이 80년에 수여된다.

그는 수상연설에서 이런 말을 했다. "아름다움을 빼앗긴 인간의 삶은 가치가 없다. 고독과의 친밀한 관계 속에서만이 인간은 스스로를 발견한다. 고독은 좋은 반려이며 내 건축은 고독을 무서워하거나 피하는 이들에게 맞지 않다… 나는 이러한 미적 진실이 인간의 존엄성을 높이는데 기여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건축을 한다."

그런 바라간이 66년 초 칸의 요청에 따라 소크연구소 현장을 방문해 콘크리트로 지어지고 있는 두 건물과 그 사이에 진흙으로 덮인 마당, 그리고 그 앞에 놓인 태평양을 보며 묵상에 잠기다가 칸에게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나뭇잎 하나 식물 하나도, 꽃 하나라도, 심지어 먼지 하나라도 이 마당 안에 두지 마십시오. 완벽히 비운 이 마당은 그 두 건물을 결합시켜 그를 통해 바다의 수평선을 보게 될 것입니다."

바라간의 이 생각은 전통적 정원의 분위기를 원한 소크 박사에게는 그리 탐탁한 제안은 아니었지만 칸은 바라간의 개념을 그대로 실행에 옮겼다. 그리고 오랫동안 칸은 그 비움에 대한 개념을 스스로 만들지 못한 데 대해 안타까워하면서도 그 과정을 또한 자랑스럽게 회상하곤 했다고 한다.

소크연구소 건축에서 이 비움의 마당은 가장 본질적 요소다. 시각에 따라 변하는 태양과 그 태양이 만드는 그림자의 농도와 깊이에 의해, 변하는 계절에 따른 하늘의 색깔에 의해, 기후에 따른 바다와 하늘의 변화하는 표정에 의해 비워진 마당은 수시로 다른 표정을 갖는다. 그리고 방문하는 이들의 주장과 관념에 의해, 거주하는 이들의 삶의 모습과 그들의 변하는 기쁨.노여움.사랑.즐거움에 의해 채워지고 또 비워진다.

이 마당은 더불어 무한히 열려 있으며, 때로는 어두운 색으로 변한 하늘의 벽으로 닫혀진다. 아마도 일몰의 시간이면 태평양의 수평선은 불타는 벽으로 나타날 것이며, 하루의 이 마지막 시간이야말로 칸이 줄곧 추구해온 절대 공간, 본질적 공간에 가장 근접해 있는 건축의 장엄미일 것이다. 실로 이는 비움이 갖는 절대미학이었으니 수천년 동안 채우기를 목표 삼아온 서양인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온 것이었다.

비움, 이 용어는 이제 서양의 현대건축에서 새로운 시대, 새로운 건축의 키워드가 돼 있지만, 이는 본디 우리 선조들의 상용어였으며, 우리의 옛 도시와 건축의 바탕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우리에게 비움은 추방해야 할 구악이 되었고, 채우기에 몰두한 나머지 우리 도시는 악다구니하는 한갓 조형물과 건조물로 가득 차고 말았다. 우리의 삶과 공동체는 그래서 서서히 붕괴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좋은 건축과 건강한 도시는 우리 삶의 선함과 진실됨과 아름다움이 끊임없이 일깨워지고 확인될 수 있는 곳이며, 그것은 비움과 고독함을 통해 얻어지는 것이라고 바라간과 칸은 믿었다. 물신의 탐욕이 과도히 지배하는 이 시대에 잃어버렸던 우리의 고독을 다시 찾아 이를 마주하고 우리의 근원을 다시 물을 수 있도록 비워진 곳, 그런 비움의 도시가 결국 우리의 존엄성을 지킨다는 것, 소크연구소 마당은 이에 대한 바라간의 선언이었고, 칸의 증명체였던 것이다. 그렇다, 도시와 건축의 아름다움은 채움에 있지 않고 비움에 있다.

나는 이 생각으로 지난 6개월간 이 귀중한 지면을 소비해 왔다. 이념의 도시가 갖는 광기를 증언하고 자본의 도시가 갖는 횡포를 고발하려 했으며, 권력의 도시와 건축이 내뿜는 독기를 기록하려 했다. 서양 건축의 껍데기로 지어지는 우리의 신도시들을 통박하고 도시는 부동산의 집합이 아니라 문화며 삶터임을 강조하고자 했지만, 돌아보면 글의 오류와 부족함이 하염없이 부끄럽다. 졸렬한 글 재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우리의 귀중한 삶을 위협하는 이 시대 우리 도시와 건축의 야만성을 참지 못한 게 몹쓸 만용으로 나타나고 만 것이다.

그러나 다시 간절히 전하고 싶다. 우리가 건축을 만들지만 그 건축은 다시 우리를 만든다는 것을….

승효상 <건축사무소 '이로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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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재는 중앙일보에 7개월동안 실린 글로서 건축가 승효상씨의 멋진 인문학적 미적 감감이 잘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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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나치…그 모든 역사와 만난다



패전의 슬픈 과거를 지우기보다 오히려 문화복합시설인 쉬른 미술관을 지어 로마시대로부터 현대까지 정확한 역사인식과 시간여행을 할 수 있도록 설계한 뢰머광장과 뢰머대성당을 연결하는 중요 지점. 왼쪽 쉬른 미술관과 나란히 로마시대의 유구(遺構)가 보인다(上). 옛과 지금이 거의 변화가 없는 뢰머 광장.

몇 년 전 문민정부 시절에 조선총독부였다 하여 국립중앙박물관을 광복절 기념식에 맞추어 건물의 머리부분을 동강내고 이를 들어올려 축제를 펼친 일을 기억할 것이다. 텔레비전으로 중계된 광경을 보며 나는 배타적 국수주의, 문화적 편협성, 반문화적 폭거, 천민문화 등등 내가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야만적 문화에 관한 용어를 내뱉으며 분을 삭였었다.

그 후 경복궁 복원이 이루어지고 있을 때, 조선총독부였으며 해방 후 제헌의회였고 중앙청이었다가 급기야 대한민국 문화의 중추 시설로 바뀐 그 역사를 건축적으로 그 장소에 남기게 되길 소망하였지만, 완공되어 나타난 가짜 경복궁은 우리 근세사에서 가장 중요했던 흔적을 깡그리 지우고 말았다.

나는 조선총독부를 영구히 보존하자고 주장하는 반(反)개발론자가 아니었다. 우리 사회에는 개발과 보존이 양립할 수 없는 적으로 이해되고 그로 인해 숱한 대립과 갈등을 빚고 있지만, 내가 믿기로는 개발과 보존은 반대의 개념이 아니다. 얼마든지 보존적 개발이 있을 수 있으며 무조건적 보존이 가져오는 방치는 환경을 오히려 파괴하는 일이다. 우리의 분명한 적은, 새 역사 창조라는 허구적 어구를 앞세워 과거 사실들을 멸실하는 반달리즘이다. 


 모든 건축은 언젠가는 소멸할 수밖에 없으며, 새로운 환경에 따라 재개발도 되어야 하고 변화하는 것이 마땅하다. 중요한 것은 시간에 따라 건축이 바뀌더라도 수많은 세월 동안 그 장소에 새겨졌던 삶에 대한 기억을 유지시켜 다음 세대에 이어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헝가리 태생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인 게오르규 루카치의 말을 빌리면, 바른 진보란 백지상태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앞선 시대의 업적을 흡수하여 이루어지는 누적적인 일이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에 뢰머베르크광장과 쉬른미술관이라는 곳이 있다. 1980년대부터 수많은 박물관과 미술관을 마인강변에 새롭게 세워 현대 문화도시로서 면모를 보인 프랑크푸르트지만 이 도시 역시 제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의 공격으로 폐허가 된 곳이었다. 중세 이후 이 도시의 중심으로 시청사가 있었던 뢰머광장도 흔적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파괴되었으나, 이곳은 패전의 상처를 딛고 일어선 프랑크푸르트 시민들이 제일 먼저 복구하고자 한 프랑크푸르트의 상징적 장소였다.

그들은 맨 처음, 이 광장을 면하는 간선도로변에 현대식 쇼핑센터를 지어 그들의 경제부흥을 알리고자 했으며 이 화려한 새 건축이 자랑스러운 미래를 상징하게 될 줄로 믿었다. 그러나 알루미늄 피막을 가진 상업건축이 로마시대 때부터 있었던 역사적 장소가 가진 기억을 지운 것을 알게 된 그들은 결국 그들의 정체성을 의문하게 되고 이 경박한 건축을 이내 후회하게 된다.

그들은 우여곡절을 겪은 다음 뢰머광장 주위에 전쟁 직전까지 있었던 건축물들을 보다 더 역사적 원형에 가까운 모습으로 복원하여 그들의 자랑스러운 과거로 돌아가는 계획을 만들었다. 그로써 아마도 전쟁의 폐허를 완전히 없애고 패전의 기억마저 없앨 수 있으리라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곧 다시 후회했다 한다. 이 뢰머광장에 일어났던 슬픈 과거를 억지로 기억하지 못하도록 새롭게 나타난 옛 모습들은 도시의 역사를 오히려 후퇴시켰을 뿐이었다. 마치 이상한 요술나라를 만든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 이 건물들은 박제된 세트였지 건축이 아니었다. 그들 나치시대의 악몽과 패전의 슬픈 과거를 감추려 한 이 세트에서 공허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고 더욱 손가락질받게 되는 자괴의 감정도 함께 느꼈던 것이다.

그러다 80년, 뢰머광장과 뢰머대성당을 연결하는 중요한 장소에 문화복합시설을 세우기로 하고 이를 현상 공모하여, 베를린 출신의 젊은 건축가 반게르트와 얀센, 숄츠와 슐테스가 이룬 협동 팀의 설계안이 당선함으로써 이 뢰머광장은 전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결과부터 이야기하면, 로마시대 이후 오늘날까지의 역사를 그대로 보존할 수 있었으며 그들은 문화역사 도시의 성숙한 시민으로서 자긍심을 확인하게 되었다.

쉬른 미술관이라 불리는 이 건축은 3000평 정도의 복합문화공간으로, 미술전시관과 음악학교와 미술공방 그리고 몇 개의 숙박시설과 소규모 문화상업시설로 구성되어 있다. 그들은 이 건축물들을 단순한 하나의 건축물이나 기념적 장치물로 파악한 것이 아니라, 장소와 장소를 연결하고 시간과 시간을 이어주는 도시적 유기체로 개념을 설정하였고, 정확한 역사인식과 면밀한 주변 맥락의 분석을 거친 이 새로운 건축은 뢰머광장에 새로운 공간과 시간을 열게 된다.

대성당에서 시청사에 이르는 150m 길이의 공간에 옛날 길이 있었던 위치에 다시 길을 만들었으며, 건물이 있었던 부분은 건물로, 광장은 다시 광장으로 안과 바깥을 만들고 그들을 적절히 연결시켰다. 그리고 새롭게 구축된 그 길을 따라가는 동안에, 로마시대의 유적도 만나고 카롤링거 시대의 유적도 만나며, 근대의 비극도 만나고 현대의 시간과 흔적을 실제와 상상 속에서 부딪히는 무한한 시간여행을 하도록 한다.

때로는 긴장하면서 때로는 이완되도록 다양하게 조직된 이 속의 공간을 체험하면서, 내.외부가 자연스레 연결되는 회랑과 길과 복도를 따라가다 중앙 로툰다로 나오게 되면 둥근 홀 속에 혼자 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100m가 넘는 길이의 좁고 긴 열주의 모습은 마치 대성당과 뢰머광장 사이에 잠시 끊어졌던 역사의 공백을 강렬하게 접속시키는 듯하며, 그 앞 마당에는 지난 시대 유구들이 그냥 부서진 채로 있어 마치 버려진 듯하나 사실은 그 속에 담긴 지난 세월들의 이야기를 침묵으로 들을 수 있다. 누구나 이 속에서 역사가 적층된 모습을 실제로 보게 되면서 자연스레 역사적 전개 과정 속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느낄 수 있게 된 것이다.

옛날 '쉬베르트페르게쉔'이라고 이름했던 길은 그 앞에 '옛날의'이란 단어를 붙여서 새 길의 이름을 표시하였는데, 한 노인이 손자인 듯한 아이의 손을 잡고 이곳에 다가와 벽에 붙은 그 길 이름판을 가리키며 얘기하고 있었다. 아마도 어릴 적 이곳, 이 거리에서 겪었던 얘기를 들려주고 있었을 게다.

우리는 어떨까. 자기 가족의 역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 재개발지구로 확정되었다고 하여 '경축, 재개발 확정'이라는 현수막을 내걸고 희희낙락하는 우리들. 아무리 건축이 문화가 아니라 부동산으로 전락한 지 오래되었다고 하더라도 과거상실을 축하하는 우리들의 정체는 유목민인가.

김원일의 소설 '마당 깊은 집'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이 난다. "나는 마당 깊은 집의 그 깊은 안마당을 다른 흙으로 돋우어 올리는 것을 목격했다. 내 대구 생활의 첫 일 년이 저렇게 묻히고 마는구나 하고 나는 슬픔 가득찬 마음으로 그 묻히는 땅을 보았다…. 곧 이층 양옥집이 초라한 내 삶의 족적을 딛듯 그 땅에 우뚝 서게 될 것이다."

건축은 강력한 기억장치이며 우리의 정체성은 총체적 문화인 건축을 통하여 확인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건축을 시대의 거울이라고 칭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 시대의 건축 거울을 통해 비쳐지는 서울은 도무지 600년 역사를 가진 고도(古都)라고 믿기 힘든 급조된 풍경이다. 아무리 경복궁을 복원하여도 박제일 수밖에 없는 그런 건축은 진실이 아니다. 오히려 악다구니하는 지금의 도시풍경이 천박해도 그것이 우리의 삶 터인 한, 그 기억을 재개발 속에 남긴다면 그것은 진실의 건축이며 귀중한 현대의 유적이 된다.

우리는 너무도 쉽게 짓고 너무도 쉽게 허무는 것 아닌가.

승효상 <건축사무소'이로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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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자가 산 자와 함께 어울리는 공간


열두 그루의 느릅나무가 만든 신전은 죽은 이들을 슬퍼하며 보내는 지상의 마지막 고별소다. 얼마나 아름다웠으면 20세기의 명배우 그레타 가르보가 이 곳에 묻히겠다고 했을까.

‘회상의 숲’에서 ‘부활의 교회’까지의 길.

30년이 훨씬 넘는 세월을 건축과 함께 살았으니 세상의 웬만한 건축은 어지간히 다 알고 있음직도 하겠지만 뜻밖의 건축을 만나 내 건축을 다시 쓰게 하는 일이 있다. 여전히 부족하고 편협한 나의 견문과 학식이 부끄럽기도 하나 한편으로는 또 다른 시작점에 설 수 있는 게 여간 기쁜 일이 아니다.

바로 스웨덴의 건축가 시구르트 레베렌츠(1885~1975)를 만난 일이 그러했다. 스칸디나비아 3국 중의 하나인 스웨덴은 한때 발트 해역을 지배한 강대국이었고 현재 세계에서 가장 복지정책이 발달한 나라지만 현대 유럽에서는 지리적.문화적 변방이다. 더구나 우리는 서양문명의 주류에 의해 과도하게 경도된 교육을 받았던 까닭에 그 변방의 문물을 잘 알 리가 없는 터에 레베렌츠라는 지방의 건축가는 나에게 너무도 생소한 이름이었다.

그러다 1999년 런던에서 1년을 살면서, 이 건축가의 회고전에 즈음해 출판된 '고전주의의 딜레마' 라는 제목의 책을 읽고 한동안을 이 건축가에 빨려들고 만 것이다.

그 책의 서문은 '침묵의 건축가'라는 제목을 달고 있었다. 침묵의 건축가? 그는 90세의 일기를 기록하면서 한 줄의 글조차 남기지 아니하였으며 단 한번도 교육현장에 선 일이 없다. 오로지 북구의 건축 현장을 지킨 옹고집의 건축가였다. 그래서 침묵의 건축가인가?

*** '비움의 美'추구한 레베렌츠

스웨덴의 건축가 중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사람은 '스톡홀름 중앙도서관'을 설계한 군라드 아스플룬트이다. 20세기 건축가를 지칭할 때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아스플룬트는 정치적이고 사교적 성격을 가졌으나 학교 동기생 친구였던 레베렌츠는 비타협적이고 내성적 성격으로 오로지 건축밖에 몰랐다고 한다.



그들이 활동을 시작한 20세기 초는 이미 모더니즘이 전 유럽을 휩쓸기 시작하여 바야흐로 새로운 예술과 새로운 문화에 대한 막연한 기대가 돋아나고 그로 인해 다소의 긴장이 조성되던 때였다.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인물이 필요하던 때, 정치적 성향이 짙은 젊은 아스플룬트는 스웨덴에서 그 시대가 만든 대표적 건축가가 된다. 레베렌츠를 끌어들여 한 팀을 이룬 그는 약관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프로젝트를 담당하게 되었고, '우드랜드 공동묘지' 는 1917년 30대 초반의 이들이 공동으로 현상설계에 응모해 당선된 프로젝트다.

이 프로젝트가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일본 잡지에 소개된 아스플룬트가 설계한 장제장(葬祭場) 때문이다. 추상적으로 보일 정도로 단순한 입면과 그 앞의 투박한 십자가가 부드러운 녹색의 구릉 위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며 서 있는 광경은 절제한 건축이 갖는 폭발적 힘을 보여준다. 그래서 나도 아스플룬트 찬미자였었다.

그러나 '고전주의의 딜레마'라는 책을 읽으면서 그 장제장이 그토록 감동적으로 보이는 이유가 그 건축 자체보다 그 공동묘지의 조경 때문이었으며-사실 장제장의 내부공간은 진부하다- 그 조경을 만든 이가 바로 레베렌츠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특히 그 아름다운 구릉이며 나무들이 자연 상태의 것이 아니라 바로 레베렌츠가 만든 인공적인 것이었는데 그에 관한 수많은 스케치들이 그 책 속에 실려 있었다.

공동묘지의 건설이 한창이던 1934년 레베렌츠는 우드랜드 공동묘지의 중앙위원회에 의해 해임된다. 위원회의 부당한 요구에 사사건건 충돌해 온 결과였다.

나는 그의 건축을 직접 보고자 기회를 노리던 중 런던 생활을 마감하고 서울로 돌아 오기 직전 순전히 그의 건축만을 보기 위해 스웨덴으로 올라갔다. 스톡홀름에서 하루를 묵은 뒤 아침 일찍 탄 택시 속에서 운전기사가 그레타 가르보가 최근 이 공동묘지에 묻혔다는 말을 했다. 그가 죽기 몇 해 전 직접 이곳을 와보고 이 곳의 아름다움에 반해 스스로 이곳에 묻히기로 정했다고 한다. 그럴 정도로 입구에서 본 묘역의 광경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멀리 눈에 익은 아스플룬트의 장제장과 십자가가 보이고 부드러운 곡선의 구릉들이 뭉게구름들을 가볍게 푸른 하늘로 띄우고 있는데, 이게 공동묘지인가. 우리네 기괴한 공동묘지의 풍경과는 너무도 다르다.

*** 부드러운 인공 언덕 위의 숲

나를 안내해 주기로 한 관리인은 여기서 40년을 근무했다고 하는 노인이었다. 그와 입구에서 만나 방문 루트에 대해 협의하던 중 아스플룬트의 장제장보다 레베렌츠가 만든 루트를 따라가자고 하자 그는 무척 놀란 표정을 지었다. 대부분의 방문객은 장제장을 먼저 찾는 것이 순서였으며 특히 일본인이 위주인 동양인 방문객은 전부가 그렇다는 것인데, 어떻게 레베렌츠를 아느냐는 것이었다. 그는 동행하는 동안 신난 표정으로 고집쟁이 레베렌츠가 정치적인 아스플룬트보다 얼마나 더 위대한지 입이 마르고 닳도록 설명하였고 나는 책에 적혔던 내용을 상기하며 맞장구쳤다.

레베렌츠의 이 공동묘지는 단순한 묘역이나 조경이 아니었다. 죽은 자와 산 자가 끊임없이 대화하고 교류하는 도시였으며 스스로의 삶에 대해 자문하는 사유의 공간이자 인간에 대한 신의 축복을 주제로 하는 대건축이었다.

'회상의 숲'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공의 언덕과 열두 그루의 느릅나무는 그가 만든 경건한 신전이며, 여기서 '부활의 교회'까지 1km에 이르는 길은 긴장과 이완을 교차시키며 산 자와 죽은 자를 경건한 의식 속에 만나게 하는 여로다. 걷는다는 것은 여기서 한 편의 아름다운 서사시였다. 땅의 변화나 나무와 풀들은 그의 유용한 도구였으며 때로는 울창한 나무 사이로 떨어지는 햇살이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가르친다. 비석들은 마치 폐허의 주춧돌처럼 그냥 널브러져 있기도 하여 그로 인해 죽은 자에 대한 기억을 처절하게 만들기도 하고 때로는 뒤로 돌아앉게 하여 그들이 이제는 돌아 올 수 없는 이들임을 알게 한다. 더러는 한 곳에 모여 앉아 죽은 자들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길의 끝은 '부활의 교회' 라는 이름이 붙은 작은 교회의 검은색 문이다. 짙은 침묵이 무겁게 내려앉아 있는 교회의 내부에는 또 하나의 집 모양을 한 제단이 있어 내가 서 있는 곳이 내부인지 외부인지 분간을 어렵게 한다. 어쩌면 삶과 죽음의 경계 위에 있는 듯 죽은 자와 산 자는 여기서 별리의 정을 나누는데, 남쪽의 정교한 철제 문을 디밀고 나온 순간 낮게 깔린 또 다른 묘역에서는 죽은 자들의 묘석과 풀밭이 정갈한 햇살을 받으며 아름다운 공동체를 이루며 기다리고 있었다. 부활이었다.

*** 자연과의 교감 통해 희망 불러

'성서적 풍경'. 그렇다. 그 책의 한 구절에서 레베렌츠가 만든 건축은 '성서적 풍경'이라고 적혀 있었다. 풍경에 대한 이 성스러운 교본이 전하는 메시지는 채움을 목적으로 하는 전통적 서양의 건축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으며 비움이 새로운 가치라고 했다.

그는 이 우드랜드 공동묘지를 설계하면서 애초에 비우고 절제하며 침묵을 통해 그의 본질만을 남겨 놓으려 한 것이다. 그가 만든 비움은 현대의 작가들에게 곧잘 발견되는 절망적 비움이 아니라 희망적 비움이었으며 시어에 가득 찬 미학이었다. 죽은 자와 자연과의 관계를 통해 결국은 산 자인 우리의 가슴을 나직하게 두드리는 메시지, ' 이 세상은 얼마나 살 만한 가치가 있도록 아름다운 곳인가'

비록 한 줄의 문장도 남기지 않고 가르치지도 않았지만 그는 그의 침묵적 건축을 통하여 그가 옳다고 믿었던 모든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으며 그의 건축은 어떤 글보다도 더욱 설득력 있는 명문이었다.

승효상 <건축사무소 '이로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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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업과 문화 공간 배려한 미완의 이상도시


기묘하면서도 활력이 넘치는 기둥이 떠받친 공원의 들머리는 건축이 곧 도시요 그 도시공간이 바로 건축이 되는 ‘건축적 조경’의 본보기로 가우디가 꿈꾼 이상도시였다.

요즘 서울 가꾸기가 한창이다. 그 과정에서 여러 불편을 시민들이 겪고 있지만 결과가 좋으면 그것쯤은 대수가 아닐 게다. 내가 사는 대학로에도 최근 무슨 발전위원회인가를 결성해 가며 오랫동안 단장 공사를 벌였다.

근데 그 결과가 하도 가관이어서 심사가 보통 뒤틀리지 않는다. 멀쩡한 가로수들을 뽑아내어 우스꽝스런 석조물로 가로분리대를 만들더니 보도를 다 뒤집어 희한한 모양을 그리고 시퍼렇고 시뻘건 재료로 덮어 온 거리를 3류 어린이 놀이터 같은 모양으로 만들고 말았다.

거리 위에 놓인 조각이란 것은 아무리 너그럽게 보고자 해도 통행의 방해물일 뿐이며 새로 설치한 가로등이나 벤치들은 그야말로 중구난방이요 부조화의 극치니 도대체 우리의 미적 수준이 이토록 저급한 상황인가. 도시 풍경의 질적 수준을 결정하는 것은 건축이 아니라 그 건축물들 사이에 있는 빈 공간들이다.



알록달록한 타일조각을 모자이크한 동물 조각 벤치는 율동감이 넘친다.

 
가로나 광장, 공원뿐 아니라 건물 사이의 틈새 공간까지, 도시의 크고 작은 공동체적 삶을 담는 이러한 빈 공간에 대한 배려가 바로 그 도시의 의식수준이며 문화의 바로미터인 것이다. 우리가 선진 도시에 가서 기죽는 이유가 공공 시설물에 표현된 그들의 세련된 문화의지 때문인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도시공간을 거론할 때마다 요즘 내가 기준으로 삼는 도시가 스페인의 바르셀로나다. 스페인의 근세사는 부패한 권력과 내전, 그리고 독재정치로 쇠락하던 모습이어서 우리와 그리 다르지 않은데 1992년 올림픽을 계기로 괄목할 발전을 이루더니 건축과 디자인을 통해 단연코 세계의 선두대열에 서는 국가가 되었다.

바르셀로나 하면 1883년 이래 아직 짓고 있는 '사그라다 파밀리아'라는 성당의 이미지가 떠오를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하루에도 수만명의 관광객을 부르는 이 건축에 대해 사실 큰 관심을 두고 있지 않았다. 최고의 탑, 최대 면적 혹은 최장의 공사기간, 이런 기록은 기네스북에 오를 가치가 있는지는 몰라도 건축의 바른 목표는 아닌 까닭이며, 이 건축의 양식적 분류인 고딕은 이미 오래 전의 것이어서 새로운 시대에 맞지도 않는다. 따라서 내 서가에 그에 관한 책 한권 놓여있지 않을 정도로 가우디는 나의 관심 밖이었는데, 이것이 큰 잘못이라는 것을 나는 99년 귀엘 공원에 가서 비로소 알게 된다.

바르셀로나가 도시공간과 공공시설에 쏟는 노력의 크기가 얼마나 큰지는 조금만 거리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건물들이야 오랜 역사를 지닌 다른 유럽 도시들과 그리 다를 바가 없지만 공원이나 광장, 거리를 가꾼 모습이 여간 예사롭지 않다. 그들이 공공공간을 만드는 방법은 그냥 예쁜 단장과 세련된 시설물의 설치가 아니라 감동을 주는 '공동의 장소'를 부단히 만들어 나간다는 것이다.

변두리 언덕을 복합스포츠 지역으로 만든 발 데브론 공원이나 저소득층 주택지인 옛 항구 바르셀로네타를 재개발한 해변가의 풍경은 단순한 조경이 아니라 바르셀로나의 도시 성격을 가장 잘 부각하는 상징적 장소며 이 도시의 큰 건축이 되었다. 전문용어로 '건축적 조경'이라는 말이 있는데 옥외공간을 건축처럼 만든다는 뜻의 이 단어는 현재 세계 건축계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화두로서 그 실천이 가장 활발한 곳이 바르셀로나다.

어떻게 이 도시가 현대건축의 본산지처럼 되었을까. 바로 안토니오 가우디(1852~1926)가 만든 귀엘 공원이 그 뿌리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귀엘 공원의 모습은 화려한 색의 타일 조각으로 모자이크된 벤치나, 용이나 거북의 모양을 한 기묘한 장식물들, 그리고 기괴한 모습의 열주들에 대한 인상이며 이 공원을 소개하는 모든 책이 그러한 사진으로 채워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한 장식들로 가득 찬 건축이, 건축을 우리 삶의 문제와 떼어서 생각하지 못하는 나의 관심을 끌 리가 없어 이 공원을 가는 일에 시큰둥하였으나 공원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긴장하고 말았다.

86개 기둥이 가득 찬 입구의 공간을 들어서는 순간 이 공원은 단순한 공원이 아니라는 것을 느낀 것이다. 이곳은 가우디가 만들고자 한 새로운 도시의 중심 상업시설인 시장이었으며 이 시장의 옥상인 빈 터는 문화시설인 공연장이었다. 또한 이 공원은 길의 체계가 완벽한 도시의 하부구조를 가지고 있었는데 공원 속의 평탄지들은 어느 곳에서든 지중해를 볼 수 있게 한 주택지였다. 다시 말하면 이 공원의 모든 시설은 어떤 도시를 위한 시설이었으니 이 귀엘 공원은 가우디의 이상도시였던 것이다. 놀라운 일이었다.

나는 이내 서점으로 가서 이 귀엘 공원에 관한 기록들을 찾아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읽을 수 있었다. 가우디의 강력한 후원자였던 귀엘 백작이 1895년 새로운 공동체를 꿈꾸며 바르셀로나 교외에 토지를 매입하기 시작하고 이 야심찬 프로젝트를 가우디에게 의뢰하게 된다. 절대주의가 위기에 처한 근대에 기계시대를 바라보며 카탈루냐 지방의 모더니즘을 꿈꾸고 있던 가우디는 마침내 꿈꾸던 그의 이상도시를 그린다. 모든 집이 바르셀로나의 도시와 지중해를 쳐다보도록 15㏊의 땅에 300평 내지 600평 크기의 택지 60개를 만들고 문화시설을 비롯한 공동체의 완전한 삶을 위한 여러 세부적 계획을 담았다.

그러나 이 계획은 실패하고 만다. 전원이라고 여겼던 땅이 도시의 팽창으로 도시 내에 위치하게 되었고 귀엘 백작과 다른 귀족들 간의 의견대립으로 필지 분양이 겨우 3필지에 그쳐 이 도시는 이상 속에만 남게 되었다.

처참한 실패에 대단한 상처를 받은 귀엘 백작은 1918년 운명하게 되고 가우디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건축에 전념코자 현장으로 거처를 옮기게 됨에 따라 이 귀엘 공원에 관한 모든 일은 중단되었다. 그리고 팔리지 않은 빈 땅에는 나무와 풀들이 무성히 자랐으며 시당국이 22년 이 부지들을 매입해 결국 이 실패한 도시는 공원으로 변하고 말았다.

도시 완성은 실패했지만 이미 도시 인프라들이 만들어져 있는 터라 이 공원에는 종래의 공원과는 사뭇 다른 모습들이 보인다. 곳곳의 하수로는 그대로 건축이며 절묘한 길들은 조각 같은 쉼터를 가진 공동체 공간이고 계단은 그러한 공공영역을 아름답게 이어주는 매개공간이다. 조경과 건축이 구분되어 있지 않고 땅이 건축이며 건축이 땅이어서 도시와 건축, 길과 광장 모두가 완벽히 조화로운 공간이었다. 바로 여기에 현대건축의 중요한 주제며 바르셀로나 특유의 풍경인 '건축적 조경'에 대한 실마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가우디의 건축을 기기묘묘한 장식과 자유분망한 형태로만 보는 것은 큰 잘못이었다. 그에게 건축은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자연과 함께 있어야 하며 전통과 함께 있어야 한다. 카탈루냐인이었던 그의 건축은 자연과 역사를 건축화 하고자 한 집념의 소산이었으며 나아가 이를 통합하고자 하는 새로운 모더니즘을 위한 제안이었다.

이상도시의 꿈을 접고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에만 몰두하던 가우디는 26년 성당 현장 앞의 길을 건너다 전차에 치여 74세의 생을 끝내고 민다.

그의 도시는 실패했지만 그의 신념은 오늘날 미궁에 빠진 현대건축을 관통하는 뚜렷한 실마리가 되었으며 '사그라다 파밀리아'가 그 실체인 것을 깨달은 나는, 오늘날도 이어지는 참배의 행렬을 찾아 그가 묻힌 이 성당의 현장으로 황급히 발걸음을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승효상 <건축사무소 '이로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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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도시 뒤덮은 상업주의 '살풍경'

나치가 유태인과 관련된 책들을 불태운 사건을 상징한 베벨광장의 기념물. 텅 빈 하양 서가가 지성의 학살을 침묵으로 전한다.

통일 독일의 상징인 베를린 포츠담 광장에 세워진 상업주의 물씬한 소니센터플라자. 자본은 역사의 도시를 붕괴시켰다.

난 베를린에 가방을 하나 두고 왔어
그래서 곧 그리 가야 해
지난날 행복은
모두 그 가방 속에 있는 거야

파리 마들렌 거리도 눈부시게 아름답고
5월의 로마 시내를 걷는 것도 아름답지
여름 밤 빈에서 혼자 마시는 와인도 좋지만
그대들이 웃을 때
난 오늘도 베를린을 생각해
베를린에 가방을 하나 두고 왔기 때문이야
마를레네 디트리히의 노래 '베를린의 가방'.

베를린 출신이면서 나치를 피해 할리우드에 간 후 미국 병사를 위해 노래 불렀던 세기적 여배우 마를레네 디트리히, 그녀가 종전 후 그토록 그리던 고향에 돌아왔으나 상처 받은 베를린 시민들은 조국을 등졌던 그녀에게 할리우드로 돌아갈 것을 요구한다. 떠나 살 수밖에 없었던 그녀였지만 이렇게 노래하도록 진정한 고향이었던 베를린은 1992년 그녀가 파리에서 죽자 그 주검을 옮겨와 장례를 치르고 그녀의 어머니 곁에 묻어 주었다.

이 일은 베를린 시민들이 가진 회한과 슬픈 애정의 일단을 확인하게 하는 일이었다. 그녀의 땅 베를린, 이 도시는 오랜 역사를 가진 도시들이 즐비한 유럽에서는 대단히 젊은 도시다. 1237년에야 역사에 나타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젊다라는 것은 그런 연대보다는 이 도시가 내뿜고 있는 에너지 때문인데, 그 에너지는 신생도시에서 흔히 보이는 저돌적이거나 모험적인 게 아니라 깊은 성찰과 오랜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어서 몹시 무겁다.

*** 나치와 냉전을 기억하던 광장


 베를린에 관한 어느 책 첫머리를 보면 이 도시를 가리켜 명상과 대화, 교환의 메트로폴리스라고 했다. 명상의 도시 베를린. 그렇다. 이 도시에 가면 어디에서도 우리 인류에 대한 존엄을 성찰하게 하는 풍경을 보게 된다. 그냥 철학적이거나 관념적인 명상이 아니라 실존했던 역사를 반드시 기억하고 그를 우리의 현실 속에 다시 되살리는 것이다.

베를린을 가로 지르는 중심도로인 운터덴린덴에 '노이에바헤'라는 고전주의 형식의 석조 건축이 하나 있다. 독일 근세건축의 거장인 칼 프리드리히 싱켈이 지은 이 단아한 건축은, 죽은 병사를 안고 있는 어머니 조각이 있는 지극히 경건하고 검박한 내부 공간을 가지고 있어 모든 방문자들의 옷깃을 여미게 한다. 애초에 왕의 경비초소로 쓰였지만 쓰린 역사를 가진 베를린은 이를 '전쟁과 폭정의 희생'을 기념하는 건축으로 만들어 이 도시가 가진 침묵의 의미를 일깨우고 있다.

건너편에 있는 베벨광장에는 나치가 유대인과 관련된 책들을 불태우게 한 사건을 기억하게 하는 기념물이 있다. 그냥 비워져 있는 넓은 광장 가운데 1m 남짓한 크기의 유리덮개가 있고, 그 속에 밝은 지하 공간이 있는데, 비워진 백색의 서가만 있어 지성의 학살을 침묵으로 전하고 있다. 바로 그 앞 바닥에는 동판 위에 쓰여진 시인 하이네의 글이 있다. ' 책을 불사르는 것은 오직 시작일 뿐이다. 그는 결국 인류도 태우게 된다'.

인근에는 유대인 교회당 폐허 그대로를 기념 공원으로 만들어 놓았고 홀로코스트 기념관들이 즐비하며, 베를린 장벽이 있던 곳에는 공산주의의 폭정에 희생된 이들을 위한 기념물 등 시내 곳곳에 과거의 상처를 기리는 건축과 장소가 부지기수지만 지금도 또 새롭게 만들고 있다. 그야말로 성찰하는 도시요, 존재의 근본을 묻는 모습을 다듬고 다듬는 도시가 베를린이다.

익명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인 도시는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진다. 문화를 목적으로 하면 문화도시가 되고 경제가 목적이면 상업도시며 권력에 봉사하면 봉건도시가 되고 편향된 사상을 상징하게 되면 이념도시인데, 그에 따라 우리 삶의 형태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이 중에서 우리를 가장 피폐화시키는 게 이념도시이다. 이런 도시에서는 인간을 도구화시키기 때문이다.

알베르트 슈페르라는 건축가가 있었다. 히틀러가 총애한 이 사람은 나치제국의 2인자적 지위를 누린 파시즘 건축가였다. 히틀러와 나치제국의 영화를 과장하기 위한 도시와 건축을 짓는 일에 몰두한 그의 건축 정신을 지배하는 것은 오로지 파쇼에 대한 광신이었으며, 그런 건축은 극도로 인간을 왜소하게 하고 마비시키며 파멸케 하는 힘만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히틀러가 '세계의 수도'라는 이름으로 1938년에 이 왜곡된 건축가를 시켜 베를린에 세우기 시작한 '게르마니아'가 바로 그런 도시의 전형이었다. 오랜 역사의 문화적 흔적들을 깡그리 지우며 무려 7km에 달하는 직선도로를 내고 그 도로의 끝에 300m가 넘는 돔의 국민대회당(Grosse Halle)을 그렸던 도시, 비뚤어진 민족주의 이념에 사로잡힌 슈페르와 히틀러의 광신적 신전을 위한 이 허망한 도시는 제2차 세계대전의 종언과 함께 전대미문의 폐허가 되고 말았다.

참상을 딛고 일어선 베를린 시민들이 폐허 위에 제일 먼저 세운 도시는 문화도시였다. 무너진 베를린 필하모니 홀을 다시 세우고 베를린 미술관 신관과 국립도서관을 연이어 문화포럼이라는 이름으로 켐퍼광장에 지으면서 베를린은 다시 중요한 문화적 생산기지가 된다. 이 광장 옆에는 베를린 장벽이 지나가는 포츠담광장이 있어 동베를린에 대해 민주주의의 우위를 선전하기에도 제격이었다. 이 포츠담 광장은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 유럽의 중심으로도 불릴 만큼 베를린의 문화적 중심지였으나 폐허가 된 이곳에 장벽까지 서게 되면서 이 장소는 20세기 이념 대립의 중요한 상징이 된 것이다.

그러다 89년 11월 9일, 근 반세기의 갈등 속에서 온갖 비극적 현대사를 기록하던 이 장벽이 무너졌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사건이었으며 온 세계가 충격과 환호로 뒤엉킨 날이었다. 그러나 그날 저녁, 놀랍게도 다임러 벤츠와 소니는 연합하여 이 포츠담광장지역 15만평을 재개발하는 어마어마한 계획을 발표했다. 필시 저 거대 재벌은 이 역사적인 사건을 미리 알고 있었던 듯하다.

*** 현란한 빌딩 사이로 잊혀져

그 이후 그들의 말대로 이를 위해 국제 설계경기가 비상한 관심 속에 진행되었고, 논란 끝에 상업주의 냄새가 물씬 나는 안이 채택돼 실현된다. 막대한 자본으로 호화 빌딩들로 채워진 현란한 도시를 세운 것이다. 자본주의의 승리였으며, 화려한 네온사인이 과거의 비극을 씻는 새로운 도시라고 믿었을 게다.

그러나 베를린 장벽의 흔적을 완벽히 지우고 나타난 이 도시는 기괴할 정도로 큰 둥근 천장을 만들어 온갖 괴성과 어지러운 부호로 가득 채운 후 인근 문화로 세운 도시를 위협했다. 베를린 장벽 붕괴 10주년에 맞추어 이 도시가 완공되고 있을 때 런던에서 발간된 '빌딩 디자인'이라는 건축신문에 이 도시를 비판하는 글이 실렸다. 글 제목은 '자본이 붕괴시킨 역사의 도시' 다. 장구한 세월 동안 쌓여 온 역사의 흔적을 지운 뒤 천박하게 분칠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건축 지성의 학살이라고까지 했다.

2003년 독일영화제의 각종 상을 휩쓴 '굿바이 레닌'이라는 영화 속에 그려진 베를린의 모습이 있다. 베를린 장벽이 제거되는 동안 의식불명에 빠졌던 어머니의 건강을 위해 아들 알렉스는 현실과 반대되는 상황을 만들어 열성 공산당원이었던 어머니가 꿈꾸는 세상이 현실이 되었음을 거짓으로 알린다. 수많은 이들이 베를린 장벽을 넘어 동 베를린 쪽으로 오는 조작된 방송 화면을 보이며 낭독되는 성명서는 이런 내용이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고통 받던 이들은 새로운 꿈에 부풀었습니다. 출세와 향락만이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는 아닙니다. 물질보다 더 값진 것-선의와 노동, 그리고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입니다…'.

이 영화의 감독 볼프강 벡커는 포츠담광장 위에 세워진 이 분별없는 도시를 경멸하였을 것이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삶을 꿈꾸던 베를린 시민들에게 나타난 이 허무한 향락의 도시를 그들은 기억해야 했으므로 이 영화는 그 기념비였다.

승효상 <건축사무소 '이로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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