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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휴먼이 몰려온다 - AI 시대, 다시 인간의 길을 여는 키워드 8
신상규 외 지음 / 아카넷 / 2020년 2월
평점 :
포스트휴먼? 처음 듣는 용어였다. 대학시절 너나할 것 없이 ‘포스트모던’를 언급하곤 했기에, post라는 낱말은 내게 익숙했다. post는 ‘탈’ 혹은 ‘~이후’라는 뜻의 접두어이다. 그렇다면 포스트휴먼이라 함은, ‘탈-인간’, ‘인간 이후’, 이렇게 투박하게 번역할 수 있다. 그러니까 ‘포스트휴먼’은 지금 규정하고 있는 ‘인간’이란 의미가 전복되는 순간을 맞이했음을 역설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겠다.
아카넷에서 출간한 <포스트휴먼이 몰려온다>는 다양한 분야에 속한 사람들이 ‘포스트휴먼’이라는 주제로 발표한 글들을 엮은 책이다. 기자, 철학자, 사회학자, 인문학자 등등이 참여해서 그 내용의 폭이 넓어졌다.
우선은, 제4차 산업혁명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포스트휴먼이 몰려온다>의 부제가 그것을 환기해준다. ‘AI시대, 다시 인간의 길을 여는 키워드 8’에서 알 수 있듯, 인공지능이 전면을 이룬다. 과학기술의 눈부신 발전으로 인해, 인간의 삶은 늘 변화해왔음을 모르는 이는 없을 것이다. 인공지능의 등장은 또 인간의 삶의 형태를 어떻게 획기적으로 바꾸어 놓을 것인가. ‘포스트휴먼’ 담론의 출발점이 바로 이 지점이다.
수많은 공상과학영화들은 기계지능의 시대를 예고해왔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대부분이 디스토피아로 표현되지 않았을까 싶다. 무분별한 과학기술의 진보에 대한 날선 비판, 경고의 메시지가 많았다. 21세기형 좀비로 추락하지 않기 위한 영화감독의 몸부림으로 보였다. 그런 예언자적 모습 덕분에 과학기술에 대한 숭배와 낙관적인 믿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그나마 가치판단을 유보한 공상과학영화를 고르라면, 영화 ‘허’를 꼽고 싶다. 인간과 감정적인 교류를 나누는 ‘로봇 사만다’, 매우 흥미로웠다. 비록 씁쓸한 결말이 되어버렸지만, 정서적으로 깊이 소통하는 과정에 초점을 맞추어보자. 이화인문과학원 교수 신상규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로봇과 부딪치는 일상의 도덕 경험들을 더욱 진지하게 해석하고 고민해야 한다. 로봇과의 대면에 관한 훨씬 더 다양하고 구체적인 이야기가 필요하다. 그들과 실제로 어떻게 지내며 어떤 경험을 하고 있는지 말이다. 그것들에 대해 느끼는 감정이나 경험을 가짜 경험이나 범주 착오라고 비난하기에 앞서 그것들이 갖는 의미를 훨씬 다양한 각도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들과 맺는 여러 관계적 양상을 ‘기계’라는 단일한 은유가 아니라 훨씬 다양한 은유를 통해 서술하고 표현할 수 있는 해석학적 가능성을 열어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138)
기계지능의 진보와 로봇의 상용화를 막기는 어렵다. 과학기술이 제공해주는 이기에 인류는 길들여져 버렸으니까. 애완기계의 시대의 도래를 앞두고 있는 이 시점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해석’이다. 궁극적으로 로봇이 아니라 로봇과 관계를 맺고 있는 개개인을 우리가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그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 이런 질문을 붙들어야 한다.
내면적인 변화 외에도 외적인 변화도 상상해보자. 포스트휴먼이란 사이보그를 뜻하는 것일까. 휴 허 교수처럼 신경계가 연결된 의체를 달아서, 반 인간 반 로봇이 된 존재, 그게 포스트휴먼을 지칭하는 것일까. 언젠가 성형수술을 하듯, 자기 다리를 자르고 로봇다리를 연결하려는 이들이 등장할지 알 수 없다.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유기체와 기계 사이의 존재가 부상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그러니 ‘인간’에 대한 정의는 다시 이뤄질 수밖에 없다. 이 지점이 바로 ‘포스트휴먼’ 담론 중 하나다.
한편, 디스토피아 영화들이 구현해냈듯, 기계지능에 의한 가짜뉴스와 범죄들이 일어날 것이다. 알고리즘이 신종 재앙을 일으킬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인공지능 기술로 상사인 목소리를 구현해 큰 돈을 빼돌렸다거나, 알고리즘의 자동적 매매로 투자자들을 속인다든지. 초보적인 알고리즘도 무시할 수 없다. 저마다의 취향 안에 사람들을 가두고 있는데 성공했으니까.
기타 기계지능에 대한 소소한 정보들도 흥미로웠다. 기계지능은 ‘자각 없는 수행’을 한다고, 자기가 뭘 하고 있는지 모른다고, 또 알파고가 인간과의 대국에서 그 바둑을 왜 둬야하는지, 승리든 패배든 그 사회적 파장이 어떻게 될지 등등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고. 다른 한편, 기계지능은 다양한 가사일보다 법률문서를 정리하는 일을 더 잘 해낸다고. 또 기계지능을 학습시키기 위해서 인간의 단순노동, 그것도 저임금을 받고 일하는 이들이 있다는 것, 그런 그림자 역시 곱씹어볼만 했다.
<포스트휴먼이 몰려온다>, 다양한 담론들이 뇌의 회로들을 뒤흔들기에 충분하다. 지적으로도 만족스럽고, 무비판적인 사람들의 경각심을 일깨우는 지점도 마음에 들었다.